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도 ‘레 미제라블인가?”
거대한 공간에 잠기다.
어느새 가을이 왔다. 아주 오랜만에 차분히 예전에 본 영화 한 편을 반복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마음에 드는 영상을 즐기는 시간도 좋을 것 같다. 내가 선택한 영화는 ‘레 미제라블’이다(감독 톰 후퍼, 주연 휴 잭맨, 앤 해서웨이, 러셀 크로우, 2012).
영화로 개봉되기 전, 1985년 <뮤지컬 레 미제라블>로 개봉되었다. 원작 소설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이 유명하다. 이렇게 거대한 작품 역사를 생각한다면, 영화의 매력은 다소 작아 보인다. 하지만, 장르의 변화는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신호탄이라 할 수 있다. 이 점을 인정한다면, 영화 역시 뮤지컬이나 소설이 담아내지 못한 장르의 독특한 미학을 드러낼 수 있다.
영화는 다른 장르처럼 스스로 자신의 길을 간다. 원작이 무엇이든 영화감독은 자신이 선택하고 정리한 프레임을 따라 거대한 서사 궤적을 그려나간다. 마치 흘러가는 강물 같다. 특히, 뮤지컬과 달리, 영화는 편집 기술을 구사하며 파편 같은 장면 하나하나를 때로는 이질적으로, 때로는 동질 하게 배열해 나간다. 이 방법으로 뮤지컬의 티석티석 한, 거칠고 울퉁불퉁한 표면을 정교하게 다듬을 수 있다. 마침내 관객이 거의 눈치챌 수 없을 만큼 자연스러운 흐름이 구현된다.
뮤지컬의 직설, 영화의 리듬
뮤지컬 레 미제라블이 ‘노래’를 근간으로 한 일회적 현장성을 특징으로 하는 것처럼, 이 영화도 그 방식을 그대로 따른다. 그런데 영화는 뮤지컬에서 미처 드러내지 못한 장면들을 여러모로 풀어놓았다.
실제로 영화라는 장르는 배우들의 적절한 대사와 가공되거나 실제적인 공간적 배경, 시간을 달리하여 촬영한 단편적인 장면 하나하나를 적절한 편집적 연결을 근간으로 하여 구성된다. 이 영화는 이런 특징에 새로운 요소를 추가했다. 바로 대사를 노래로 치환한 점이다. 즉, 감정의 변화를 리듬에 실은 것이다. 현장에서 실시간으로 녹음된 노래이든 스튜디오에서 더빙한 녹음이든 뮤지컬 무대 현장에서 바로 듣고 끝나버릴 노래가 영화에서는 다양한 형태도 재생되었다.
하지만, 이런 장치는 여러 가지 극적 효과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전해 줄 메시지 전달에 있어서 일종의 모험일 수도 있다. 인도 영화나 몇몇 할리우드 영화에서 음악과 춤이 압도적이라 해도 대사와 상황을 보조하는 미장센으로 활용하는 것에 그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레 미제라블의 특장은 기존 음악 영화와는 차별점을 잘 보여준다. 즉, 영화의 메시지를 단지 노래한 것이 아니라 그 노래를 통해 상징과 연상법을 극대화했다는 점이다. 이로써 감독은 관객에게 질문한다. 노래가 이끄는 서사의 상징과 연상법을 얼마나 잘 해석해 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영화의 다양한 대척점들
감독의 질문을 반영하듯 영화 레 미제라블은 다양한 대척점들을 질서 있게 배치한다. 가장 먼저 첫 장면과 끝 장면이다. 여기서 카메라는 닫힌 바다에서 열린 광장으로 이동한다. 난파선 잔해를 끌어올리는 죄수들의 구호는 파놉티콘의 어둠을 환기하고, 바리케이드의 붉은 깃발은 집단이 시간을 획득하는 의식을 선언한다. 둘 사이를 잇는 것은 대사가 아니다. 노래, 특히 리듬이다. 영화는 전체적으로 이 리듬을 통해 법/자비, 사랑/혁명, 민중/권력의 대립 선을 가시화하고, 무채의 어둠에서 유채의 빛으로 스펙트럼을 확장한다.
결국, 자유는 장소의 탈환이 아니라 ‘내일’, 평안을 보장하는 시간의 약속임을 선언한다. 그리고 그 약속은 포용하는 사랑의 결단 위에서만 가능함을 주장한다. 이처럼 이 영화 속의 대립은 다양한 경계선을 유지하면서 정교하게 묘사된다. 그 대립은, 예를 들어, 법/자비, 사랑/혁명, 민중/권력 등이다.
이런 점에서 이 영화의 전개 구도는 뚜렷해진다. 대립과 저항이라는 대척점이다. 이것들이 경계를 이루며 서사를 끝까지 가로지른다. 거대한 사회체계는 물론이고 개인의 내면에도 자리한다. 영화의 러닝 타임이 흐를수록 마침내 민중과 국가와 가치체계 안에서도 부각한다. 이를 좀 더 부연해 보자.
첫째, 주요 인물 사이에 경계선이 명확하다. 인물들의 양쪽 대척점에는 두 가지 다른 존재 양상이 자리한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간수와 죄수’이다. 간수의 대표자인 자베르 형사는 ‘법 존재 이유의 대리자’이고, 죄수의 대표자인 장발장은 ‘법 존재 이유의 희생자’이다.
둘째, 시간이 지나면서 이 대척점은 더 본질적인 영역으로 이행된다. 그것은 개인의 내면을 정조준한다. 가장 먼저 도망자인 장발장 안에 흐르는 가치 혼란이다. ‘선과 악’의 영역을 오가며 양심의 혼선을 일으키는 경계선이다. 그뿐만 아니다. 그것은 판틴의 상황에도 직결된다. (아마도 앙팡(enfant) 또는 환상(fantine)에서 유래했을) 이 이름이 암시하듯 그녀는 사회적 낮은 신분에서도 윤리 가치를 초월한 생존과 죽음이라는 경계선에 당당하게 자리한다. 그녀의 분투로 장발장은 코제트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생존을 고수한다.
셋째, 가장 거대한 대척점의 경계선에는 민중과 국가권력이 대립한다. 이 경계선의 가시적 상징이 바리케이드다. 그런데 이 두 영역은 엄밀히 보면 같은 색상의 대비로 드러난다. 영화 전반부가 검은색을 통한 어둠이 주를 이룬다면, 후반으로 갈수록 색은 두 가지로 확장된다. 즉, 민중들의 손에 들린 붉은색과 검은색이다. 하지만, 국가권력도 동일하게 적과 흑을 전면에 내세운다. 영화는 이들이 공유한 두 색이 결과적으로 이질적인 의미를 담지한다는 것을 웅변한다. 일반적으로 이해하듯이, 민중의 붉은색은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이지만, 국가권력의 붉은색은 어둠으로 내모는 억압의 기제다. 또한, 민중의 검은색은 그들이 처한 파리의 하수구 같은 어둠과 억압의 세계를 함의한다. 반면, 국가의 검은색은 그들의 지배할 힘을 교묘하게 감출 수 있는 영역이 된다. 따라서 민중의 검은색과 붉은색은 고통의 터널에서도 태양을 향한 자유의 열정을 고수한다면, 국가의 적흑은 교묘히 감춰진 억압의 권력이라 할 수 있다.
넷째, 영화의 후반부로 갈수록 장발장과 자베르, 그리고 코제트라는 세 개의 대척점으로 재편된다. 거의 결말에 이르러서는 또 다른 대척점도 제시한다. 추적자 자베르 형사, 그는 ‘법과 무법’ 사이의 신념을 고수한다. 새로운 인물 혁명운동가 마리우스, 그는 ‘사랑과 혁명’의 갈등, 사랑의 화신 에포닌, 그녀는 ‘사랑과 포기’ 사이에서 자기희생의 역설을 드러내며 영화가 대미로 가는 교두보를 장식한다.
다섯째, 나는 이 영화의 색채도 중요한 대척점을 이룬다고 생각한다. 바로 흑백처럼 이어지는 전반부와 색깔로 전개되는 후반부다. 색 없음과 색 있음, 곧 무채에서 유채로 전이는 선을 지배하는 강력한 어둠에도 불구하고, 선은 살아있다는 확신을 시각적으로 명시해 주었다. 다시 말해, 악이 지배하는 억압, 밤 같은 세계에도 빛의 균열은 있으며, 그 틈으로 오색찬란한 자유가 천천히 스며든다는 것이다. 어둠은 지배하지만 빛을 사라지게 하지 못한다. 균열로 틈입하는 빛이 곧 ‘내일’이라는 시간으로 확장되기 때문이다.
끝으로, 이 모든 대척점은 하나의 질문 속에 수렴한다. 그것은 노래 속에서 간간이 흘러나오는 작은 대사 속에 박혀 있다. 여울목 같은 이 질문은 바로 ‘나는 누구인가?’, ‘너희는 누구인가?’라 할 수 있다. 나는 누구인지를 묻는 것과 너희는 누구인지에 대한 답변은 그들의 운명과 삶의 공간을 결정짓는다. 나는 누구인가? 는 장발장을 끊임없이 따라다닌 질문이다. 그가 판틴을 만나기 전에는 결코 해결할 수 없었던 물음이다. 그는 비참한 자들의 생존을 위한 분투를 대변하는 존재다. 한편, 진압군 지휘관이 젊은 혁명군에게 묻는다. ‘너희는 누구인가?’ 그러나 이 질문은 신호탄이었다. 그가 이것을 물었을 때 그들은 ‘우리는 혁명군이다.’라 답한다. 곧 사격이 발사되었다. 그들은 국가의 총을 받아내야 할 존재들이라고 스스로 명명한 셈이다.
사랑의 두 얼굴:포용하는 사랑과 배척하는 사랑
영화 전반에서 대척점의 경계선을 걷는 모든 이들은 불안하다. 장발장이 그런 것처럼 자베르 경감도 이 불안을 피할 수 없다. 그가 도시의 성벽 위 가장자리를 걸을 때처럼 그의 모든 삶 역시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이 영화에서 모든 대사를 리듬에 실어 들려준다는 전달방식이 이러한 불안한 경계선에 대한 하나의 해결책을 제시하는데 효과적인 전략이라 생각한다.
무엇보다 ‘사랑’이라는 주제를 표현하는 데 있어서 가장 적절하다. 사랑하는 존재는 언제나 불안한 상황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자기희생이 필연적이다. 에포닌의 <On My Own〉은(프랑스 초판 선율 전용에 대한 논의가 있다) 빗속에서 부르는 노래다. 마음속 연인 마리우스에게 코제트가 이미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안 이후에 자기 마음을 애틋하게 표현하는 명곡이다. “가까이 있어도 그저 스쳐 가는구나 / 그대여, 왜 나는 혼자서 이런 노래를 부르고 있나”라는 가사는 몇 번 들어도 가슴이 아려온다. 이처럼 이 영화가 리듬, 노래를 토대로 인물의 내면을 표현하는 것은 산문 형식의 대사에 감정을 실어 전달해 주는 것보다 훨씬 더 큰 호소력과 울림을 끌어낸다. ‘리듬, 음악적 운율’이란 그 자체로 감성을 내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제, 그 리듬을 따라 영화 속 마지막 숨은 대척점이 등장인물 사이를 흐르고 있다. 바로 사랑이다. 신부와 장발장, 장발장과 판틴, 판틴과 코제트, 코제트와 마리우스, 에포닌과 마리우스, 장발장과 자베르, 그들 사이에 ‘포용하는 사랑’과 ‘배척하는 사랑’이 서로 다르게 흐른다. ‘포용하는 사랑’은 상대방에게 나를 맡기는 것이지만, ‘배척하는 사랑’은 나에게 나를 맡기는 것이다.
사실, 인류 역사가 흘러오는 동안, 수많은 문학 속에서 ‘사랑’은 지고한 삶의 가치로 다뤄졌다. 하지만, 실제로 그것은 삶의 바닥으로 내려갈수록 어떤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며 무기력하게 끝날 때도 있었다. 사랑은 지극한 감성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은 경계선에 선 모든 사람을 위한 해결책이면서도, 삶의 자리를 더욱 위기로 몰아갈 수 있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는 이중성에 비판이 뒤따른다.
그리하여 혁명과 사랑의 가치는 배치될 때가 많았다. 사랑하지만, 혁명 앞에서 필연적으로 이별을 고해야 할 때가 있다. 용서할 수 없을 때, 사랑이라는 이유로 갈등해야 할 때도 있다. 혁명과 사랑이 분리될 수 없을 것 같다는 가치의 혼란도 피할 수 없다. 그뿐만 아니다. 역설적이게도 ‘사랑’은 어떤 경우에 극단적 가치를 합리화하기도 한다.
이렇게 ‘사랑’은 언제나 자기 방어의 기제임과 동시에 상대를 공격하는 이율배반적 무기이기도 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이 이중적 가치로서 사랑이 ‘노래’라는 방식으로 온몸을 자극한다. 감독이 의도한 바라면 불편한 마음은 들어도, 틀리지 않은 것 같다. 그리고 아주 다행스럽게 그 리듬에 실어 던져주는 ‘노래’들 속에 물음과 동시에 답이 들어있다.
영화에 흐르는 노래들은 관객에게 질문과 동시에 답을 사랑과 용서의 관계로 보여준다. 이때 용서는 그저 단순한 용서가 아니다. 만약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이 사랑에 근거한다면 그것은 ‘포용하는 사랑’에 기인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또한, 내가 누군가에게 받은 용서가 사랑에 근거한다면 그것 역시 ‘포용하는 사랑’에 의한 열매다. 미리엘 주교가 은촛대를 숨긴 장발장에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나는 이 은촛대를 당신에게 선물한 것이오”라고 감싸면서 “나는 당신의 영혼을 샀다.”라는 대사는 바로 용서와 포용하는 사랑을 보여주는 압권이다. 하지만 ‘배척하는 사랑’에 의한 용서함과 용서받음의 결말은 다소 비극이다. 이는 자신과 상대방을 받아들일 여지를 더 남겨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배타적 사랑 아래서 ‘용서받음’은 곧 부끄러움이다. ‘용서한다’는 행위조차 치욕으로 바뀐다. 자베르는 센강 난간이라는 경계선에 서서 눈물로 자신을 응시한다. 그리고 ‘배척하는 사랑’의 손짓이 휘저어 놓은 물길로 몸을 던진다. 일반적으로 이런 그의 행동을 목숨같이 여긴 ‘법’과 인간 내면에 감응한 자기 자비 사이에서 일어난 갈등과 긴장을 포용하지 못한 결과로 이해한다. 하지만, 그것은 표면적인 이유다. 오히려 더 깊이 보면 포용하는 사랑에 다가가기를 두려워한 한계 인식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남긴 취지의 말은 이를 대변한다. “나는 법의 종이었다. 나는 법만을 따랐다.” 그는 법을 사랑했지만, 인간을 사랑하려는 자신을 지켜내지 못했다.
자유는 ‘공간’ 쟁취가 아니라 ‘내일’이라는 시간 선물
이 영화의 축은 거대한 폐쇄공간에서 자유로운 공간으로 이행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에 그치지 않는다. 또 다른 축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도주와 추적이다. 한 사람은 숨기 위한 필사적으로 도주한다. 그런데 이 도주는 마침내 적극적인 삶의 질주로 전환된다. 영화 전체는 주인공이 죽음의 계곡을 지나 희망의 들판으로 이행되는 생존 행진을 보여준다. 추적자가 건재하지만, 언제나 ‘내일은 온다’라는 갈망이 폐기되지 않는다.
결말의 민중가 “Do You Hear the People Sing?”(불어로는 “À la volonté du peuple”로도 알려짐)은 ‘나’와 ‘우리’의 공동 선언이다. “분노한 민중의 노랫소리가 들리는가? 다시는 노예로 살지 않겠다는 노래… 내일이 오면 새로운 삶이 시작되리!”—이는 “One Day More”가 노래하는 시간의 문턱과 맞물려, ‘내일의 희망’을 저항으로 쟁취하는 찬가가 된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에서 노래하며 희구하는 ‘붉은 자유’는 공간을 보장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시간의 약속’이다. 혁명은 끝내 국가의 벽을 넘지 못하고 공간을 빼앗겨 죽음을 넘어서지 못했다. 실패로 끝났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내일의 붉은 태양’이 떠오르는 시간마저 가로막을 수는 없었다. 이 영화에서 내가 마음에 기억하는 것은 이것이다.: ‘자유’란 오늘 여기서 ‘내일’이라는 시간을 보장하는 것이다. 공간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자유의 담보는 ‘포용하는 사랑’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때 사랑은 상호 교감에 그치지 않는다. 사회, 대중, 공공의 가치로 구현되는 공동체성과 연동한다. 이 ‘포용하는 사랑’이 혁명과 개혁의 경계선에 선 모든 이들의 거리감을 상쇄하고 연대하게 이끈다.
이제 영화의 끝에서 들리는 마지막 노래를 다시 들어보자. 독창이 아닌 군중의 노래다. “민중의 노래가 들리는가?” 노래가 흐르면, 바리케이드 너머로 갈망하는 세상이 오버랩된다. 그것은 열린 세계다. 여백이다. 자유로 꾸며진 광장이다. 전쟁은 무기만으로 승패가 갈라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승리는 보이는 무기를 내려놓고, 보이지 않는 신념으로 싸워 쟁취한 것이다. “그 세계를 본다면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내어놓을 수 있는가? 우리의 전진을 위해”라는 자기희생이 진정한 승리의 무기다
이처럼 자기희생은 희망의 동력이다. 이 희망은 에른스트 블로흐가 말한 대로 그저 공간의 확보가 아니라 시간의 보장을 위한 자기 저항이다. 구약의 예언자들에게 있어 ‘그날에’, ‘그날이 오면’이라는 종말론적 신념과도 닮았다. 이때 희망은 바라는 바가 아니라 쟁취하려는 의지이며, 자유의 기저에 흐르는 원시적인 저항의식이다.
다시 질문한다. ‘나는 누구인가, 레 미제라블인가?’
그렇다면 이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이 땅의 ‘레 미제라블’은 누구인가? 경제적 빈곤층에 있는 무수한 대중, 가난한 자들인가? 빵 하나를 훔친 죄로부터 무려 19년을 감옥에 갇혀 노예로 살았던 장발장인가?, 어린 땅의 생존을 위해 삶의 바닥을 헤매야 하는 판틴인가? 가난한 자들을 기만하며 그 뒤에서 탈취와 착취로 삶을 유지하는 여관집 주인 테나르디에 부부인가? 아니면 끝없이 추적자의 자리에 서 있는 자베르 경감인가? 빗속에서 사랑을 얻지 못한 자신을 노래하는 에포닌인가? 고아가 되어버린 코제트인가? 실패한 혁명의 주동자였던 혁명군의 젊은이들인가? 아니다. 영화는 이들을 ‘정의와 공의에 의한 긍휼의 대상’이라고 규정하지는 않는다.
생각해 보면 이 영화에서 ‘레 미제라블’은 새롭게 규정된다. 모든 이를 포용하는 사랑으로 새로워진 자아다. 그는 ‘포용하는 사랑’에 자기를 내던진다.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역주행한다. 자기 삶을 자유에 내던짐으로써 이기적 생존 궤도를 이탈한 자다. 그들은 누구든지, 자기를 초극하여 상대방을 자신의 삶에 영역에 둘 수 있는 자들, 자신의 확신을 모두의 확신 속에서 끊임없이 묻는 자이다. ‘나는 누구인가?’를 의지적으로 물으며 땅에서도 하늘을 보는 자이다. 그렇게 자신에게 질문하는 자, 그래서 궁극적으로 삶의 경계를 허물고 바닥까지 떨어질 위험성을 기꺼이 감수하면서 마침내 그 자리에 떨어진 자, 그런 사람의 연대를 우리는 시대의 ‘레 미제라블’이라 부른다.
어렵지 않게 포착하겠지만, 이 ‘레 미제라블’에게 비로소 오늘 이 자리에서 ‘내일’을 꿈꿀 수 있는 자유가 붉은 해처럼 주어진다. 거대한 바닷속에서 난파해 버린 배를 자기 의지를 억압당한 채 끌어올리며 ‘고개를 숙여야 하는’ 노예들의 죽음 공간으로부터 노래와 리듬으로 삶의 깃발을 높이 들고 그 위태하지만 웅장한 생존의 경계선에 당당하게 서서 바리케이드 너머를 향해 ‘자유를 부르는 권리’를 쟁취하려는 시간의 민중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레 미제라블’만이 닫힌 세계에서 열린 세계로 나가려는 희망을 저항으로 쟁취하려 한다. 마침내 그들에게 ‘그날’은 희망의 날로 주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영화의 질문에 나는 답해야 한다. “당신은 자유를 희구할 권리가 있는 ‘레 미제라블’인가?”영화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나도 미리엘 주교처럼 나지막하게 답한다.
“나는 비천한 자로서 또 다른 이를 포용하는 사랑의 존재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