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디에 -죽은 길과 살아있는 길 사이

by 푸른킴

날씨가 맑고 바람이 상쾌하다. 5월에는 주로 집과 서재에 머물렀다. 일주일에 한 번 근처 산을 종주했다. 6월 들어 안식월을 좀 더 잘 보낼 겸 한 며칠 집을 잠시 벗어나기로 했다. 가까운 것에서 조금 떨어지면, 그때야 가까운 것들의 가치가 선명해지는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다.


나는 소중한 것은 늘 멀리 있다고 생각하는 버릇이 있다. 늘 후회하는 이치에 스스로 최적화된 이기적인 피조물이다. 그런데 가끔 멀리 떠나 고생을 좀 해보면 익숙한 것, 발아래 삶소중하다는 것을 실감한다. 묘한 경험이었다. 산이나 평지를 멀리 오래 걷는 방식이 좋았는데, 할 때마다 나름 지혜로운 방법이라는 자부심은 있다.가끔, 어리석은 방법일 수도 있지만 효과는 기대이상이었다.


사실, 매사에 고군분투하며 손에 잡히는 삶을 가꾸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그분들에 비하면 나는 그리 치열하지도 않다. 그러니 멀리 오래 걷는 나의 안식은 괜한 사치함만 더 도드라져서 부끄럽긴하다. 굳이 이유를 들자면, 평범한 것을 배우기 위해 특별한 일을 하려는 것 정도다. 덧붙이자면, 누구나 그렇듯, 가끔 멀리 떠나보면 한 곳에 머물러 보낸 지난 세월이 얼마나 소중한지 반성하고 전망도 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어쨌든, 6월 안식월 동안, 나는 오래 멀리 걷기로 했다. 원칙이라면, 머무는 곳에서 가고 싶은 곳까지 걷고, 다시 돌아오는 여정이다. 여정이 끝날 때까지 두 발로만 움직이는 것이다. 길 안내 앱보다는 표지판과 나의 감각을 따라 길을 따라가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복잡해진 길 때문에 성공보단 실패가 많았다. 가까운 거리도 돌아가기 일쑤였다. 가면서도 여기가 어딘지 알 수 없는 길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오래 걸려도 결국 목적지에 안착했다. 빨라야 한다는 사정만 없다면 자주 시도해야 할 걷기 방식이라는 생각도 여전했다.


‘걷는 행위’는 내가 나를 제물로 두고, 나를 재조명하는 개인의식이다. 그 의식(ritual)의 핵심에 나의 의식(thought)의 해체가 있다. 나는 '해체'라는 개념에는 분해와 결합이 함께 들어있다고 늘 생각한다. 발골하듯 굳어진 생각을 잘라내고, 충전하듯 새로운 사고를 받아들인다. 그동안 나의 걷기 훈련 끝에 이 의식은 오래, 멀리 걸음으로써 온전히 수행된다는 것을 알았다. 또한, 이 의식은 기본적으로 몸으로만, 특히 ‘두 발’로만 버티는 걷기로 진행된다는 것도 배웠다. 걷기의 핵심은 무념해질 때까지 그저 홀로 ‘길’을 걷는 행위다. 무념해진다는 것은 고착된 습관과 상념이 무의미하다고 인식되는 것이며, 동시에 잊어버린 처음 결단이 재활하여 다가올 생각에 새롭게 잇대어지는 순간에 발원한다.


이런 의식의 흐름에 유용한 길이 있다. 내 경험으로는 특히 산 아래까지 이어지면서 사방으로 멀리 펼쳐진 논둑길, 호수를 지척에 옆에 두고 오래전 만들어진 오솔길, 바다를 끼고 우두커니 서 있는 듯한 섬길, 비슷한 듯 펼쳐져 있는 산길, 도시를 관통하면서 변두리와 산으로 이어지다 다시 도시로 되돌아오는 길 등이다. 사전에 걸어본 적 없고, 눈으로 본 적 없는 길이라면 더욱 좋다.


이 의례의 끝은 언제일까? 아마도 발바닥의 한계에 직면할 때까지인 것 같다. 몸과 정신은 멀쩡해도 걷기를 가능하게 하는 힘은 발바닥의 감각, 발가락의 상태에서 나온다. 사상과 의식의 점검이라는 거대한 가치가 길을 걷는 힘이 아니다. 걷기의 성패는 발바닥, 발가락이라는 보이지 않는 근원에 달려있다. 걷기는 몸 전체가 아니라 이 발과 발가락의 힘으로 유지된다. 다리와 허리로 이어지는 힘이 떠받친다. 종아리가 힘을 주고, 무릎이 조절하며, 허벅지가 버텨주고, 허리가 받쳐주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거칠게 말한다면, 걷는 것은 머리에서 무엇인가를 일으키는 사유 촉발 의식이 아니다. 무상한 상태에서 발이 버텨주는 몸의 의식이다. 발이 버텨내는 이 힘이 견고할 때 새로운 사고가 스며든다. 나를 넘어서는 묵상으로 이어진다. 이 묵상은 나의 ‘두 발의 강건함’과 ‘허약성’이 대립하는 그 사이 어디쯤에서 일어나는 영적 변화다. 이 변화의 절정에서 마침내 나는 나를 직시할 수 있다. 지금까지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무엇을 향해, 어떻게, 왜 가고 있는지를 냉정하게 반추할 수 있다. 몸 하나를 두 발에 의지해서 걸으면서 이 이 익숙한 사실을 직험한다.


내 주위에 어떤 이는 이런 경험은 평범한 삶의 길로도 충분하다고 짚는다. 물론 그렇다. 하지만 나는 여기에 한 가지를 꼭 덧붙이고 싶다. 그 평범한 길도 오래 멀리 걸으면 아주 특별해진다는 것이다. 높은 산을 오르지 않아도, 먼바다를 항해하지 않아도, 오지의 숲을 헤매지 않아도 가능하다. 그저 나의 일상의 길에서 내 몸 하나로 닿을 수 있는 그 평범한 길을 최후의 순간까지 걷는다면, 그 길은 이미 특별해진다. 사실, 길은 없다. 걷는 이가 걸어가는 최후의 순간이 오면 길은 살아난다. 중요한 것은 걷는 사람이다.


이 걷기는 나에게 걷는 기도이다. 나는 걷는 것으로 ‘안식’을 보낸다. 지나온 내 삶을 포장한 겹을 벗겨내면서 순전한 속살의 결을 햇살에 드러내는 의식을 치른다. 걷기 안식은 여기에서 저기로 건너가는 두 발로 ‘건너가는’ 걸음으로써 성취하는 영성의 꽃이다. 돌아보니 이번 안식에서도 평소 즐겨 걷는, 인상 깊은 길의 형태를 찾아 걸었다. 평범했지만 원칙을 정했다. ‘멀리, 오래, 위험하게.’ 눈앞에 검은색이 역력했지만 결국, 행복한 여정이었다. 나는 이것을 ‘검은 안식’이라 부르기로 했다. 이것은 어둠 속에 공존하는 빛, 빛 속에 공존하는 어둠을 받아들이며 스스로 고통과 함께 누리는 안식이다.


요컨대 걷기는 진리를 뒤따르는 나의 욕구다. 진리란 상식과 관계적 인간으로 이끌어가며 인간다음을 완성하는 힘이다. 나아가 타인을 자신처럼 사랑하며, 소유의 욕망을 비워내는 케노시스(kenosis, 자기 비움)이다. 그것을 실현하는 사람이 있을 때만 살아나는 유기체다.


안식에 걷기를 선택하는 나는 이 진리가 사상이나 이념에 굴복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배운다. 두 발로, 그 감각이 사라질 때까지 걸으면서 몸에 새긴다. 그렇게 자기 길을 걷는 이가 많을 때 진리의 조각들은 더 선명해진다고 확신하는 중이다. 나의 숨어버린 조각을 찾아 길을 걷다 보면 결국, 어느 길에서 만날 것이다. 그 길이야말로 살아있는 길이 아닐까 싶다.


걷기

한 걸음씩 내딛는 반복행동

마음만으로는 불가능하고

반드시 몸이 움직여야 하는 능동


언제부터 걷기를 즐겼을까?

국민학교 들어가기 전,

친구와 함께 온종일 골목을 걸어 다닌 때부터.

친구와 함께.


걷기는 목적지 없는 순례

마지막 걸음은 언제나

귀향.

본향을 향한 귀천 여행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하늘로 귀향한 그날 이후

아버지의 그날엔 천천히,

어머니의 그날 즈음엔 견실하게, 쉬지 않고


그렇게

시간 흘러

이젠

죽음의 기억을 뿌리에 두고

삶의 샬롬을 꽃으로 피우려는

걷기, 걷는 기도

나를 관조하는 의식


오늘도 걷는 중에

해가 졌다.

내가 이겼다.


다시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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