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한 단어 49-365
보송보송한 물건이 가볍게 바스러질 때 나는 소리
1.
서재에
밤이 시작되면 사위는 고요해진다.
전례처럼 산책을 하고 난 뒤,
하루 끝을 위한 식사를 차린다.
라디오를 들으며,
컴컴한 저 너머에서
스산하게 흔들리는 바람을 상상한다.
생각을 비워내는 밤의 예식이다.
서재 책상 한편에
늘 준비된 과자가 있다.
식사 후 가볍게 하나씩 꺼내먹는다.
보는 것으로 입맛이 당겨 멀리 치워놓지만
어느새
슬쩍 손 가까운 곳으로 끌어둔다.
과자 부스러지는 소리가 경쾌하다.
2.
‘보삭보삭’
글자 속에서 소리가 터진다.
마른미역, 과자, 가을 마른 낙엽이
가볍게 부서진다.
물기 없는 어떤 물건이
가볍게 바스러질 때 나는 소리다.
바스락바스락, 바삭바삭이
더 익숙할 수도 있겠지만,
보삭보삭도 몇 번 들어보면,
마음에 흥이 돋는다.
3.
‘보삭보삭’
보송보송하다지만,
물기 없어 마른 모습도 있다.
푸석해져
부서질 때 틀림없이
유연한 힘마저 사라져 버릴 수 있다.
몰래 스며든 습기도 없어
촉촉해지지 않은 탓에,
부서질 때 요란하다.
부러지듯 시끄럽다.
보송보송한 삶이 어느새
부드러움, 촉촉함 없이
딱딱한 것들로만 채워져 버린 탓이다.
그 건조함 자기도 모른 채 살아가는 날들,
갈수록 푸석푸석해지고,
마침내 죽음처럼 잘게 부서지는 시간이 올 테다.
어쩔 수 없이 바스러지는 소리,
비틀어진 진혼곡처럼 남겨지고 싶지 않은
작은 소망
4.
‘보삭보삭’
누구라도 살아가는 날 동안
아주 가끔은 보란 듯이 보송해진 자태를 뽐내다
보삭보삭 소리와 함께 경쾌하게
뽀송뽀송하게
시나브로 삶의 뒤안길로 퇴장하고 싶은 마음
감출 수 없을 터이다.
*"이젠 그랬으면 좋겠"다.
다만, 이 소리가 누구에게라도 아름다우려면,
자기로부터 조금 멀리 떨어져
마르는 순간 오기 전
길고 긴 세월, 촉촉하고 유연한 삶을 깊이 스미게 해야 한다.
5.
‘보삭보삭’
모든 낙엽은 마르고,
봄날의 풀과 가을의 낙엽 같은 인간의 삶도 마르다
돌이켜 생각하면,
다시 새로운 피조물이 태어나기 위해서는
마른 낙엽 같은 지난 삶은 반드시 바스러져
끝내 ‘보삭보삭’ 고운 흙으로 돌아간다.
그 평범한 속설을
연초록, 진초록 무르익을 때도
알아채지 못한다면 슬픈 일이다.
비가 그치지 않는 낯선 가을
이 비 맞은 가을이 넌지시 던지는
덕담을 새겨
이 가을에라도 온몸 마르기 전
보삭보삭하게 경쾌한
작은 씨앗 하나 다시 심어두자.
*조용필의 노래, '이제 그랬으면 좋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