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나이에 관한 대화
얼마 전 ‘나이’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한 분이 쉰을 앞두고 몸의 변화를 처음 실감한다고 했다. 나는 말했다. “시간은 숫자가 아니라 변화의 양인 것 같습니다. 쉰은 새로운 변화를 감지할 수 있는 나이이자, 또 다른 탄생이 아닐까요?” 삶은 이미 수많은 변화를 겪지만, 절정의 시기에는 잘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몸이 작은 변화를 알려줄 때, 우리는 비로소 시간과 마주한다. 나는 이 경험을 바탕으로 ‘시간광야’라는 개념을 말하고 싶다.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몸과 관계 속에서 맴돈다. 따라서 살아간다는 것은 곧 시간광야를 지나가는 일이다. 문제는 이 광야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즐길 것인가이다. 시간광야의 개념 보통 시간광야를 “고난과 시련의 시간”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두 가지를 이해한다. 첫째, 사람들은 시간을 흘러가 버리는 것, 곧 부정적으로만 이해한다. 둘째, 시간과 광야는 원래 잘 어울린다. 고대 히브리 지혜서 코헬렛에서 ‘영원’은 무한한 시간과 공간을 동시에 가리킨다. 그렇다면 시간은 직선처럼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특정 공간에서 맴도는 것일 수 있다. 나는 이것을 ‘시간광야’라 부른다. 이는 가둬진 호수의 물이 사라지지 않고 생명을 키우듯, 우리의 삶 전체를 감싸는 시간의 장(場)이다. 중요한 것은, 이 공간 안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이다. 시간은 변화의 양이며, 삶은 곧 그 변화를 향유하는 여정이다. 시간광야의 특징 시간광야는 인간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장(場)이다.
그 특징은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궁궐이나 오두막, 첨단 과학 문명이나 가난한 일상에서도 시간의 양은 같다. 누구도 시간의 광야에서 특권을 누릴 수 없다. 부와 권력으로 공간의 조건은 달리할 수 있어도, 시간광야에서의 삶은 모두에게 동일한 시험이 된다.
둘째, 시간은 흐름이 아니라 변화의 양이다. 시간은 직선적 강물처럼 흐르지 않는다. 우리의 몸과 관계 속에서 맴돌며 변화한다. 작은 주름, 흐려지는 기억, 새로운 만남과 이별은 모두 시간광야의 흔적이다. 따라서 시간은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변화의 질적인 총합이다.
셋째, 시간은 기억과 관계 속에서만 드러난다. 과학이 말하듯 절대적 방향을 갖지 않는다. 과거·현재·미래라는 구분은 인간의 인식이 만들어낸 틀일 뿐이다. 실제로는 각 사건이 우리 안에서 지평선을 만들며, 관계와 기억 속에서만 의미가 있다.
이 점에서 시간광야는 개인적 경험과 공동체적 관계가 뒤얽힌 장이다. 한편, 시간광야에서 경계는 보이지 않는 죽음의 강과 같다, 공간광야는 지리적 한계가 뚜렷하다. 반면에 시간광야의 경계는 오직 죽음이다. 태어난 순간부터 우리는 이 광야 안에 있으며, 죽음이라는 문턱을 넘어설 때 비로소 경계를 벗어난다.
시간광야는 인간 존재의 유한성을 드러내는 한계상황의 무대다. 나아가 시간광야는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삶의 공간이다. 만약, 이 터전이 단순히 고통의 연속이라면 삶은 끝없는 절망일 것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이 물음은 다양하게 변화하며 의미 있는 답을 찾으려 했다. 어떻게 이 광야를 즐겁게 걸어갈 수 있을까? 나는 그 답을 신앙, 철학, 과학, 문학에서 찾아봤다.
신앙의 관점: 다윗의 노래
시편 63편은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란을 피해 광야로 달아나던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 성은 불타고, 칼을 든 자들이 등 뒤를 쫓아오는 긴박한 순간이었다. 한때 왕좌에 앉아 노래하던 그는, 이제 맨발로 모래 위를 달리며 목숨을 부지해야 했다.
그러나 바로 그 광야에서 다윗은 노래한다.
“내가 사는 동안 주님을 찬양하겠습니다. 내가 잠자리에서 주님을 기억하며 밤마다 깊이 생각하겠습니다.”
그에게 광야는 벗어나야 할 저주의 공간이 아니라, 온몸으로 부딪치며 살아내야 할 삶의 자리였다.
요컨대, 시 63편에서 다윗은 도망의 두려움 속에서도 회피 대신 노래로 응답했다. 찬양은 그의 시간광야를 즐기는 믿음의 실천이자, 절망을 넘어서는 힘이었다. 회피가 아니라 찬양으로, 절망이 아니라 관조와 기도로 시간을 힘써 채워나갔다. 이처럼 시간광야를 벗어나는 길은 도피가 아니라, 그 속에서 의미를 만들어내는 행위였다. 다윗에게 노래는 시간광야를 즐기는 믿음의 실천이었다. 그렇다면 인간의 지혜와 사유는 이 질문에 어떻게 답했는가?
철학의 관점: 시간광야와 인간의 한계
철학은 광야를 인간 실존의 은유로 이해해 왔다. 광야는 인간이 맞닥뜨리는 극한의 상황을 상징한다. 철학에서 시간광야는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유한성의 또 다른 이름이다. 히브리 철학자 코헬렛은 헤벨을 반복해서 말한다.
그런데 이 헤벨은 단순히 ‘헛되다.’에 그치지 않는다. 인간이 시간과 인생을 통제하려는 모든 시도는 허무에 부딪히지만, 삶의 즐거움을 추구하려는 동력이다. 코헬렛이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 중에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나니, 이것도 하나님의 손에서 나는 것이니라”(전 2:24)라고 말한 것이 이를 방증한다. 코헬렛에게 먹고 마시는 즐거움은 단순한 본능적 향락이 아니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 즉 시간광야 속에서도 허락된 은총의 징표다.
스토아 철학자들도 시간의 운명을 바꿀 수 없음을 받아들이면서도 평정(아타락시아)을 추구했다. 즉 걱정과 근심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정신적 평정심, 즉 평온하고 동요 없는 상태를 희구했다. 나아가 에피쿠로스는 순간의 기쁨을, 장자는 도와 무위를 통해 시간의 강제를 흘려보내는 자유를 강조했다. 그러나 코헬렛의 통찰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인간의 기쁨은 자기 안에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받아들이는 데서 온다는 것이다.
요컨대, 철학적 전통은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시간광야를 벗어날 수 없지만, 그 안에서 지혜와 선물로서의 즐거움을 발견할 수 있다. 오두막에서도 평화가 있다면 그곳은 오히려 안식의 광야다. 철학은 인간 실존의 입장에서 시간광야를 바라본다. 한계상황을 직시하면서도, 그 안에서 어떻게 행복을 모색할 수 있는가를 묻는다. 광야는 절망의 자리이지만 동시에 지혜와 성찰의 학교다. 즉, 철학은 “인간은 광야 속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제 과학의 관점은 시간광야 이해에 대해 질적 변화를 끌어낸다.
과학의 관점: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물리학은 시간광야를 맴도는 관점으로 이해한다. 카를로 로벨리는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에서 시간을 직선적 진행으로 이해하는 우리의 습관을 근본적으로 흔든다. 그에 따르면 시간은 만물에 동일하게 적용되는 객관적 흐름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현상이다. 높은 산 위와 깊은 바닷속의 시간이 다르게 흐르고, 즐거움 속에서는 시간이 빠르게 느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렇게 시간은 흘러가는 어느 강물이 아니라, 각 사건 속에서만 의미가 있는 ‘관계적 장(場)’이다.
더 놀라운 것은, 시간에는 절대적 방향이 없다는 주장이다. 우리가 ‘과거-현재-미래’라 부르는 선형적 구분은 인간 의식의 산물일 뿐이다. 실제로는 오직 “나에게 주어진 현재”만이 존재한다. 같은 상황을 경험해도 사람마다 기억하는 현재는 다르다. 시간은 관계와 기억, 감각 속에서만 살아난다.
이런 이해는 시간광야를 살아가는 새로운 방식을 제시한다. 사건마다 지평선을 세우고, 매듭을 맺는 것이다. 마감은 마감으로, 시작은 시작으로 구분 지어 과거가 현재를 침범하지 않도록 한다. 그렇게 하면 삶은 끊임없이 새로워진다. 시간은 나와 세계가 맺는 관계의 연결망이다. 맴도는 점과 점들의 연대이다.
이처럼 과학은 시간의 본질에서 시간광야를 설명한다. 시간은 보편적 흐름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맴도는 현상이며, 사건마다 새로운 매듭을 만들어낸다. 이것은 인간의 주관적 경험으로 파악해야 할 것이 아니다. 물리적 세계 자체가 시간의 비선형성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과학적 관점은 이렇게 말한다. 시간광야는 흘러가 사라지는 물의 시계가 아니다. 나와 타인, 사물과 사건이 얽혀 만들어내는 매듭의 관계다. 그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환대하며, 함께 즐겁게 살아갈 수 있다. 과학 역시 철학처럼 “그 시간광야 자체가 무엇인가”에 적절한 답을 제시한다. 두 관점은 서로 다른 길을 걷는 듯하지만, 결국 한 지점에서 만난다. 시간광야는 극복할 대상이 아니라, 이해하고 즐길 수 있는 ‘주어진 선물’이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은 문학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문학의 관점: 시간 고정 놀이 문학은
시간광야를 ‘시간의 고정’이라는 주제로 즐기는 방법을 보여준다. 윤석중의 동시 〈넉 점 반〉은 그 대표적 예다. 이영경의 그림책으로 되살아난 이 동시는 시간에 대한 의미 있는 문학적 해석을 보여준다.
심부름 가던 아이가 이웃집 할아버지에게서 들은 “넉 점 반”이라는 말을 붙잡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꽃과 닭, 해 질 무렵의 풍경 속에서 시간을 잊고 논다. 그러나 집에 도착했을 때 아이의 입에서 여전히 흘러나온 대답은 “넉 점 반”이다. 이 동시는 시간광야 속에서 한순간을 붙잡아 삶 전체의 축으로 삼는 법을 일깨운다. 아이에게 넉 점 반은 단순한 시각이 아니라, 하루 전체를 지배하는 놀이의 중심이 되었다. 그 순간이 하루를 새롭게 엮어낸 것이다.
문학은 이처럼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여울목 같은 지점을 세운다. 그것은 때로는 놀이, 때로는 서정적 체험, 때로는 고통의 기억으로 우리 삶에 매듭을 남긴다. 문학 작품 속에 등장하는 한 구절, 한 장면은 독자의 기억 속에 방점을 찍으며 삶을 새롭게 해석하게 한다.
더 나아가 문학은 시간을 공유한다. 나의 넉 점 반이 타인의 넉 점 반과 이어질 때, 우리는 서로의 시간광야를 나눌 수 있다. 독자가 작품 속에서 자신의 경험과 겹쳐 읽을 때, 개인의 시간이 공동의 기억으로 확장된다.
따라서 문학은 시간광야를 벗어나게 해 주지는 비법보다 그 안에서 의미를 찾고 즐기는 놀이 공간을 마련하는데 천착한다. 한 편의 시가, 한 권의 동화가, 한 줄의 소설 문장이 우리에게 시간을 붙잡아 기억하게 하고, 그 기억이 새로운 의미를 낳게 한다. 시간광야의 시간 고정 놀이는 문학이 주는 선물이다.
시간광야를 누리는 실천: 글쓰기
나는 글쓰기를 시간광야에서 살아가는 가장 구체적이고 즐거운 실천으로 본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흘러가는 듯 보이지만, 글쓰기를 통해 우리는 그 흐름에 작은 쉼표를 찍는다. 글쓰기는 변화를 기록하고, 지나간 시간을 기억 속에 매듭지어 남긴다.
첫째, 글쓰기는 무엇보다 관찰 행위의 결과다. 하루 동안 몸과 마음에 일어난 작은 변화들을 언어로 붙잡는 순간, 우리는 시간의 미세한 흔적을 자각하게 된다. 나이가 들어가는 것, 관계 속에서의 기쁨과 상처, 삶의 고단함과 충만함이 모두 기록된다. 이때 시간은 단순한 소모가 아니라 의미를 품은 변화의 양으로 드러난다.
둘째, 글쓰기는 여백을 창조하는 행위다. 우리의 일상은 빽빽하게 차 있고, 시간광야는 끝없이 이어지는 사막 같다. 그러나 시 한 줄, 에세이 한 문단은 그 사막 위에 그늘을 드리우는 오아시스가 된다. 시는 함축된 언어로, 철학적 에세이는 개념을 통해 삶에 틈새를 낸다. 그 여백 속에서 우리는 숨을 고르고, 광야에서 잠시 머무를 쉼터를 얻게 된다.
셋째, 글쓰기는 관계를 직조한다. 글은 혼자의 기록으로 끝나지 않는다. 쓰인 글이 공유될 때, 나의 시간광야는 타인의 시간광야와 만나 새로운 의미망을 형성한다. 서로의 기록이 얽히며, 광야는 더는 고립된 개인의 시공간이 아니라 공동의 광장으로 변한다. 여기에 문학적 상상력이 더해지면, 글쓰기는 나와 너, 그리고 세계를 다시 짜는 도구가 된다.
마지막으로, 글쓰기는 영성의 실천이다. 때로는 기도로, 때로는 묵상으로, 때로는 고백으로 자신을 드러난다. 우리는 글을 쓰면서 단순히 자기 경험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자의 선물로 주어진 시간을 고정하고, 그것에 온종일 응답하는 것이다. 이런 과정은 먼지가 쌓이듯 기록된 문장들이 모이는 글의 저장고를 만들어낸다. 또한, 어느 날 삶의 기둥이 되고, 다시 읽을 때 웃음과 눈물이 번갈아 솟아나게 한다.
결국, 글쓰기는 시간광야를 벗어나게 하는 도구가 아니라 그 안에서 새로운 의미와 기쁨을 발견하도록 돕는 동반자다. 나는 종종 오래전 쓴 글을 다시 읽다가, 그때는 알아채지 못한 작은 변화와 하나님의 흔적을 발견한다. 그것은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이어주는 다리이며, 광야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게 해주는 빛이었다.
정리하면, 시간광야는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삶의 무대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고통의 공간이 아니라, 변화를 관찰하고 매듭지으며 즐길 수 있는 자리다. 다윗은 노래로, 철학은 지혜로, 과학은 관계의 법칙으로, 문학은 놀이로, 그리고 글쓰기는 여백의 창조로 이 광야를 건너왔다. 글쓰기로 시간광야를 즐기는 삶은, 여전히 사막 같지만, 그 위에 노래와 글, 지혜와 놀이로 작은 오아시스를 세워가는 지혜이다.
당신의 글쓰기는 당신이 시간광야에서 어떻게 즐겁게 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생의 역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