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한 단어 38-365 -글쓰기 과정 덧붙여
한꺼번에 마구 몰아치지 않고
오래도록 지긋하게/진득하게
1.
서재에서 돌아오는 길,
내려야 할 역,
도로 길옆 지난 ‘벗’-꽃
노란 단풍 물들어
평소라면 그사이 천천히 걸어
오기도 전에 떠나가는 가을
아쉬워
그저 먼 길로 느긋하게 휭 돌았다.
2.
‘느루’
느릿하고 느긋한 모양 같다.
다 한 가족 같은 말들이다.
주어지는 것에
느긋한 마음으로 순응하고
가벼운 생각으로 행복해하는 모습
빠르고 재바르게 움직여야 제 삶을 살 수 있다고
몰아치는 시대에
홀로 느긋한 것이 얼마나 도움이 될까 싶긴 하다.
3.
‘느루’
요즘 내 손글씨가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어느 해 매일 기도문을 쓸 때부터 느낀 바지만,
글이 좌우로 눕고, 획 끝이 짧고 뭉툭해졌다.
바르고 날렵한 글이 기우뚱하고, 몽글몽글 뭉쳐있다.
삶이 손끝에서부터 저물어가나 보다
해마다 10월은 느루 몸을 움직여야만
제대로 보내는 시간이다.
어디선가 부르지 않아도 달려보고
어디론가 갈 수 없다 해도 느긋하게 내달려본다.
4.
계절은 빠르지 않다
빠른 것은 내 의식이며
서두르는 것은
나의 마음 바닥이다.
그저 느루 하게
아침 공기,
저녁 불빛
즐기다 보면
세월은 제 속도로 흘러가리라.
단풍은 제 속도로 익어가니
서두르지 말자
.....
나의 작은 삶이 하나의 철학으로 전진하는 과정에 대해
「느루」 ― 속도의 전환과 삶의 미학
1. 글의 시작-일상의 풍경 관찰
이 글은 서재에서 돌아오는 길, 가을의 풍경을 관찰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도로 길옆 지난 벗-꽃, 노란 단풍”이라는 구체적 이미지, 그 관찰을 오래 기억하며 “먼 길로 느긋하게 휭 돌았다.” 이 장면은 글 전체를 지탱하는 상징적 출발점이다. 일상의 길 위에서 속도를 늦추는 행위가 곧 ‘느루’라는 개념을 소환했다.
2. 개념의 정립 ― ‘느루’라는 언어의 울림
다음 단계는 ‘느루’라는 옛 단어를 되새기는 일이다. 이 단어는 “느릿하고 느긋한 모양”을 표현하는 부사다. 내가 저장해 둔 단어, ‘느루’는 느림의 미학, 유연한 삶의 태도, 그리고 급박한 시대와의 대조 속에서 더욱 빛나는 말이다. 나는 이 개념으로 나의 관찰을 문학화한다. 속도의 힘에 저항하고, 소박하지만 나의 삶의 방식을 ‘느루’라는 언어에 담아 선언하고 행동한다.
3. 문화화로서 나의 다른 경험 소환― 손글씨의 변화와 시간의 질감
나는 계절의 변화와 느루라는 개념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나의 경험을 소환한다. 오랫동안 즐거운 손글씨에 변화가 생긴 기억이다. 어느 날부터인가 “글이 좌우로 눕고, 획 끝이 짧고 뭉툭해졌다.” 이 변화는 단순한 필체의 달라짐이 아니다. 나이가 들어가는 삶의 흐름과 저물어가는 삶을 은유한다. 이 단계에서 ‘느루’는 추상적 가치가 아니다. 기록된 몸의 구체적 변화, 체험이다. 나는 손끝에서 ‘기우뚱’ 해지는 글씨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내려앉는 세월의 감각을 정직하게 증언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이제 마지막 단계는 이 관찰-개념-문학화가 하나의 사유로 정착되는 과정이다.
4. 사유의 결론―계절과 나의 시간 속도 발맞춤
나는 이제 하나의 사유를 정립한다. “계절은 빠르지 않다. 빠른 것은 내 의식이며 서두르는 것은 나의 마음 바닥이다.”라는 것이다. 이 글이 핵심이다. 이는 단순히 내 경험을 정리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시간론, 계절에 대한 철학이다.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스스로 느리거나 빨라지지도 않는다. 그 속도와 존재 유무는 상대적으로 내가 결정한다. 다시 말해 물리적-객관적 시간은 나의 자연적-주관적 의식과 긴밀하다는 것이다. 이 둘 사이의 긴장이 ‘변화’라는 관점에 함의되는 시간의 철학이다.
따라서 나의 사유는 결론적으로 “세월은 제 속도로 흘러가리라. 단풍은 제 속도로 익어가니 ‘서두르지 말자’”라고 다독인다. 이 자연의 리듬을 통해 삶의 속도를 맞춰가자는 비유다. 나는 계절의 변화로 내 삶을 압박하지 않으려 한다. 모든 시간은 변화이니 자연스럽게 뒤따라가거나 평행선처럼 걸으며 체득하면 충분하다.
5. 정리― ‘느루’의 시간철학
내가 쓴 「느루」는 짧은 산문시다. 나는 단어·풍경경험·삶의 기억을 매개로 ‘서두르지 않음’의 미학을 잘 풀어내고 싶었다. 일상적 경험을 통해 철학적 명제를 도출하는 방식을 연습하고 싶었고, 다소 직설적으로 내 삶을 무심하게 바라보는 색채를 산문으로 써내고 싶었다. 어느 것이든 ‘느루’라는 느릿하게 살아가려는 주제와 어긋나게 글을 조립해야 했고, 시대적 긴박함과의 대조를 적확하게 건설했어야 했다. 결국, 이 글은 결국 속도를 늦추는 행위가 곧 삶을 풍요롭게 하는 나의 시간 철학을 증언해 보려는 시도다. ‘느루’라는 한국어 고유의 어휘를 통해, 나는 다시금 잊고 있던 삶의 속도를 나의 글로 소환하여 소생해보고 싶었다. 나의 미미한 글이라도 무한한 수정과 반복으로 작은 삶의 철학적 건축물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