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 철학, 시간을 몸으로 읽어내는 공간철학
“철학은 사유의 길 위에서 시가 되고, 시는 그 길을 걸으며 철학으로 되돌아온다. 걷기 철학은 곧 걷는 기도의 철학이며, 그 기도의 언어가 바로 걷는 기도시다.”
이 프롤로그는 철학이 언어로 사유를 새기고,
시가 몸으로 세계를 다시 쓰는 자리에서 태어난 하나의 기록이다.
걷기는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세계를 해석하는 몸의 리듬이며,
그 리듬이 언어로 피어날 때 철학은 시가 되고, 시는 기도가 된다.
이 글은 바로 그 ‘걷는 기도시’의 철학적 서문이다.
걸음의 의의
걷기는 걷는 행동이다. 몸이 발을 사용해 여기에서 저기로 한 걸음씩 옮기는 능동적 움직임이다. 속도는 호흡의 주기와 일정해야 하고, 거리는 몸이 피곤함을 느낄 때까지다. 그렇다고 해서 ‘걷기’가 단순히 ‘공간을 이동하는 시간’만 의미하지 않는다. 몸을 움직일 때 부딪치는 모든 사물―보이는 것, 보이지 않는 것들―과 ‘대면하여 생성하는 관계’의 사건이다. 걷기는 ‘시간의 관계’가 몸 안에서 하나의 사건으로 피어나는 찰나의 행위다.
이러한 걷기는 철학으로 전이된다. 이는 카를로 로벨리가 사유한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라는 명제를 ‘관계의 체험’이라는 철학적 실천으로 확장하는 몸철학의 한 부류이다. 걷는다는 것은 흘러가는 시간을 따라 몸이 움직이는 일이 아니라, 몸으로 시간이라는 사건과 만나는 일이다. 로벨리의 시간관처럼, 걷기는 사건과 사건 사이를 엮는 관계의 운동이다. 걷는 동안 몸은 바람의 저항, 발밑의 질감, 빛의 각도 변화와 함께 끊임없이 관계를 갱신한다.
시간은 그 관계 사이에 일어나는 변화의 흔적이며, 걷기는 그것을 몸으로 번역하여 저장하는 기억의 실천이다. 걷기에서는 언제나 사물과 기억에 대한 해석이 일어난다. 나는 이런 해석학적 태도를 ‘도석(道釋)’이라 부른다. 그러므로 걷기 철학은 시간의 공간화이자, 몸이 직접 대면하는 시공간 속에서 사물과 사물, 나와 세계의 관계를 새롭게 직조하는 하이브리드 철학이다. 이때 몸은 단순한 이동 수단이 아니라, 관계를 창발 시키는 장(場)의 중심이다. 몸으로 걷는 행위는 그 장을 통해 세계를 해석하며, 사유의 리듬을 드러내는 철학이다.
‘걷다’와 길의 관계
‘걷다’의 사전적 의미는 다리를 움직여 바닥에서 발을 번갈아 떼어 옮기는 행위다. 사람들은 이 걷는 행위가 반복되면 마침내 길을 만든다는 설명을 즐겨한다. 따라서 모든 걸음은 걷는 자의 이야기다.
고대 히브리인들은 이 ‘걸음’이 자신에게 유익하게 되돌려지는 행위를 ‘산책하다. 한적한 걸음으로 둘레를 돌다’(히. 히트할라크)라고 말했다. 이런 의미는 사회적으로 더욱 확장되어 마침내 도시 ‘산책’이 반복되는 것을 ‘공적 생활(公的生活, public life)’이라 명명했다.
그리하여 도시 산책은 ‘공공 영역에서 나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사회적 삶을 함의했다. 그러므로 모든 철학적 걸음은 ‘산책’에서 시작되고 끝난다.
안셀름 그린의 『길 위에서:그리스도인을 위한 걷기의 신학』 (왜관:분도출판사, 2020)은 이 산책의 의미를 잘 포착했다. 그에 따르면, “걷기, 순례에는 늘 종교적이며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믿음이란 길을 나서는 것입니다…(5쪽), 우리의 삶에 대한 은유로서의 길은 모든 것을 즉 우리가 마주치는 것과 우리에게 일어나는 것, 우리가 탐색하는 것과 감내하는 것, 우리가 구상하는 것과 도달하는 것을 포괄한다.”(12~13쪽)라는 설명이 있다.
그의 말속에는 산책이 결단의 걸음이며, 홀로 세계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몸의 선언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따라서 산책은 걷는 이의 독주다. 그는 독보적(獨步的) 존재로서 몸 하나로 세계에 맞닿는 느낌을 즐긴다. 누구든 걸음은 원시적 이동 수단이어서 걸을 때마다 세계와 몸은 충돌한다. 하지만 그 충돌은 은근히 몸을 역동시키고 그 역동으로 내 몸은 길 위에서 기분 좋게 출렁거린다. 바람이 불거나 느닷없이 비가 내리거나 갑자기 산짐승이 나타나거나 길이 희미해지거나 빛이 사라지거나 어둠이 물러갈 때마다 모든 걸음은 악보를 따라 리듬 있는 노래처럼 움직인다. 산책, 그 태생적 느릿한 ‘길 걷기’는 마치 언어를 배우는 일과 같이 누긋누긋 오랜 세월이 걸린다. 그래서 나는 ‘걷는 기도’를 생각할 때마다 이 명제를 떠올린다:‘걷는다, 고로 나는 생존한다.’ 길은 언제나 열려있다. 어디서든 어디로든 들고 날 수 있다. 막다른 길이라면 멈추면 된다. 가볍게 뒤돌아 나오면 그만이다.
내가 걸었던 길은 셀 수 없이 다양한 형태였다. 들로 난 길, 산으로 오르는 길, 바닷가를 따라가는 길, 도시의 골목길, 그리고 기억 속에만 남은 길도 있다. 이 길을 때로는 혼자 걷고, 때로는 누군가와 나란히 걸었다. 길의 형태가 다르듯, 걷는 사람의 마음도 다르다. 들길에서는 여유롭고, 생각이 넓어진다. 산길에서는 호흡이 거칠어지고 숨이 깊어진다. 바닷길에서는 파도 소리에 몸을 맡기며 침묵이 길어지고, 골목길에서는 과거가 깨어난다.
그러나 어떤 길이라도 그 길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모든 길은 누군가 시작한 이래로 끝없는 발길들이 엮인 관계의 상징이어서 결국 나도 나의 걸음으로 세계로 이어진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걷는다는 것은 수많은 길 위에서 나와 세계의 관계를 다시 짓는 일이다. 길은 단순한 이동의 공간이 아니라, 존재가 자기 자신을 해석하는 장(場)이다. 따라서 걷기 철학은 길의 다양성 속에서 관계의 깊이를 배우는 일이며, 그 관계의 총합이 바로 ‘도석(道釋)’이다. 즉 길 위의 해석이며, 걷는 삶의 사유다.
걷기의 해석학적 의미:도석
걷기는 곧 ‘도석의 장(場)’이다. 도석은 말 그대로 길 위에서 일어나는 해석이다. 길을 걷는 동안의 시간은 단순히 흐르는 것이 아니라, 변화의 척도이자 그 질량의 무게를 가늠하게 하는 감각이다. 로벨리의 견해를 빌리자면, 시간은 관계의 틈에서 상대적으로 흐른다. 길 위에서 그 변화의 양상은 언제나 다르고, 그만큼 걷는 이는 매번 다른 무게의 세계를 짊어진다. 결과적으로 도석은 이 사건을 포착하여 자신 속에 새겨 넣는 사유의 자기화 과정이다.
이러한 도석이 가능한 이유는 세계 안에 휘도는 시간이 곧 세계라는 공간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걷는 시간과 길이라는 공간이 하이브리드 장으로 재구축되기 때문이다. 시간은 해체되어 공간으로 스며들고, 공간은 시간이 일으킨 변화를 하나의 사건으로 되돌려준다. 결과적으로 도석은 이 사건을 포착하여 ‘자기화’하는 해석학적 진화이다.
도석에는 두 가지 도구가 필요하다. 하나는 응시와 관찰, 다른 하나는 기억과 암송이다. 응시는 눈으로 세계를 가만히 살피는 행위이며, 기억은 그 응시를 마음속에 오래 새기는 일이다. 이 두 행위가 만나면, 걷는 몸은 자연스럽게 해석의 몸으로 전환된다.
따라서 걷기 철학은 수많은 도석이 축적되어 구축되는 사유의 과정이다. 카오스처럼 뒤섞인 사물세계와 생활세계 속에서, 일상의 단서가 사유의 실마리가 되고, 그것이 다시 하나의 개념으로 응결되는 여정이다. 그러므로 ‘도석’은 일상의 관찰이 의미 있는 사유의 한 장으로 확장되는, 걷기 철학의 필연적 도구다.
도석을 구현하는 언어, 시(詩)
걷기의 도석은 언어로 표현된다. 걷는 동안 몸은 세계와 관계를 맺고, 그 관계는 내면의 사유로 침전된다. 그러나 그 사유가 끝내 머무는 자리는 언제나 언어다. 이때, 침묵마저도 언어가 된다. 걷는 행위가 해석으로 전환되는 순간, 몸의 감각은 언어의 리듬으로 변주된다. 언어는 걷기의 산물이자, 길 위에서 생겨난 관계의 흔적이며, 그것을 다시 세계로 되돌려주는 순환이다. 도석은 언어로 완성된다. 철학은 이제 사유의 관념이 아니라, 몸의 리듬으로 구현되는 미학이다. 걷기 철학은 그 미학화된 철학의 길이며, 한 걸음 한 걸음이 존재를 드러내는 예술적 행위다. 이는 철학이 이성의 논리로 설명되기보다, 감각과 리듬으로 드러나는 미학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 도석의 언어는 사변에 그치는 명제가 아니라, 몸의 기억에서 길어 올린 감각의 언어다. 논리를 증명하기보다, 관계를 재현하고, 세계와의 접촉을 다시 느끼게 하는 문장의 리듬이다. 이렇게 걷기 철학이 언어로 구현되어 하나의 문장으로 옮겨질 때, 그 문장 속 단어 하나하나는 걸어온 길 위의 발자국처럼 시간이 만들어낸 변화의 층위를 따라 배열된다. 이제 도석의 결실인 말은 곧 몸의 흔적이고, 문장은 걸음이 일궈낸 사건의 순서다. 그러므로 언어로 소생하는 걷기 철학은 단순히 사유를 나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과거의 걸음에 새겨진 기억을 미래로 견인해 가기 위해 현재 나의 몸으로 되살리는 음악, 즉 ‘리듬의 사유’가 연주된다
걷기 철학에서 도석의 언어는 순례자가 세계를 피상적으로 관찰한 미메시스가 아니라 세계와 함께 걷는 도반으로 자리매김해 준다. 그의 문장은 멈추어 선 사유가 아니라, 한 길에서 다시 열리는 새로운 길로 나아가게 하는 전진 운동이다. 이로써 걷기의 해석학, 곧 도석은 언어로 발현되어 실천으로 완성된다. 걷는 몸이 언어가 되고, 언어가 다시 몸의 기억을 불러낼 때, 철학은 단순한 사유가 아니라, 살아 있는 행위로 되돌아온다. 이 행위의 가장 구체적인 형식이 문학이며, 무엇보다 시다.
철학시의 정의와 걷기 철학의 관계
철학시는 생각을 담는 그릇이 아니라, 생각이 새롭게 태어나는 언어의 형식이다. 철학이 기존 언어로 진리를 설명하려 한다면, 시는 언어를 새롭게 만들어 세계를 다시 쓴다. 리처드 로티의 표현을 빌리자면, 철학은 더 이상 ‘진리를 발견하는 학문’이 아니라, ‘언어를 재묘사하는 상상력의 실천’이다. 그는 “철학자는 시인처럼 되어야 한다”라고 말하며, 진리의 탐구 대신 세계의 재묘사를 철학의 과제로 제시했다. 철학시는 바로 이러한 철학의 변주, 사유의 재묘사로서 태어난다. 철학시란 철학이 언어의 논증을 넘어, 미적 감각으로 자기 사유를 구현하는 형식이다.
걷기 철학은 이 철학시의 존재 방식을 몸으로 구현한다. 걷는다는 것은 이미 정해진 길을 반복하는 일이 아니라, 매 걸음마다 길을 새롭게 쓰는 일이다. 따라서 걷기 철학의 시적 행위란, 사유를 걷기의 리듬 속에서 다시 쓰는 몸의 재묘사다. 로티가 말한 ‘언어의 재묘사’가 걷기 철학 안에서는 ‘몸의 재묘사’로 변환된다. 즉, 걷기 철학은 세계를 새로 발견하기보다, 세계를 다시 읽고 다시 써 내려가는 살아 있는 언어의 실천이다.
철학시는 이처럼 걷는 몸의 철학이 언어로 전이된 형태다. 그것은 개념을 노래로, 논리를 감각으로 변환하는 언어의 기도이며, 길 위의 사유가 언어로 응결된 문학적 결정체다. 철학이 사유를 개념으로 정리한다면, 철학시는 그 개념을 다시 걸음의 언어로 풀어내어 새로운 세계를 재묘사한다. 걷기 철학에서 시는 단순히 철학을 표현하는 수단이 아니라, 걷기 자체가 리듬으로 살아나는 형식이다.
따라서 철학시는 철학이 시로 걸어 나가는 언어이자, 시가 철학으로 되돌아오는 순환의 장(場)이다. 로티가 말한 시적 철학이 언어의 차원에서 철학을 해체했다면, 걷기 철학은 몸의 차원에서 철학을 해석한다. 걷기 철학의 철학시는 곧 몸의 언어와 언어의 몸이 서로를 재묘사하는 시적 행위이며, 철학과 시, 사유와 감각이 한 리듬으로 호흡하는 새로운 철학적 형식이다.
걷기 철학, ‘걷는 기도’의 철학
이 기도에서 걷기는 곧 사유의 수행이고, 철학은 곧 감사의 언어다. 세계는 더 이상 탐구의 대상이 아니라, 함께 숨 쉬는 대화의 상대가 된다. 걷기 철학의 궁극은 ‘걷는 기도’다. 걷는다는 것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존재를 깨우는 행위이며, 매 순간을 향해 깨어 있는 기도의 리듬이다. 몸이 땅을 딛는 순간, 생각은 낮아지고, 호흡은 깊어진다. 길 위의 한 걸음 한 걸음은 세속의 언어로는 표현되지 않는 침묵의 고백이 된다.
이처럼 걷는 기도는 마음이 아니라 몸으로 드리는 철학적 예배이며, 사유가 형식이 아니라 삶으로 환원되는 사건이다. 따라서 걷기 철학은 철학적 명제를 증명하려는 이론이 아니라, 몸으로 세계를 받아들이는 존재의 기도문이다. 그 기도의 언어가 구체적으로 ‘걷는 기도시’다.
이 ‘걷는 기도시’는 걷기의 리듬 속에서 태어나는 사유의 시다. 그것은 철학이 시로 걸어 나가는 형식이자, 시가 철학으로 되돌아오는 순례의 언어다. 걷는 동안 몸은 세계와 관계를 맺고, 언어는 그 관계를 노래한다. 그리하여 한 편의 시는 한 번의 걸음이며, 한 번의 걸음은 한 편의 시가 된다. 이것이 걷기 철학의 완성이며, 나의 철학시가 지향하는 궁극의 자리다—걷는 기도의 철학, 곧 걷는 시의 기도다.
걷는 기도의 실제
걷는 기도는 철학이 삶으로 구현되는 자리다. 걷는다는 것은 사유를 몸으로 옮기는 일이며, 사유는 길 위에서 다시 태어난다. 몸은 생각을 품고, 생각은 몸을 움직인다. 이 단순한 순환이 바로 기도의 리듬이다.
걷는 기도는 이 모든 길에서 드러난다. 발자국마다 생각이 깃들고, 호흡마다 감사가 머문다. 기도는 말이 아니라, 매 순간 깨어 있는 몸의 자세다. 철학이 사유의 언어라면, 걷는 기도는 그 언어가 삶으로 변하는 실천이다. 철학은 걷기를 통해 현실이 되고, 걷기는 철학을 통해 의미를 얻는다. 걷는 몸은 더 이상 단순한 이동의 수단이 아니라, 사유의 집이며, 세계와 만나는 열린 성전이다. 따라서 걷는 기도의 실현이란, 몸이 세계를 이해하는 가장 느리고도 깊은 방식이며, 그 발자국 하나하나가 존재를 향한 응답이다.
그리하여 나는 걷.기에서 몇 가지를 배웠다. 우선 오르는 길에서 잘 내려서야 길이 끝난다는 것, 동시에 길을 헤맬 가능성이 상존한다는 것, 정상보다는 내려섰을 때 기쁨이 더 크다는 것, 길에 들어섰으면 마지막까지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는 나는 길에 나서기 전 더 많은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을 걸을수록 더욱 부인할 수 없다.
이처럼 나의 걷는 기도는 주어진 길을 가볍게 향유하고, 따뜻하게 어루만지며, 진솔하게 대화하며, 느릿하게 걷는 순례다. 무거운 의식은 잠시 접어두어도 좋다. 그저 나타난 그 길을 걸을 것이다. 나는 배웠다. 삶은 걷는 기도 즉 ‘걷기’다. 이 걷기는 곧 생의 의지다. 어디서 멈출지 모르고 방향도 없을 것이다. 그 오르고 내리며, 옆으로 이어지며, 미로처럼 펼쳐진 나의 길, 걷기를 다시 시작할 것이다.
이제 나의 고유한 순례로서 걷는 기도의 과정을 정리해두려 한다. 누구라도 자신만의 의식과 절차가 있다면 더욱 좋겠다. 나의 경우는 아래의 요소들을 반복한다.
(1) 정도(定道):길을 정한다. 수직(등산), 수평(트레킹), 새로운 길, 또는 장거리 길
(2) 정식(定式):걷는 방식을 정한다. ‘혼자’ 또는 ‘함께’를 정한다.
(3) 정시(定時):소요될 시간을 미리 정해 둔다. 오전-오후가 겹치는 시간대가 좋다(도시락)
물론 시간이 정해져도 제대로 지켜지지는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길이 끝날 시간을 염두에
둘 때, 걷는 행동은 드라마 같은 줄거리를 유지할 수 있다.
(4) 정화(定話): 걷기에서 떠오른 주제와 핵심 단어, 겪은 사건을 메모한다. 돌아와 반추하면서 글로
남긴다.
(5) 정기(定祈): 마지막으로 형식에 맞춰 기도문을 완성한다.
걷기 철학, 걷는 기도시의 가치
걷기 철학은 몸으로 생각하고, 언어로 숨 쉬는 철학이다. 한 걸음의 움직임 속에 세계가 깨어나고, 한 문장의 호흡 속에 시간이 머문다. 걷는다는 것은 세계를 이해하기보다, 세계와 함께 살아보려는 사유의 리듬이다. 몸이 길 위에서 세계를 해석할 때, 언어는 그 해석을 다시 빛으로 되돌려준다. 철학은 그 빛을 붙잡아 의미를 짓고, 문학은 그 의미를 다시 길 위로 풀어놓는다.
이 두 흐름이 만나는 자리에서 철학은 시가 되고, 시는 기도가 된다. 걷기 철학은 곧 걷는 기도의 철학이며, 그 기도의 언어가 바로 철학시다. 길은 사유의 문장이 되고, 문장은 다시 길이 된다. 그 무한한 왕복 속에서 나는 존재를 걷는다—사유는 발자국으로 남고, 발자국은 언어로 피어난다. 이것이 나의 걷기 철학이다.
걷는다는 것은 철학하는 일이며, 철학은 걷는 기도다
그것은 곧 당신이라는 존재의 자기 증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