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멀리 서 있는 내 사람,’ 가까이 오리라

김광석,「내 사람이여」

by 푸른킴

M. 존슨/조지 레이코프, 『삶으로서의 은유』(Metaphors We Live By,1980)를 읽으며 김광석의 「내 사람이여」를 읽는다.


차가 달리는 길 위에서 한 노래를 듣습니다. 마음이 자연스럽게 기울어지는 순간에는 억지로 몸을 곧추세울 필요가 없습니다. 모른 척 기울어지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릅니다. 노래를 다시 또 다시 듣는 이유는 마지막 가사 때문입니다. 그 마지막 가사는 지극한 은유(metaphor)입니다. 노래 속 은유는 의미를 무한히 파생시킵니다. 나는 그 의미를 찾아 노래를 반복해서 듣습니다.


1984년, 포크 가수 이동원이 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앞서 음유시인 백창우가 시를 쓰고 곡을 붙였습니다. 이 노래가 세상에 조금 알려진 것은 음유가객 김광석이 부른 이후였습니다. 그러다 노래가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것은 2011년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YB(윤도현밴드)의 윤도현이 한번 더 부른 덕분이었습니다. 윤도현은 세월호 아픔과 관련하여 2014년과 2017년에 이 노래를 두 번 더 열창했습니다.


이 노래는 그렇게 흐릿하게 태어나 알게 모르게 불리다가, 마침내 애창하는 곡으로 성장했습니다. 가수가 묻혀있던 노래를 선곡하는 힘은 노래가 생을 이어가는 든든한 토대가 되지만, 나는 이 노래가 생명을 이어가는 데에는 또 다른 힘, 바로 부르는 이의 해석이 들어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노래는 부르는 이의 해석이 짙게 배어있을 때 생명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 최근까지 이 노래는 이동원, 김광석, 유익종, 윤도현, 권진원 등 여러 가수가 자기 색깔을 담아 불렀습니다. 그들의 가창은 곧 그의 고백처럼 들렸습니다. 그 해석은 노래의 핏줄이었습니다. 어떤 이는 음유하듯, 다른 이는 가사의 감성을 뽑아내듯, 애절하게, 슬프게, 또는 위로하듯 불렀습니다.


나는 그중 김광석의 버전에 가장 마음이 끌립니다. 바로 마지막 가사를 부르는 그의 창법 때문입니다. 요즘 듣는 그의 다른 노래에서는 괜한 쓸쓸함이 더 짙게 배어나오는 데, 이 노래만큼은 생존 의지가 뿜어 나오는 느낌입니다. 이 부분을 듣고 있으면, 그의 마지막 삶이 조금 아쉽습니다. 이 노래처럼 그가 옹골차게 삶을 관조했다면 다른 노래들과 또 그의 삶도 산드러졌을 것 같습니다. 그의 노래는 누구에게나 있을, 삶의 밑바닥까지 가라앉는 감정을 잘 보여주기 때문에 더욱 특별하게 다가옵니다.


그러나 내가 유독 그가 부른 버전에 기울어진 이유는 하나 더 있습니다. 그가 이 노래에 담긴 여러 은유를 자기 방식으로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기교, 창법, 감성 표현이 아니라 해석입니다. 그가 이 노래를 부를 때 가사 하나하나를 입으로 짚어가듯 읊습니다. 은유를 차근차근 풀어내면서 가사의 단단함을 더 다집니다. 특히 ‘그럴 수 있다면’ 부분에서 감정이 치고 올라가 ‘내 사람이여’를 외칠 때 ‘~여’에 힘을 주고 ‘너무 멀리 서 있는에서’ 힘을 뺍니다. 그리고 곡의 중간에서 ‘내 삶의 자리를 지키고 싶네’를 이미 결단합니다.

그렇게 그는 노래를 고성으로 치닫게 하여 감정의 극대화로 끝내는 방식을 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앞의 가사들을 꾹 누르듯이 부름으로써 그 가사들이 마지막 가사에 다다르기 위한 여정이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마치 산을 오르는 것 같습니다. 간절한 호소로 가득한 앞의 가사들을 그대로 짊어진 채 마지막 봉우리를 오릅니다. 들을수록 그는 이 노래를 감정만으로 나열하지 않고, 살아있는 이야기처럼 재탄생시켰습니다.


나는 그가 선택한 리듬과 가사 표현하기, 덧붙여진 악기와 목소리가 이 해석에 잘 조화되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의 노래는 그 자체로 ‘시(詩)’가 되고 성찬이 되는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예상을 깨고 이 감성적 노래를 ‘이성적’으로 부릅니다. 그래서 그의 해석은 들을수록 마음을 파고들다, 머리를 깨웁니다. 그는 처음부터 감성 너머 이성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이성적 해석이 곧 나의 감성에 닿고 있다는 것을 직감합니다.



무엇보다 그는 예상을 깨고 이 감성적 노래를 ‘이성적’으로 부릅니다.
지극히 이성적인 읊조림이 나에게는 완벽한 감성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김광석의 노래는 결국 부르는 사람의 고유한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그에 의해 이 노래는 마지막 가사에 이르는 과정과 마지막 구절이 한 사람의 사건처럼 들려졌습니다. 다른 노래들과 결이 달라졌습니다. ‘가수가 다르니 당연히 노래 느낌이 다르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의 지극히 이성적인 읊조림이 나에게는 완벽한 감성이었다는 것입니다. 내 몸이 기울어진 것은 잘못이 없습니다.


그의 해석으로 이 노래의 ‘너무 멀리 서 있는 내 사람이여’라는 가사는 이 노래의 결론처럼 들립니다. 먼저 그는 '너무 멀리'를 완전한 절망으로 불러냅니다. 이 노래가 처음부터 '내 사람'을 그리워했기 때문입니다. 노래 속 화자는 그에게 모든 것을 베풀어 가까이 다가가려는 의지를 보이지만, 그러기에는 '내 사람'이 '너무 멀리' 있습니다. 삶의 전부를 쏟아부어 가까이 가려 할수록, 그는 더 '멀리' 가버렸습니다. 그래서 ‘멀리 있는’이라는 말은 완전한 절망입니다. 그리워할수록 역설적으로 만날 수 없다는 운명의 반전입니다. 이 노래는 완전한 사랑을 보여주고 싶었지만, 결국 애틋한 독백으로 끝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노래는 '절망가'입니다. 당연히 옆에 있다고 여겼고, 온갖 열정으로 삶을 다 쏟아부었다고 여겼던 그 사람이 '너무 멀리' 있습니다. 그러니 완전한 절망입니다. 이 노래를 슬픔으로 해석하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애써도 가까이 갈 수 없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지독한 슬픔입니다. 하지만 김광석의 열창은 이 노래를 기막힌 반전으로 해석하게 합니다. 이 노래의 끝부분에서 절망을 짊어진 채로 한 사람이 '그 사람'에게로 걸어가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그는 절망의 언어인 ‘멀리’를 절망처럼 부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절망 너머에 시선을 두고 소리를 삭힙니다. 그는 '너무 멀리 서 있는 내 사람'에게 절망을 끌어안은 채로 꿋꿋한 발걸음으로 다가갑니다. 이 가수의 해석은 절망을 허구 가득한 소망의 언어로 희석시켜버리지 않습니다. 절망 그 자체를 끌어안고 어둠 속으로 걸어들어갑니다.


이렇게 나는 그의 해석을 다시 해석합니다. 이 해석을 음미하며 이 노래를 다시 듣습니다. 그리고 이 애원의 가수가 이 노래 속 은유를 내 삶으로 끌어내려 손에 잡히게 해준 것에 감사합니다. 그의 노래 해석에 귀를 기울이고 나의 해석을 그에게 되돌려줍니다. 전적인 헌신이 결국 절망으로 비껴가는 일은 정말 흔합니다. 그것은 어쩌면 나 스스르 빚어낸 슬픈 결과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 노래를 들으며 그 절망을 다시 성찰합니다. 절망을 안은 채라도 '멀리 서 있는 내 사람'에게 꿋꿋이 다가가는 용기를 다집니다.


이 시대, 나-너-우리 모두 ‘멀리 서 있는 내 사람'으로 결국 절망가를 부를 수밖에 없는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하지만, 그 절망가가 끝내 절망가로 끝나지는 않을 것을 나는 믿습니다. 절망할 때라 해도, 그 절망 너머를 그려볼 힘이 노래 속에 있다는 것을 나는 압니다. 삶의 모든 것이 은유라는 말은 언제나 해석을 허락한다는 것을 나는 내 몸으로 체험합니다.


노래가 끝났습니다. 나는 옛 히브리인들이 노래한 시편(cf. 139편)을 다시 읽습니다. ’멀리 계신‘ 야훼가 있습니다.


오, 여호와여, 주님이 나를 살펴보고 알아주셨습니다.
주님이 친히 내가 눕는 것과 일어나는 것을 아십니다.
내 생각을 멀리서부터 알아차리십니다.
내가 다니는 것과 눕는 것을 주님이 저울질해 보시고,
내 모든 길을 속속들이 아십니다.

이 옛 시인의 노래와 오늘 나의 가수의 해석에 힘입어, 나는 비틀거리면서도 '멀리 있는 이 시대의 사람'에게로 가까이 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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