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긋누긋

나의 한 단어 48-365

by 푸른킴

성격이나 태도가 부드럽고 순한 모양,

메마르지 않고 물기가 스며들어 눅눅한 상태,

추위가 약간 풀린 상태.


1.

우리말 부사어들을 보면 한 가지 특징이 있다.

‘~긋~긋’ 형태가 많다는 것.

‘울긋불긋’, ‘나긋나긋’, ‘빵긋’ 같은 단어들만 봐도 그렇다.

‘긋’은 줄, 선, 획, 겨우, 억지로라는 뜻으로 쓰이는데,

가끔 ‘것’의 사투리라는 풀이도 있다.

그러니 ‘~긋’으로 끝나는 부사어들은

어떤 모습이

여럿이 한꺼번에, 또는 조금씩

미미하지만 그래도 눈에 띌 만큼

선명해진 하나의 상태, 혹은 변화라고 해야겠다

'여럿이 동시에 일어나는 부드럽고 미세한 변화'다.

多同微化(다동미화).

2.

‘누긋누긋’

이 부사는 주로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해동기를 떠올리게 한다.

경험하듯이, 끝겨울과 맞물린 초봄 날씨는

생각보다 쌀쌀하다. 꽃샘추위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심지어 ‘잎샘추위’라고도 한다.

모두 추위가 약간 풀렸으나

여전히 스산하고 을씨년스러운 때를 의미한다.

게다가 비라도 내리면 더욱 오싹해진다.

꽃샘이나 잎샘은 생각보다 끈질겨서 갈 듯 말 듯한

밀당을 봄이 끝나갈 때까지 계속한다.

3.

‘누긋누긋’

이 말속에는 촉촉한 물기가

스며있는 모습도 들어있다.

마치 봄의 아름다움이 꽃피는 것에만 있지 않고

가벼운 비가 내리는 풍경에도 있다는 것을 말하는 듯하다.

겨울비에 지지 않은 봄비가 아니라면

꽃은 피기 힘들고, 싹은 돋아나는데 힘겨워한다.

마른땅을 촉촉하게 하는 아주 작은 물기라도 없으면,

어떤 생명이라도 생존하기 쉽지 않다

봄날에 날씨마저 샘나게 하는 화려한 꽃핌은

이 스며드는 물기가 있기에 가능하다.

누긋누긋은 삶을 지탱하는 힘을 그린다.

4.

‘누긋누긋’

드러나지 않게 물들어 번지는 모습이다.

뽀송한 것이 좋은 느낌이라지만

부드러운, 물기가 촉촉한, 표정이 여릿하게 순한

그런 촉감도 좋을 때가 있다.

지난 4월과 5월에

숲 길과 산 능선에

봄비가 내려 푸석하게 마른땅 위에,

백색연둣빛 여린 새싹이 시나브로

짙고 강한 초록으로 옷을 갈아입는 신비로운 영상처럼 펼쳐져

손가락으로 꾸욱 누르기만 해도 씨앗 하나 심을 수 있게

부드럽고 연하게 달라진 자연의 기적을 쉽게 볼 수 있었다.

힘겨운 여름도 그 저장된 물기로 버텨내고

이제 어느덧 9월과 10월이 돌아와

그 잎과 꽃이, 내리는 가을비와 함께

부드럽게 낙화한다.


5.

모든 생존에 꼭 필요한 것들이

모든 망멸에 필요한 것들이기도 하다.

다르지만 같은 것,

부드러움,

촉촉함,

따스함 등이다.

가볍지만 지나칠 수 없는 이 여린 것들이

내 삶에

‘스며들어’

나도

누긋누긋한 모습으로 저물어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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