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끝, 선택의 자유에 대한
비망록

-― 사사기 16장 28절, 삼손의 최후 선택에 대한 인문학적 해석

by 푸른킴

신의 침묵, 인간의 자유

나의 이 글은 한 인간이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도 여전히 선택의 자유가 남아있다는 것을 탐구하는 신학적-철학적 에세이다. 성서 속 인물 삼손의 마지막 이야기, 그 장면의 짧은 한마디 기도가 이 글의 중심이다. 알려져 있듯이, 머리카락을 힘의 원천으로 삼은 인간 삼손의 마지막 말은 그가 선택한 자유의 절규라 할 만하다. 단순한 복수의 외침이 아니라, 살아오며 잃어버린 자기 자신을 되찾으려 신과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


그는 나실인이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자기 일생을 신에게 바친 사람이다. 동시에 신이 허락한 출생 비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무슨 이유인지 평생 신과 말을 섞지 않았다. 오히려 신으로부터 멀어졌다. 그러다 죽음을 앞두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말을 건넸다. 그런데 그동안 침묵하던 신은 한 인간의 끝에서도 말이 없다. 그냥 사건으로 응답한다.


이 지점에서 이 이야기는 철학자 키르케고르의 사유와 조우한다. 인간의 삶을 “끊임없는 선택의 연속”으로 보았던 실존 이해와 접점을 갖는다. 키르케고르에게 ‘신 앞에서 홀로 선 인간’이란, 어떤 꾸밈이나 허식도 없이 자신의 내면과 신을 있는 그대로 이으려는 존재다. 삼손의 마지막 기도가 바로, 그 이음을 위한 ‘인간의 최후 표징’이다. 그는 절망 속에서도 자신을 던짐으로써 오히려 자유로워지는 선택을 신에게 보여주었다. 그의 삶에 지리한 장마처럼 이어지던 나실인의 사명이 마침내 끝난 순간이다. 이처럼 인생의 끝은 단순한 소멸이 아니라,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자유의 자리다. 이 글은 그 자리를 해명하려는 철학적 시도다.


이 글은 한 종교적 텍스트를 신앙의 맥락에서 해석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 자신의 한계, 삶의 최후에 직면했을 때도 어떻게 자유를 선택할 수 있는가를 탐구하는 철학적 묵상이다. 삶의 끝에서 마주하는 침묵과 선택, 절망과 결단의 문제는 결국 모든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실존의 물음일 수 있기 때문이다. 삶은 끝까지 흔들린다. 하지만, 마지막 한 번의 선택이 인간을 다시 자유롭게 할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인간의 흔들림은 다른 면에서 희망의 갈대가 완전히 꺾이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땅의 사람은 하늘을 향해 눈을 들 수 있고, 그 눈으로 비로소 자신의 자리, 지금-여기의 자기 실존을 직시할 수 있다.


이렇게 삼손의 마지막 기도는 종교에 갇힌 먼 옛날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가 가야 할 길에 관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인간 상호 간 말은 많으나 소통은 부재한 시대, 신을 향한 기도는 끊이지 않지만, 신의 소리는 듣지 못하는 시대다. 우리가 마블 영웅 같은 삼손의 이야기를 다시 자기 성찰의 이야기로 되묻는 이유이다.


“나의 최후에 나는 누구와 대화할 수 있는가.”



시작보다 끝이 궁금한 장마의 계절

“정말 지루한 장마였다.” 윤흥길의 소설 『장마』의 마지막 문장이다. 이 문장은 단순한 날씨의 묘사가 아니다. 시대의 질곡을 간신히 건너온 인간의 고단한 삶을 상기시킨다. 이념의 대립이 남긴 상처와 피로가 얼마나 길었던가. 문득, 내 기억 속 어느 해 섬진강 지리산 밑 자락, 그 사람들에게도 장마는 길었을 터다. 견딜 만했겠지만 지루하고, 텁텁했을 것이다. 장마란 시작보다 끝이 더 궁금한 자연의 질서다


사실, 사람이 살아가는 자린 어디에나 비가 내린다. 모든 생명은 비를 먹으며 자라고 성장한다. 그러나 모든 식물의 끝은 사뭇 달라진다. 심지어 아무 결실도 얻지 못한 채 씁쓸하게 마감하는 일도 무수히 많다. 마지막 순간, 그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주어진 운명대로 낙화하고, 새로운 씨앗으로 심어질 뿐이다.


인간의 삶도 그럴지 모른다. 하지만, 자연과 다른 점이 하나 있다. 흙으로 돌아가야 할 마지막 순간에 일어날 사건이 고스란히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그 최후의 선택에 대한 궁금증 덕분에 사람들 사이에서 이야기가 생겨난다. 이 이야기는 성장한다. 태어나고, 자라 간다. 그러다 다시 사람들 사이에 씨앗처럼 떨어진다. 장마를 견디며 줄기를 내고, 마침내 꽃을 피운다. 그리고 또 다른 비가 내리면, 그 꽃은 흩날리며 새로운 이야기의 씨앗을 뿌린다.


고대의 많은 이야기는 선택의 궁금증에 대한 문학적 해법이었다. 인간은 언제나, 끝에 이르러서야 자신이 구원될 수 있을지를 묻는다. 히브리인들이 남겨둔 글, <사사기(판관기, Judges)>는 대표적인 예다. 이 이야기에는 열세 명의 사사가 등장한다. 그 마지막 이야기는 힘의 사사 삼손이 주인공이다.


오늘 나는 가을장마 같은 삶의 자리에서 그의 이야기를 다시 읽는다. 그가 맞이한 인생의 최후 선택은 어떻게 이야기되었을까?


열세 번째 사사, 삼손의 최후 이야기

사사기에는 열두 명의 지도자와 한 명의 비극적 인물—모두 열세 명의 사사가 등장한다. 그들은 신의 대리자라는 직책을 가졌지만, 영락없는 인간이었다. 신의 뜻을 들었으나, 신의 경지에는 닿지 못했다. 그들은 각자의 시대와 경계에 갇히면서도 ‘함께 살아내야 할 자리를 지켜야 할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읽으면,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는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왜 존재했는지는 여전히 질문으로 남는다.


신은 ‘사사’라는 직책을 인간에게 수여함으로써, 자신의 통치를 인간의 불완전함과 타협시켰다. 여러 상황 속에서 인간을 이끌었지만, 그 방식은 결국 실패로 귀결되었다. 사사기의 마지막에서 야훼는 스스로 그 방식을 후회한다. 그러나 실패의 연속 속에서도, 그들을 포기하지 않았다. 인간의 불완전함을 포용하는 신의 열정이 그 안에 남았다. 겉으로는 선택받은 자들이 이긴 듯했으나, 결국 승리는 신에게 돌아갔다.


이처럼 신의 통치는 인간의 불완전함 속에서 드러난다. 그 가장 뚜렷한 사례가 바로 사사 삼손 이야기다. 삼손을 마블 영웅쯤으로 기억하는 이들에게 그의 이야기는 낯설다. 그는 인간 사이에서도 솟아오르지 못했고, 신의 영역에서도 뿌리내리지 못했다. 사사 삼손은 마지막으로 갈수록 실패의 길을 걷는 듯했다. 그는 바벨탑의 후예로 현현한 인간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았다. 그러나 사사기의 기록자는 삼손을 단지 실패한 영웅으로 남기지 않았다. 삼손이라는 거대한 인물이 가장 낮고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는 장면을, 냉정하고도 정확하게 남겨두며 그가 마지막에 어떤 선택을 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그의 마지막 선택은 단지 한 인간의 절규만은 아니었다. 그 절규는 그가 선택한 마지막 자유였다. 이로써 한 인간의 이야기가 완성되었다.


삼손 이야기의 핵심구절 16장 18절의 원뿔형 집중법

사사 삼손 이야기는 사사기에서 가장 길고, 구성적으로도 완벽하다. 다른 사사들의 이야기가 시대상황-사역-결과로 단순하게 서술되는 것과 달리, 삼손 이야기는 탄생과 죽음, 결혼과 능력, 경계를 넘나드는 위력과 비밀, 그리고 자기 세계를 완벽히 구축하는 서사가 정교하게 배열되어 있다.


하지만, 이런 완벽한 구조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야기는 점점 실패로 기울어진다. 이런 구성에서 사사기 기록자의 의도는 명확하다. 그의 마지막 순간, 그의 최후 선택을 극적으로 묘사하기 위해서다. 그가 남긴 마지막 대사가 이를 입증한다. 사사기 기록자가 창작해 낸 작품 같은 이 마지막 말은 삼손이 살아온 모든 삶을 응축한다. 특히 신을 멀리 두고 살아온 영웅이 결국 신 앞에 서서 자신의 마지막 선택을 간절히 호소하는 장면이 압권이다. 이 탄원은 그의 인생의 마지막이 지리한 장마처럼 끝날 상황에서 회심을 위한 선택의 자유가 남아있음을 극대화한다.


이러한 삼손 이야기의 가장 큰 특징은 이야기 기록자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는 장면을 클로즈업해서 드라마처럼 서술한다는 점이다. 이 기법은 마치 원뿔이 한 점으로 좁혀지듯, 삼손의 전 생애를 한 구절에 집중시킨다. 이를 ‘원뿔형 집중법’이라 부를 만하다. 이 한 구절이야말로 삼손의 생애를 응축해 시간 너머로 내던지는 블랙홀이다. 사사기 16장 28절이 그것이다.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한글개정)


이 말은 예상하는 대로 준비된 연설이 아니다. 주어진 사건 흐름 속에 자기를 내맡기며 내던져진 말이다. 절규였다. 하지만, 이 말은 즉흥적이라 하기에는 너무 견고하다. 흔들림이 없고, 확신에 차 있다. 감정적 호소 같으나 이성적 결단이었다. 한때, 그는 혼자라도 블레셋을 위협할만한 거대한 태양이었다. 하지만, 지금 두 눈이 뽑힌 채 포박되어 사형을 기다리는 ‘작은 태양’이다. 그의 이름 삼손은 ‘태양’을 뜻하는 히브리어 ‘세메스’를 작고 친근하게 발음한 이름이다. 이 모순어법(oxymoron)은 사사 삼손의 생(生) 전체를 농축한다. 젊은 시절, 그는 스스로 위대했다. 하지만, 살아오는 과정에서 야훼의 세계, 그 질서의 궤도를 알아채지 못했다. 그는 ‘안으로는 강하고, 밖으로는 온유한 자’로 살아야 했지만, 그 방향을 잃었다. 오히려 몸 안은 허술하고, 몸 밖으로는 강한 척하는 삶으로 일관했다.


그런데 그의 생애 끝에 반전이 일어났다. 그는 마지막 순간,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붙잡았다. 앞서 본 사사기 16장 28절은 그의 전 생애를 압축파일처럼 서술한 문장이다. 이 구절에는 삼손의 말할 수 없는 회한과 후회, 다짐, 결단이 박혀있다. 감정에 치우쳤던 그가 이성의 인간으로 거듭나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시점에 야훼는 침묵하고, 그저 지켜본다. 아예 냉정한 응답으로 일관한다. 호소하는 자와 침묵하는 자, 그리고 그 침묵마저 응답이 되는 장면—이 구절은 인간 삼손과 그를 부른 야훼 사이의 거리를 시리도록 선명하게 보여준다.


히브리어 문법의 흔들림과 마지막 자유 ― 사사기 16장 28절의 내적 구조

그런데 이 마지막 말을 히브리어 표현으로 다시 읽으면 눈에 띄는 표현이 있다. 이 구절의 내적 구조는 야훼의 침묵과 삼손의 마지막 자유가 서로 마주 선 자리다.


사16장18절001.jpg 히브리어 성서의 사사기 16장 18절을 문법적으로 재배열한 흐름

이 문법의 결을 따라가면, 이 침묵은 부정이 아니라 허용이다. 야훼의 침묵은 삼손의 선택을 받아들이는 결단으로 드러난다. 문장을 히브리어로 다시 읽어보면 그 내면의 흔들림이 드러난다. 문법은 어그러져 있고, 단어는 반복되며, 리듬은 파열되어 있다. 야훼의 이름을 부르는 방식조차 일정하지 않다. 인간이 마지막 숨결로 쏟아낸 언어의 조각들이다. 그러나 그 어수선한 언어 속에는 이성과 자각의 빛이 비친다. 그는 흔들리면서도 흔들리지 않으려 했다. 그 결단이 곧 그의 자유였다.


(1) 문장 배열의 어그러짐―파열 속의 자각

그의 마지막 심호흡 속에서 마침내 이성이 깨어난다. 삼손은 “진실로 이번만, 하나님!”(’ak happa‘am hazzeh hā’elōhîm)이라 외친다. 그는 굳이 정관사 ‘하-를 붙여 ‘하엘로힘’이라 부른다. 그저 엘로힘이라 해도 될 이름에, ‘하-’라는 접두어를 더함으로써 리듬을 흔든다. 히브리어로는 ‘아크-하-하-하~’로 이어지는, 거친 호흡의 리듬이다. 이 호흡은 단순한 절규가 아니다. 숨이 끊어지는 순간, 자기 안에 남은 마지막 이성을 붙잡으려는 자각의 리듬이다. 그는 신을 부르는 동시에, 자신을 일깨운다. 파열은 혼돈이 아니라 깨달음의 틈이다.


(2) 반복된 호소―낮춤과 회심의 리듬

자기 낮아짐이 곧 자유의 시작이다. 삼손은 이어서 ‘제발, 제발’(nā, nā)을 반복한다. 그의 말은 ‘기억해 달라’, ‘강하게 해 달라’는 간청이지만, 그 속에는 자신을 낮추는 행위가 있다. 그는 처음으로 신 앞에 엎드린다. 앞서 교만했던 언어, 자신만을 믿었던 어투가 완전히 사라졌다. 이제 그의 말에는 절박한 자기 인식의 리듬이 흐른다. “나의 주, 엘로힘.” 이 부름 속에는 항복과 회심이 함께 있다. 그는 자기가 걸려 넘어진 돌을 본다. 그리고 그 앞에 서서 고백한다. 다음 구절에서 그는 다시 “하엘로힘”이라 부른다. 이 어색한 정관사의 반복은 그의 마음의 지속을 증언한다. 어색함이 곧 진심이다. 그는 종이 주인에게 간절히 호소하듯 신에게 말하고 있다. 마지막 문장, “단 한 번으로 원수를 갚게 하소서.” 히브리어로는 ‘복수’와 ‘한 번’이 하나의 단어처럼 결합해 있다. 처음이자 마지막 복수, 곧 자기 생 전체를 건 결단이다. 그에게 ‘복수’란 파괴의 욕망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을 되돌리는 정화의 행위, 자기 생을 다시 신의 질서 안으로 돌려놓는 마지막 몸짓이다. 죽음은 그의 패배가 아니라 회심의 완성이다. 그는 삶을 결단함으로써 자신을 되돌렸다.


(3) 야훼의 침묵―허용하는 응답

신이 말하지 않음도 가장 숭엄한 응답이다. 이제 시선은 야훼에게로 향한다. 야훼는 그의 부르짖음을 듣고도 아무 말이 없다. 그러나 그 침묵은 부정이 아니다. 그것은 허용의 형태로 드러난 응답, 말이 아니라 존재로 내리는 응답이다. 야훼는 삼손의 죽음을 허락한다. 그 허락은 심판이 아니라 포용이었다. 신은 자신이 세운 대리자를 잃음으로써, 인간의 자유를 끝까지 인정했다. 그의 침묵은 방관이 아니라 존중의 형태로 표현된 사랑이었다. 사사기 기록자는 이 장면을 단순히 비극으로 남기지 않았다. 그는 야훼의 침묵 속에 신의 아픔을 새겨 넣었다. 야훼는 개입하지 않음으로써, 인간의 마지막 자유를 보호했다. 삼손은 그 침묵 속에서 비로소 흔들리지 않았다. 야훼는 말없이 그의 결단을 품었다. 그 순간, 침묵은 냉담함이 아니라 응답이 되었고, 삼손의 죽음은 단절이 아니라 귀향이 되었다.


결론적으로, 사사기 16장 28절은 문법의 파열 속에서 인간의 자유를 드러내는 장면이다. 언어의 흔들림은 곧 인간의 내적 자각이며, 신의 침묵은 인간 자유의 조건이다. 야훼의 침묵은 부정이 아니다. 그것은 허용의 형태로 드러난 응답, 즉 말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존재 자체로 현현하는 응답이다. 삼손은 흔들렸지만, 마지막에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가 남긴 말은 절규가 아니라 자유의 언어, 그리고 신이 끝내 침묵으로 응답한 관용의 언어였다.


비극의 원인-소통의 부재

나는 이제 사사기 기록자가 사사 삼손이 남긴 비극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추적해보려 한다. 삼손 생애 마지막 장면에 이르기까지 그가 삼손 이야기를 장황하게 정리해 둔 것을 토대로 보면, 이 28절에서 다른 특징을 더 읽을 수 있다. 삼손 생애에서 삼손은 야훼와 거의 소통하지 않았다는 흔적이다. 일방적으로 야훼의 의지가 삼손을 돕는다. 나실인이었다는 출생 일화부터 그가 머물고 가는 곳마다 야훼의 영은 삼손을 격려했다. 하지만 그것이 무색할 정도로 그는 자기 길로 갔다. 문제는 삼손이 자기 힘의 근원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자기 힘의 근원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인지한다. ‘머리카락’은 그 증거다. 하지만, 그는 평생 하나님과 어떤 말도 나눈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그는 그렇게 사사로 20년, 자기 평생을 살았다. 이 기록은 특별히 반복되고 있다. (15:20; 16:31) 그는 사사 기간 내내 자기 힘으로 자기 길을 따라 자기 세계를 구축한 사사였다.


이 기록에 따르면 삼손은 단 한 번 야훼와 소통할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야훼가 끝내 침묵으로 일관했지만, 오히려 그 침묵이 삼손을 자극했다. 야훼는 삼손의 최후 선택의 호소를 결국, 들어주었다. ‘말은 없으나 행위로 응답한 침묵(practical, performative response)’이었다. 이에 대해 삼손은 인생 최악의 순간에 이르러서야 마지막 자기 마음을 하나님을 향해 간절하게 던졌다. 비록 끝이었지만, 흔들리지 않고 마음을 쏟아냈다. 마지막 단 한 번 소통이었다. 그러니 그가 ‘단 한 번 복수하겠다’라는 말은 어쩌면 ‘단 한 번 내가 나를 돌이킵니다.’라는 의미일 수도 있다.


요컨대, 평생 대화 없는 하나님의 사사, 그것이 사사 삼손이 가진 비극의 시원이다. 그는 신을 알았지만, 신과 말하지 않았다. 소통의 단절은 신과 인간 사이의 문제를 넘어, 모든 인간관계의 원형적 비극이다. 오늘의 세계에서도 인간은 수많은 말을 하지만 서로 침묵할 때가 많다. 기술은 소통을 확장했지만, 상호 이해는 오히려 희박해졌다. 인간 사이가 그러한 것처럼, 신과의 소통도 상상 속에만 있을 뿐이다. 그러니 삼손의 비극은 고대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우리의 서사다.


6. 최후의 선택, 자유

삼손의 마지막 호소는 야훼의 침묵 속에서 응답으로 사건이 되었다. 그러나 그 침묵은 신의 반응이면서 동시에 신 앞에서 단독자로 서있는 인간의 근원적 고독이기도 하다. 사사기 기록자는 왜 삼손의 최후를 이처럼 세밀하게 기록한 이유도 바로 야훼의 침묵과 인간 삼손의 고독이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점을 좀 더 살펴보자.


사사기 기록자가 이 이야기를 치밀한 문학적 기법으로 서술한 이면에는 아마도 후대의 이스라엘 백성이 삼손의 최후를 반드시 읽어야 한다고 확신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이 기록을 통해 이스라엘이 걸어온 길을 반성하고, 앞으로 걸어갈 방향을 예측하기를 기대했던 것 같다. 다음 세 가지 근거가 있다. 첫째, 사사 압돈 시절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이스라엘은 다른 신들을 섬기면서도 야훼를 완전히 버리지는 않았다. 경계는 흐려졌고, 신앙의 방어벽도 스스로 무너뜨렸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평생 흔들리며 자기 길을 갔다.


둘째, 야훼의 대응과 인내의 방식이다. 기록자는 야훼가 그 흔들림 자체를 문제 삼지 않았다고 말한다. 오히려 사사들의 등장은 야훼가 흔들리는 인간을 여전히 포용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이스라엘이 계속해서 야훼를 괴롭히고, 무시하듯 행동했지만, 야훼는 인내하며 기다렸다. 그의 방식은 꾸짖음이 아니라 침묵과 관찰, 즉 멀리서 바라보는 인내였다.


셋째, 야훼의 마지막 기대다. 야훼는 단 한 가지를 기대했다. 이스라엘이 마지막 순간만큼은 흔들리지 않기를 기다렸다. 그 침묵은 방관이 아니라 오래 참음이었다. 이스라엘이 마지막에라도 돌아올 ‘단 한 번의 기회’를 남겨두기 위한 인내였다. 그 기회는 새로운 인생을 약속하지는 않지만, 죽음을 무릅쓰더라도 자신을 야훼에게 고정하는 마지막 결단의 순간이었다.


따라서 이 삼손 이야기에서 기록자는 이 마지막 순간의 가능성을 삼손의 말속에 남겨두었다. 이를 통해 그는 인간이 완전할 수 없음을 알았다는 메시지를 남긴다. 동시에 ‘마지막 한 번의 흔들리지 않음’이 허락되어 있음을 알려주려 했다. 야훼의 침묵은 냉정이 아니라 오래된 기다림이었다. 장마 끝의 햇살처럼, 신의 인내는 말없이 세상을 감싼다. 그것은 끝까지 눅눅해질 인간의 삶을 야훼가 끝까지 인내하며, 인간이 단 한 번 남은 기회에서도 여전히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주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요컨대 기다림은 오늘의 나에게도 유효하다. 신의 침묵은 여전히 내 삶을 감싸고, 나는 아직 대답해야 할 마지막 부름 앞에 서 있다. 그 기다림 속에서 나는 깨닫는다. 침묵은 부재의 증거가 아니라 관계의 상징이며, 응답의 새로운 이름인 것이다.


삼손의 최후 호소, 야훼의 침묵 응답의 철학적 의의

삼손은 야훼를 알았지만, 평소 그 이름을 제대로 부르진 않았다. 신을 기억했지만, 말하지 않았다. 그 침묵, 그 소통 부재로 그의 평생을 보냈다. 그는 전 생애가 야훼의 것이었지만, 야훼를 멀리 두고 자기 손으로 자기 삶을 가꿔왔다. 삼손은 야훼를 알지만 ‘단 한 번도’ 야훼와 소통하지 않았다. 야훼를 모르진 않았지만, 야훼를 더 알 필요도 없었다. 그는 그렇게 자기 생애를 살아왔다.


사사 삼손과 같은 이런 생애는 오늘날 보편적이다. 야훼를 알고, 예수를 생각하며, 거룩한 영을 인식한다는 신앙인들도 사실 신과 합일된 소통된 힘겨워 보인다. 그저 자기 길을 가고, 자기 삶을 살며, 자기 세계를 만들어간다. 야훼의 삶을 잊지는 않았지만, 결코 야훼에게 묻고 답을 듣는 과정을 모색하지 않는다. 그렇게 평생 자기 삶을 일구며 살아가는 길을 신이 도와주길 기대한다. 그 결과도 스스로 예측할 수 있다. 하지만, 한 가지 사실도 명확하다. 누구도 평생 자기 식대로 살다가 마지막에 견고하게 호소해야겠다고 다짐하진 않지만, 마지막에 삼손처럼 간절히 호소할 수밖에 없는 인생이 누구에게나 다가올 수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나는 그날이 오기 전에 기억하려 한다. 그 순간, 나에게 마지막 은혜는 여전히 남아있다는 것을.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누구도 자기 삶을, 타인의 삶을 스스로 평가할 수 없다. 신앙인이라면 특히 그렇다. 우리에게는 다만, 숱한 삶의 자리에서 야훼와 쉼 없이 소통하는 삶이 있을 뿐이다. 그것이 가장 지혜로운, 안전한 삶의 방식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도 괜찮다. 누구에게나 마지막 순간에 호소할 기회는 평등하게 주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인생의 끝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단 한 가지, 선택이다. 그 선택이야말로 신의 침묵 속에서 자신을 되찾는 마지막 행위다. 삼손은 그 침묵 앞에서, 자유를 잃지 않은 존재로서의 자기 실존을 증언했다. 사사기 기록자는 삼손을 통해 끝까지 자유를 선택할 수 있었던 인간, 곧 신 앞에서도 자유로운 인간의 가능성을 이야기로 실증했다.


그러니 할 수 있다면, 보이지 않고 응답이 없다 해도, 야훼를 향한 시선을 고정하고 그와 쉬지 말고 대화하라. 마지막 숨이 다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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