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시-0.서문
시의 광장은 문장이다.
언어가 살아 있는 자리, 그곳에서 인간은 다시 시인이 된다.
I. 시의 윤리, 걷기의 철학
나는 오래도록 ‘걷기’라는 행위를 사유의 출발점으로 삼아왔다.
걷는다는 것은 단지 발을 옮기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시간을 통과하는 언어의 움직임,
침묵을 견디며 세상을 읽어내는 몸의 사색이다.
사람이 걷는 길마다 이야기가 흐르고,
그 이야기의 흔적마다 언어가 태어난다.
시인은 그 흔적을 말로 되살리는 사람이다.
그의 시는 머리로 쓰는 것이 아니라,
몸과 발, 그리고 삶으로 써 내려가는 일기다.
이 책에서 나는 광장을 다시 걷는다.
그곳은 단지 정치적 공간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이 모여 함께 존재를 발화하는 언어의 장소,
시가 현실과 만나는 공존의 토포스다.
광장에서 울리는 노래와 구호,
그 속에서 피어나는 말들은
모두 한 편의 시로 이어진다.
그 시는 누가 썼는지 모른다.
시인은 이름이 없다.
그러나 그 익명성 안에서
우리는 서로의 이름을 갖는다.
시의 윤리는
누가 더 잘 쓰는가가 아니라,
누가 더 함께 존재하는가의 문제다.
그리하여 시는 삶의 형식이며,
존재의 증언이며,
또한, 공존의 철학이 된다.
이 책은
그 철학적 걷기의 기록이다.
나는 이 글에서,
시를 쓰는 인간이 아니라
시적으로 사는 인간을 증언하려한다.
그 길 위에서,
모두 자신의 언어로
자신의 광장을 발견하기를 소망한다.
II. 그 공존의 토포스를 함께 걷다
1
가을이 가을답게 스산하다.
낡은 서재 창밖으로 오래된 나뭇잎들이 흩날린다.
겨울이 바투 오기 전, 온풍기를 켰다 껐다 한다.
여름이 어제 같은데, 가을은 쏜살같이 지나간다.
책을 펼치면, 서재의 공기가 따스해진다.
시간이 천천히 맴돈다.
마음도 따뜻해진다.
늦은 오후, 산책을 나선다.
주로 산길을 멀리 돌아 걷는다.
길을 따라 산을 오르고,
내려서면 도시로 들어선다.
늘 그렇듯 어둠이 내리기 전에 광장에 이를 것이다.
지난겨울 유쾌한 만장이 휘날렸고,
찬 바람 사이로 함성이 우렁찼고,
형형색색 응원봉과
노래가 넘쳤다.
몸과 세계가 함께 흔들렸다.
그 소리와 구호가 지금도 마음에 울린다.
광장에 들어서면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뒤돌아가거나 휘돌 수 없다.
어디선가 O15B의 ‘무한궤도’가 흐른다.
노래를 따라 연대감이 사람들 사이로 파고든다.
가사는 어느새 시가 되고,
시는 정의로운 선언으로 확장된다.
시인은 시를 쓰지 않는다.
그의 삶이 곧 시이기 때문이다.
시인을 동경하는 자가 시를 쓴다.
시인 없는 시가 광장 사이를 흐른다.
광장에 어둠이 덮이고,
아스팔트 위로 시판(詩板)이 깔린다.
이미 한 편의 거대한 시가 낭송된다.
2.
길을 걸으며, 오래전 읽은 책 한 권이 떠오른다.
“시인을 체포하라!”
1700년대 중반, 파리 치안 경감은 루이 15세로부터 명령을 받는다.
‘검은 분노의 괴물’이라는 시의 작자를 잡아들이라는 명령이었다.
그 시에서 시인은 왕을 조롱했다.
하지만 경찰은 시인을 찾지 못했다.
붙잡힌 이는 모두 평범한 시민들이었다.
그들은 그 시를 쓴 이가 아니라,
그 시를 노래한 사람들이었다.
시인은 없었다.
아니, 있었다.
그 시인은 왕에 저항하는 대중 전체였다.
대중이 곧 시인이었다.
시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시는 신비한 매체다.
주도하는 이가 없어도
빠르게 사람들 사이로 확산된다.
그것이 단지 ‘시’였기 때문이다.
3.
이 이야기는
미국의 역사학자 로버트 단턴의
『시인을 체포하라』(Poetry and the Police, 2012)에 실려 있다.
그의 관심은 ‘문자’가 아닌 ‘음성’,
‘글’이 아닌 ‘말’의 소통이었다.
그는 말했다.
“루이 15세가 시인을 잡을 수 없었던 이유는
그 시가 이미 사람들의 입과 입 사이를 떠돌았기 때문이다.”
시가 노래가 되고,
노래가 민중의 언어가 되었을 때,
대중은 자기 자신을 시로 표현했다.
따라서 그 시의 저자는 단 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 시의 주체는, 바로 사회적 인격체로서의 대중이었다.
4.
단턴은 ‘시’를 의사소통의 양식으로 읽었다.
그의 통찰은 명확하다.
시는 함축이자 서술이며,
감정이자 언어다.
그 시절의 시가 역동적일 수 있었던 이유는
삶의 지축을 붙잡고, 동시에 전환시켰기 때문이다.
한 줄의 시가 사회의식을 응축하고,
그 한 줄이 노래가 되어
사람들의 마음을 타격했다.
그렇기에 시는 언제나 살아있는 문학,
살아있는 말이다.
5.
우리가 아는 대로
시는 긴 이야기를 그대로 담지 않는다.
시의 본질은
하나의 점, 한 줄의 떨림에 있다.
단어와 단어 사이,
그 틈이 바로 시의 숨이다.
침묵의 틈에서 의미가 싹이 난다.
자란다.
시는 운문이다.
또한, 시는 산문이다.
의미를 압축하면서, 서사를 품는다.
‘시형적(詩形的)’이라는 말은
운문과 산문의 공존을 뜻한다.
이런 형태로 시의 함축성과 산문의 명료성이
서로 기대어 선다.
6.
고대로부터 글은 운문으로 시작했다.
그들의 서사시는 리듬을 담기 위해 짧게 쓰였다.
암송과 기억하기 쉽게,
또 다른 이에게 말로 전하기 쉬워야 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시적 산문은 그 맥을 잇는다.
하나의 단어 속에 세계를 담고,
하나의 문장 속에 인생을 부유시킨다.
그 안에서 시간은 맥놀이 하며,
한 인간의 목소리는
세계를 흔든다.
7.
이런 시적 산문이 가장 강하게 발화되는 장소,
그곳이 바로 광장이다.
대중이 모이고,
시와 노래가 함께 울린다.
그곳은 공존의 장(場),
토포스(topos)다.
바람이 불고,
시간이 교차한다.
광장의 바람은 경계를 허문다.
코헬렛은 말했다.
“바람은 불다가 그 돌아가는 곳이 있다.”
그 불확정한 순환이
카오스모스(kaosmos)를 만든다.
광장의 대중은 그 바람 속에서
혼란과 질서의 경계를 배운다.
그 질서의 힘이 곧 시의 에너지다.
그 노래는 문학의 헤테로토포스,
곧 산문이 된다.
8.
어느 시대든 시는 언어의 연금술이다.
평면 같은 언어를 입체적으로 바꾸고,
의미의 잔해를 갈고닦아
마침내 언어의 성소를 세운다.
서로 다른 언어가 공존하는
이 광장은 언어들의 사원(寺)이다.
그 안에서 언어들은
닮아가지만, 같아지지 않는다.
“나는 너다”라는 말은
결국 “나는 너와 닮았다”라는 뜻이다.
닮음은 은유다.
이 은유의 간격이
시의 여백을 만든다.
그 여백이 있을 때,
언어는 서로를 해치지 않고,
조화 속에 뜻을 만든다.
9.
플라톤은 시를 모방이라 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시를
인간의 고통과 인식의 순환이라 했다.
그에게 시는
세계의 불가해함을 관조하는
연극의 대본이었다.
그는 시가 철학이 되기 어렵다고 하면서도,
비극시가 인간을 이해하는
가장 높은 문학적 형식이라 했다.
그리하여 시는
‘경계가 있는 무경계의 공간’을 창출한다.
혼돈 속의 질서,
질서 속의 혼돈.
시의 내면에는
‘규칙적 불확정성(chaos)’이 빛처럼 흐른다.
10.
이런 의미에서 시의 광장은
모든 이에게 열린 공간이다.
방향을 잃은 자도,
결정을 두려워하는 자도
이곳에서 제 발을 디딜 수 있다.
시의 공간은 공존의 터전이다.
‘있음(存)’이자 ‘있어야 할 것(在)’,
‘부동(不動)’이자 ‘운동(動)’.
정(靜)과 부정(不淨)이 함께 머문다.
그 불안정한 공존 속에서
인간은 누구나 시를 생산할 수 있다.
11.
나는 광화문 월대 앞에 자주 선다.
시가 춤추는 광장,
시인들이 공존하는 잔치.
도시가 시가 되었다.
이 도시가 시였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도시는 정(正)과 부정(不正),
정(靜)과 부정(不淨)이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이 광장에서 나는
타인과 함께
옛 시간을 끊고,
새로운 오늘을 잇는다.
이 도시의 공기는
시의 리듬으로 움직인다.
그 리듬 안에서 나는
시의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다.
12.
바람은 나를 광장 안으로 이끈다.
이제 그곳은 투쟁의 장소만이 아니다.
시인의 놀이터,
공존의 배움터다.
외침과 환호,
말하기와 듣기,
이미지와 현실,
구호와 연설이 조화롭게 흐르는 시장이다.
나는 배운다.
공존의 가치를.
힘을 독점하려는 이들에게
공존이야말로 인생의 미학이라고 말하고 싶다.
만약 이 시대에 가장 비겁한 시인이 있다면
그는 침묵 속에 갇힌 자일 것이다.
묵인과 방관은 시의 적이다.
그 침묵이야말로
공존을 위협하는 폭력이다.
13.
늦은 밤,
광장을 빠져나오며 생각한다.
지난겨울
추위 속에도 자리를 지켰던 사람들
몸을 움직이지 않고 버텼던 사람들,
그들이야말로
공동체의 가장 숭고한 형상이다.
그날 그 광장의 풍경이 남겨진 사진 한 장, 그림 한 점
그것은 분명, 이 시대의 가장 아름다운 시화(詩畫) 일 것이다.
2024년, 작년 노벨문학상은 한강 작가가 받았다.
역사의 아픔을 시적 산문으로 노래했기 때문이다.
올해, 전혀 다른 문학 세계가 최고봉에 올랐다.
그러나 시이든 소설이든
그 밑에는
이 광장의 민중이 써 내려간 노래가 흐르고 있지 않을까.
어둠이 깊어진다.
그러나 시와 노래가 새벽을 불러온다.
시인들이 기상한다.
마침내 우리의
아침이 열린다.
시의 광장
나는 그곳을
문장(文場)이라 부른다.
III. 광장의 시, 문장의 장터
나는 여러 번 광장에 섰다.
그때마다 바람의 방향은 달랐고,
사람들의 표정과 함성도 달랐다.
그러나 한 가지는 늘 같았다.
그곳에는 언어가 살아있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리고,
그 목소리가 다른 목소리와 부딪혀
더 큰 울림이 되었을 때,
그것이 바로 시가 창발하는 순간이다.
시는 종이 위에만 머물지 않는다.
살아있는 사람들의 몸짓과 눈빛,
그것이 시의 터이다.
시의 광장은
단지 사회의 공간이 아니라
문장의 공간(文場)이다.
문장의 문을 통해
우리는 서로를 읽고,
서로의 언어를 걷는다.
광장에는 숱한 얼굴이 있다.
침묵 속에서도 말하는 이들,
상처 속에서도 웃는 이들,
그들의 존재가 내게 한 편의 시가 되었다.
그들의 시가 책이 될 필요는 없다,
도시의 공기와 바람 속에 그대로 남아
우리의 호흡을 따라 스며들면 그만이다.
나는 다시 서재로 돌아온다.
그러나 그 광장은
내 안에 여전히 남아 있다.
언제든 다시 나가
그곳에 남겨진 시를,
삶을 암송하고 기억할 수 있으리라.
시의 광장은 닫히지 않는다.
오늘도,
누군가는 발을 내디뎌
그의 시를 새롭게 노래한다.
이름하여 ‘曠花紋 廣場’
광화문 광장,
“햇살과 꽃으로 글의 무늬를 새기는 너른 터”
여기, 우리의 생존공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