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밤 같은 세계에서 그대는 어디로 가는가?

-박노자의 『비굴의 시대:침몰하는 대한민국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by 푸른킴

나의 생활 준칙 1일 1편 논문 읽기

2025년 나는 생활 준칙을 몇 가지 특정했다. 일상적인 규칙은 그대로 두고, 매일 한 편 이상 ‘논문’ 읽기를 새로 정했다. 특정한 주제는 없다. 하나를 읽다가 이어지는 주제를 찾아 읽어나가는 줄기 뻗기 방식이다. 내 전공이 아닌 여러 분야 학자들의 주장을 들었다. 참 열심히 연구하는 모든 분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렇게 1월에 위당 정인보의 ‘조선학’과 ‘실학’ 관련 글들을 재밌게 읽은 것을 시작으로 8월 중순까지 이어왔다. 특히 1월에 내가 읽은 정인보에 관한 논문들은 흥미로웠다. 일제 강점기에도 불구하고 조선학을 창시하다시피 한 정인보가 정약용을 뒤따라 ‘실(實)로 독(獨)한다=의실구독(依實求獨)’이라는 실학의 정신을 재차 강조했다는 점이 새롭다. 그가 천착한 실학은 ‘내면의 채워짐(實)으로 주체적 독자성(獨)을 갖는다.’라고 이해할 수 있다.

또 다른 읽기는 ‘사회적(Social)’이라는 개념과 연관된 논문들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사회적’이라는 말에 꽤 관심이 많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이 말의 어원을 탐구해 왔다. 그 결과 몇 가지 사항들을 정리하기에 이르렀다. 잠정적이긴 하지만, 첫째, ‘사회’라는 용어의 핵심 개념이 ‘사화적, 관계적, 교제적(koinonia)’과 연동한다는 점이다. 둘째, 교회의 경우, 사회적 삼위일체(social trinitarianism)가 이런 의미를 담고 있는 듯하다. 생각해 보면, 오늘날 야훼(YHWH)의 코이노니아적 통치는 ‘사회’, ‘세계’라는 말과 분리될 수 없을 것이다. 셋째, ‘사회적’이란 말의 어원 속에 ‘인간다움’을 이해하려는 의지가 들어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교회’가 ‘사회적’이라면, 교회는 결코 ‘인간다움’을 잃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회(관계)적 삶의 성찰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사회적 인간, 교회’라는 말은 낯설다. 이 용어를 들으면 단번에 사회주의, 진보, 좌파와 같은 말과 동일시해 버린다. 일전에 ‘교회론’에 관한 논문을 발표 때에도 나는 ‘사회적 교회’라는 말을 강조했다. 그러나 객관적인 학술의 공론장에서도 쉽게 동의하긴 어렵다는 의견이 적지 않았다. 가장 큰 이유는 이 용어가 6.25 한국 전쟁을 겪은 우리 사회에서는 지극히 편향된 이념으로 이해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것이 오해라는 생각이 여전하다. 그래도 이런 주장을 귀담아들으면서, 교회가 ‘사회관계적 교회’ (Social-relational Ecclesia)를 추구해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이는 교회의 삶이 사회, 인간과 직결되어 인간다움을 적극 실현하자는 나의 의지가 담긴 용어이기 때문이다.


이 말을 내가 선호한 이유는 여러 가지이지만 계기가 있긴 하다. 한 때, 써놓고 발표하지 않은 또 다른 나의 논문(“한국 사회변동의 평가와 기독교 대응”)에서도 ‘사회적’이라는 개념을 어원부터 숙고해 본 일이 있다. 그 논문에서 나는 한국 국적의 철학자로 현재 오슬로 대학 한국학 교수로 일하는 박노자(朴露子, 1973~)의 ‘사회주의’ 개념을 비판적으로 활용했다. 그는 이 용어를 ‘인간의 회복’으로 결론 내린다. 나는 이 점에 동의했다.

비굴의 시대, 인간다움의 상실

박노자 교수는 지난 2014년 자신의 사회비평 모음집 『비굴의 시대:침몰하는 대한민국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한국 사회를 구체적으로 조명했다. 이 책 제4부에서 그는 대한민국 ‘사회’를 분석하고 그에 대한 대안을 모색한 결과를 적어두었다(여전히 그의 주장과 견해에는 호불호가 명확하다). 이 책에서 그는 한국 사회를 한마디로 “비굴의 시대”로 규정했다. 용어에서 느껴지듯이 이 시기 우리 사회는 사람들을 비굴한 태도로 살아내도록 강요하고 있다는 진단이다. 그는 한국 사회가 전 세계적으로 자행되는 자본과 무기 중심의 신자유주의 흐름을 뒤따르는 것도 주목했다. 나는 그의 주장에서 왜곡된 시대 편승에 온 힘을 다 쏟고 있다는 것도 이런 비굴한 사회가 되는데 무시할 수 없는 원인을 제공했다는 뉘앙스를 읽었다. 결과적으로 국가적 가치와 삶의 태도가 ‘비굴한 삶’이 되는 게 자연스러운 결과라는 데 딱히 반박할 수 없었다.


인간다움의 회복, 온전한 사회주의

그는 비판만 하지 않았다. 이념적으로 대안도 제시했다. 그의 주장은 ‘온전한 사회주의의 실현’이었다. 이 말속에는 사회주의적 삶이 ‘인간 본연의 삶’을 지향한다는 그의 일관된 관점이 잘 담겨 있다. 그는 진정한 사회주의야말로 ‘인간다움’을 회복하는데 주력한다고 본 것이다. 다시 말해, 사회주의적 삶은 ‘인간’의 '권리'가 비굴해지지 않고, 당당하고 정당하게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회복되길 기대하는 이념이라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몰이해만큼 비사회적 태도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주장하는 ‘사회적, 사회주의적’은 이념이 아니라 삶의 태도에 가깝다. 나는 그 말에 덧붙여, 인간 본연의 삶의 자리를 복구시키고 그 권리를 보전하는 ‘관계적, 코이노니아적’이라는 관점을 보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회적’이라는 개념이 관계적, 교제적이라는 의미를 부각해야 한다 나의 지론을 강조했다.


그렇다면 인간 이해의 관점에서 사회주의적 삶이란 무엇인가? 내가 생각하기에, 그의 주장을 정치하게 드러내면, 그것은 사회 관계성을 중시한 삶의 방식이었다. 가장 핵심은 소외와 절망 상황에서도 ‘작은 반란’을 일으키듯 서로 연대하자는 것이다. 개인의 처세술만 득세하는 삶의 태도를 전향하자는 것이다. 덧붙여 나는 그의 주장에서 다음 몇 가지 내용도 그 답이 되리라 생각한다. 첫째, 현실에 발을 딛고 이상을 추구하는 태도이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추구했던 것”같은 삶이다. 다시 말해, 경제, 공동체 내에서 타인의 자리를 스스로 열어두는 것이다. 예를 들어 물건의 공유 같은 것이다. 이는 “진보의 세계에서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자’라는 자기 인식”을 공고히 하는 것이다. “인류사가 경험해 온 불평등과 전쟁으로 유지되는 세계관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보려는” 세계관을 함양하는 것이다.

둘째, 노동의 가치를 인간됨의 추구로 이해한다. 즉, 노동을 “노동생산성의 여부”로 보지 않는다. “그 생산성을 담당하는 인간이 어떻게 사느냐”에 주목한다. 사회주의적 삶은 자본주의보다 부유한 삶을 우선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윤택하진 않다. 하지만 이런 사고는 마구잡이 개발이 아니라 한정된 지구의 자원을 어떻게 균등하게 배분하는 삶에 더 관심을 둔다, 또한, 더불어 사는 사람들 안에 민주주의적 태도와 배려, 기쁨을 추구하도록 돕는 것을 과제로 삼으려 한다. 그런 점에서 노동의 가치 역시 인간적이다. 사회관계적이다.

셋째, 전인적 삶을 추구한다. 자본주의가 추구하는 생산성 중심의 삶에서 여유와 여백을 공유하려 한다. 노동 자체보다 노동환경과 인간성 회복을 우선으로 한다. 삶의 한 부분만 기형적으로 성장하기보다 ‘전인적 삶’의 발전을 신중히 성찰한다.


인간다움의 실현, 개인과 공동체의 유기적 조화

그의 주장을 정리하면, 사회주의에는 ‘인간답게 산다.’라는 가치와 ‘사람됨’이라는 지향점이 명확하다.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창조적 노동이나 어떤 애타적 실천을 통해 진정한 자아를 실현하는 일과 직결된다. 다시 말해, 사회주의의 ‘사회적 이념’은 ‘애타적 실천’을 최종 목적지로 둔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인간의 권리와 행복을 위한 실존적 운동이라 할 수 있다. 사회연대적 삶이다.


“사회주의가 추구하는 가치는 온전한 '개인'의 확립이다.”라는 말이
이를 분명히 선언한다.


그는 덧붙인다. “'개인의 존립'은 공동체의 단위이자, 모든 애타적 실천의 출발이다. 저항과 혁명도 바로 이 견고한 '개인'으로부터 시작한다.” 이를 토대로 그는 말한다. “혁명이란 무엇인가? 나 개인이 고통을 생산하고 강요하는 체제에 맞서는 것도 벌써 혁명적 행위에 준한다. 남들을 자신만큼 챙기면서 사는 것도 이 각자도생의 시대에는 ‘작은 반란’이다. 그러한 작은 반란이 모여 결국 하나의 큰 불이 지펴질 것이다. 타인을 위한 자비란 혁명적 실천의 원천이다.”(373-75쪽, 발췌) 거듭 살펴보듯이 사회공존적 관점이다.


2025년 인간다움의 시험

최근 우리 사회는 느닷없이 ‘인간다움’에 대한 정치실험에 직면했었다. 당황할만한 초유의 상황을 경험했다. 추운 겨울을 광장에서 보내고 난 뒤에야 민주주의 시대에 ‘진정한 사회주의’, ‘사람됨을 추구하는 인간 지향적 세계이념’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사실, 자유와 평화를 울부짖는 이들이 가장 자유를 평화를 내팽개치는 일이 많을지 모른다는 정치적 속설은 어느 정도 타당할 것이다. 안으로는 ‘사람됨의 상실’을 가볍게 여기면서 겉으로는 자유민주를 외칠 때 더욱 그렇다. 자기 이익에 부합되는가를 삶의 기준으로 둔다면 더욱 그렇다. ‘인간’보다 이념을 앞에 두는 일도 마찬가지다.


그런 점에서 나는 온전한 사회주의 이념 역시 인간 존중, 인간 다움 실현에 실패한다면, 기꺼이 버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념보다 앞서는 것은 타인, 인간에 대한 '애타적 삶'을 실현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준수하지 않는다면 어떤 이념이라도 언제나, 스스로 거대한 장벽에 부딪힐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정치 세계도 어렵지만, 오늘날 종교도 제 길을 잃었다는 평가가 많다. 이유는 명확하다. 추론가능한 것은 ‘신-됨(God-ness)’에 매몰되어 ‘인간다움(humanitas)’을 상실했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 인간도 야훼가 될 수 없는데도 스스로 신의 자리에 오르려는 자가 많다. 타인을 배려하는 삶'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극단적인 '자기 사랑', 왜곡된 자기 신념으로 마치 신처럼 군림하는 자들이 득세한다. 시대가 변질한 것이 이유고, 동시에 모든 것을 정치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화란 ‘자기의 의도를 감추고 타인을 이용하려는 웃음에 절어있는' 위장된 모습이라 할 수 있다. 공공적이라는 좋은 뜻이 버려졌다. '정치화의 사람’이 우리 앞을 자유롭게 거닐고 있다. 그 일을 서로 묵인하고 내버려 두었다. 나의 이 사소한 방관으로 우리는 모든 면에서 스스로 왜곡된 삶에 빠져버렸다.


최근, 우리가 겪은 난리에 대해 박노자는 비인간적 정치 상황의 결과라고 진단했다(2025.1.8. 한겨레신문). 나는 이 주장, 즉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이 비인간적 정치 상황은 신자본주의 세계가 지배하는 한 언제든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경고로 읽었고, 이 일에 우리는 언제든 강하게 저항해야만 한다는 제안으로 이해했다


인간다움이라는 나아갈 길

그렇다면 살길은 무엇인가? 투쟁을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 국가와 법이라는 권력에 나의 자유를 얽어매는 것일까? 아니라면, ‘인간다움’을 위한 투쟁이어야 할까? 힘들긴 해도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 이제껏 나의 공부와 경험을 통해 고민한 결과는 후자를 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기독교가 깊이 성찰해야 할 점도 여기에 있다. 야훼의 통치를 확신하는 교회라면 이 투쟁의 시대에 온전한 사람됨과 자유로운 인간의 삶을 리바이어던에게, 무속에 내어주는 데 이바지해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우리가 이미 알 듯이, 사회관계적 삶이란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환대이며, 소득성장을 넘어 기본소득을 보장하는 제도이기도 하다. 자기에게만 유익한 숫자로 인간됨을 추구하는 것에서 과정 속에서 다른 이들과 공정한 경쟁을 통해 보조를 맞춰가는 삶을 생각할 수 있다. 열매에 앞서 과정을 존중받는 삶도 그렇다. 나는 ‘글쓰기를 공유’하는 것도 사회관계적 삶의 한 유형이라 생각한다.


하여 오늘도 나는 이 밤 같은 세계에서 우리는 인간다움이라는 등불을 들고 어디로 향해야 할 것인가?를 묻는다. 교회는, 사회는, 정치는 인간은, 그리고 나는 이 어둠 속에서 어떤 삶을 실천할 것인가?를 성찰한다. 모든 이념과 체제를 넘어서, 이런 질문만큼은 언제나 다시 물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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