과도한 법 해석의 시대
의학 용어로서 ‘하이퍼(hyper)’는 ‘과도한 상태, 조치’를 의미한다(예. 고혈압 hypertension, 하이퍼 나이프). 거의 남용되었다는 의미다.
이 용어는 최근 한 드라마에서도 사용되었지만, 본래 법률 격언에서 두드러진다. 죄형법정주의(nulla poena sine lege)에 근거한 ‘무죄 추정의 원칙(in dubio pro reo)’은 사실 확정 전에는 범죄자에게 유익한 의심상태를 유지하자는 의도였다. 그런데 만약 ‘하이퍼-무죄 추정(hyper-in dubio pro reo)’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과도한’ 또는 남용된 무죄 추정은 남용된 의술이 초래하는 범법처럼 사회를 위협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좀 더 심각한 것은 나쁘게 적용되는 과도한 조치를 상황 윤리를 내세워 받아들이려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주장은 악판(惡判)도 판(判)이니 살짝 눈감아 주고 일단 받아들여 보자는 것이다. 논란을 잠시 피해가자는 자기합리화의 주장처럼 들린다. 자기에게 유리한 판결이라면 과도한 법 적용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태도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두어야 한다. 과도하거나 남용하는 법 적용은 법 집행자 자신들 스스로 자해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점이다. 어느 드라마 평을 패러디해 본다면, “사람의 범죄를 수사하는 검사, 재판하는 판사들이 누구 보다 병들어 있는 법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이런 조용한 범법이 초래한 큰 위협이 비일비재하다면, 이 세계는 나에게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어쩌면 과도한 법의 적용은 곧 자기합리화의 허용과 맞닿아 있다. 하지만, 그것은 ‘만인의 법 앞에 평등’이라는 금언에 스스로 저촉되는 모순일 것이다. 하여 나는 이 지점에서 ‘자기합리화를 저항한다’라는 태도를 주목하려한다. 윤동주 시인의 시는 나의 이런 태도에 작은 등대처럼 빛난다.
과도한 자기합리화에 저항하는 윤동주의 시
최근 나는 논문 한 편을 읽었다. 그에 따르면 윤동주의 시는 ‘윤리적 개인으로서 존재하려는 용기의 시학’에 천착한다. 다시 말해, 그의 시는 현실 참여를 위한 저항시처럼 보이지만 그 내면에는 실존주의적 관점에서 자기 불안을 깨뜨려 종교적 실존에 이르려는 자기성찰이 주도한다.
윤동주의 시를 키르케고르(Søren Aabye Kierkegaard)가 주장한 실존 삼 단계 관점에서 읽어야 한다는 제안도 이런 맥락에 있다. 즉 그는 심미적-윤리적-종교적 단계를 거쳐 마침내 실존적 자기 이해를 완성한 것이다. 윤동주의 시에 폭넓게 드리워진 ‘절망’은 이제 용기의 원천이 된다. 이 용기는 자기 밖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다. 좌절하는 자신의 내면으로 다독이며 자기를 힘있게 견인하는 힘으로 활용한 것이다. 윤동주의 시는 험난하고 부조리한 세계를 대항하려는 의도가 앞서지 않는다. 오히려 이 뒤틀린 세계를 관통하려는 자기(self) 내면을 겨냥한다.”결론적으로 윤동주의 시는 저항이나 종교의 차원과 달리 ‘서정시의 정체를 유지하면서 절대적 진리에 대한 모방(미메시스)적 윤리에 도달하기 위해 자신과 싸운 흔적이 뚜렷하다.
이런 분석에 따르면, 시인 윤동주의 시는, 키르케고어의 관점처럼, 자기 시를 통해(그의 시는 연대기적, 서술 주제가 이미 개인의 성숙, 철학의 발전을 시사한다) 자기 실존의 심화를 성취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윤동주는 시대에 굴복하는 듯한 자기 실존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 불행한 실존에 머물지 않고 다시 일어나 개인의 성숙한 윤리를 발전시킨다. 마침내 그는 윤리적 실존으로부터 종교적 실존으로 나아간다. 그는 시를 쓰며 자기 실존을 완성에 이르도록 분투한 것이다.
과도한 자기성찰의 시대로
윤동주는 누구보다 자신에게 지독하리만치 저항적이었다. 그에게 자기 성찰은 곧 자기 합리화에 대한 저항과 같은 태도였다. 이 자기 저항의 결과 그는 ‘하이퍼 자기합리화’를 걷어낸다. 그의 저항은 자신을 향한 것이어서, 누구보다 자신을 우선하여 철저하게 ‘타자화’한다. 그의 시는 ‘자신 안에 있는 타자’를 찾아내어, 자신을 거듭거듭 조각해내는 분투의 결과였다. 그리하여 내가 윤동주의 시에 대해 미미하게나마 이해한 것은 ‘시가 자기 저항, 자기 변혁을 쉬지 않는 자기 성찰의 문학이다.’라는 것이다.
윤동주의 시는 험난하고 부조리한 세계를 대항하려는 의도가 앞서지 않는다. 오히려 이 뒤틀린 세계를 관통하려는 자기(self) 내면을 겨냥한다. 시를 사물을 관찰하는 도구나 이 세계의 아픔을 정조준하려는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윤동주는 시를 자기를 조련하는 운명의 도구처럼 받아들였다. 그래서 시를 통해 ‘슬픔’, ‘부끄러움’을 운명처럼 받아들였다. 아예 그런 자기 태도를 짐으로 짊어진 채 자기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갔다. 순례자로 살아갔다. 그리하여 끝내 이 세계의 통치자인 신을 인식하는데 이른다. 시의 언어를 통해 그 이해할 수 없는 신의 행보에 자기 실존을 조준하려고 분투했다. 그의 종착지는 ‘반성하는 인간(homo praxis)’이었다.
윤동주의 자기성찰의 태도는 1세기 유대 사회의 예언자 예수에게로 귀착될 수 있다. 예수는 사유와 시 같은 언어로 수많은 퇴고를 거듭하는 삶을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오늘날 그를 따르는 신앙인이라면 자기 퇴고를 거듭하며 누구보다 자기 저항에 머뭇머뭇하지 않는 순례자여야 한다.
그런 시인의 삶은 질문으로 더욱 견실해진다. 윤동주의 고백처럼 십자가의 첨탑에 시선을 두고 그곳에 이르려고 계속해서 조각하고 다듬어 성화(聖化)하고 있는지 되묻는 여정이어야 한다. 이처럼 자기성찰은 곧 자기합리화에 저항하는 행위이며, 그 저항이 변혁을 낳는다. 동일하게 오늘 나에게 다가오는 질문도 바로 이것이다. ‘과도한 자기성찰에 치열한가?’ 이 질문에 내가 주저하지 않고 대답한다면, 나와 세계를 지탱하는 내적 질서가 권력의 꽃처럼 끝내 시들지 않으리라는 것을 나는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