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詩 1–20,
길을 걷는 존재, 그 시언어의 미학

<나의 철학시 1-20 해설>

by 푸른킴
존재를 걷는 언어, 언어로 해석된 길, 길 위에서 다시 태어나는 신학
이 시들은 일상의 작은 관찰, 언어 선택, 시쓰기-철학개념제시-신학적 실천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담으려했습니다.리처드 로티의 '철학은 시가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기도 합니다. 졸시를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존재를 걷는 언어―시의 철학으로부터 시작하다

철학詩 1–20편의 시들은 매일 아침, 한 편씩 작성한 시다. 나의 “걷기”를 철학과 시의 공통 원리로 전환한 언어 순례록이다. 이 시들은 일상의 사건을 통해 “존재와 시간, 신과 인간, 말과 침묵”의 관계를 탐색하며, 삶의 미세한 결들을 철학의 언어로, 철학의 추상을 시의 감각으로 되돌린다. 그리하여 ‘도석(道釋)’의 시학, 곧 길 위의 해석학이자 생활의 형이상학을 구현하고자 했다. 여기서 나의 ‘철학시’는 단지 사유에 머무는 시가 아니라 “사유하는 몸의 언어”, “살아있는 개념의 형상화”이다. 하이데거의 말처럼 “시는 존재의 집이다.”라는 명제를 동양적 생활 감각 속에서 다시 실험해 본 셈이다. 하루의 단순한 행위들—걷기, 차 마시기, 로스팅, 요리, 기도, 추모—이 모두 존재를 체험하는 철학적 행위로 확장될 수 있음을 보이려 했다.


시간의 미학―일상의 순간에서 영원의 깊이로

이 연작의 시간관은 ‘순간’과 ‘영원’의 이중구조에 기반한다. 〈가을 산책〉, 〈어느새 꽃피다〉, 〈비의 고백〉에서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깊어지는 것”으로 나타난다. 카를로 로벨리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에서 말한 “시간의 국소성”이 감각 이미지로 전환된 것이다. 나는 시간을 흐름이 아닌 ‘멈춤 속의 운동’, 즉 ‘사건으로서의 시간’으로 포착하려 했다. “햇살 매달려 언덕 아래로 내달리는 작은 버스”(〈가을 산책〉), “너를 살리고 자신은 사라지는 운명”(〈비의 고백〉), “그 빛바랜 최후의 사진 한 장 지도처럼 품에 담아 다시 떠나는 출발선”(〈인생 사막〉) 은 ‘찰나’가 ‘영원의 문’을 여는 장면들이다.


이처럼 철학적으로 이 시들은 ‘시간의 거대한 현상학’에서 ‘영원을 미분한 미학’으로 이동한다. 각 시는 반복되는 일상의 리듬 속에서 “시간이 사라지는 장소”를 창조한다. 그 장소는 기도, 회상, 음악, 향기, 빛, 바람으로 환기된다. 시간이 아니라 사건이 중심인 세계—그곳에서 인간은 ‘순례자’로, 언어는 ‘표지판’으로 존재한다.

감각의 신학―몸으로 쓰는 신앙의 언어

『철학詩』의 중요한 지점은 미미한 일상의 관찰과 그 속에 담긴 철학을 신학적 주제로 풀이하되, 시적 감각 언어로 재해석했다는 데 있다. 〈기계이별〉의 로스터기 ‘후지 로열 SLR-4’는 단순한 기계가 아니라 ‘불·향기·시간·기억’을 매개하는 제단이다. 로스팅은 ‘불의 예식’이며, 그 과정은 성례전적 변환의 은유다. 〈빈대떡 재활〉의 “추도의 빈대떡 성찬”은 음식, 신앙, 기억, 구원이 같은 구조임을 드러낸다. “맛이란 사람과 함께 사라지는 것일까 싶지만”이라는 질문은 ‘부활’의 소망을 부엌의 일상으로 끌어내린 표현이다. 신앙은 초월의 언어가 아니라 재료의 언어, 삶의 손끝에서 되살아나는 미학적 실천이다. 이러한 감각의 신학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라틴어 Confessiones)과 유영모의 “도통은 생활통”과도 닿아 있다. 신을 멀리서가 아니라 일상의 시간 안에서 몸의 기억으로 경험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철학詩』는 “살아있음이 곧 기도”라는 종교 미학을 제안한다.


언어의 윤리와 시적 정의―말의 회심(回心)

이 시들에 사용된 언어는 도덕적 규범을 설파하기보다 존재의 윤리를 수행한다. 〈주차의 난〉의 “一步滿步, 그대 한 걸음 / 삶을 채울 조각”은 훈계가 아니라 머무름의 윤리다. 나는 언어를 통해 “옳음”을 규명하기보다 “살아냄”을 실천하고자 했다. ‘싸목싸목’, ‘포도시’, ‘성긋한’, ‘투덕투덕’ 같은 우리말은 관계의 온도, 인간적 거리, 세계의 감각을 직접 전한다. 시의 언어는 그저 의미를 담는 그릇이 아니라 호흡하는 삶의 실체다. 그래서 나의 시적 정의(正義)는 분명하다. 시는 ‘삶의 속도를 늦추어 존재가 말을 되찾게 하는 행위’로서, 우리가 ‘말의 회심’을 경험하게 하고, 그 말을 통해 세계가 ‘침묵의 진실’을 드러나게 한다.


미학적 구조―도석(道釋)의 시학

『철학詩』는 의도적으로 자유시, 단가, 산문시, 한시 풍의 결구로 유연하게 엮은 형식을 취했다. 각 시의 끝에 붙는 한문 결구는 장식이 아니라 사유를 생활 잠언화하는 장치다. 예컨대 無秋歌謠(가을 없는 노래), 友步萬里(벗과 함께 만 리를 걷다), 古眞甘徠(오래 묵힌 진리, 달콤한 위로), 煎餅在活(빈대떡 다시 살리다), 燈臺知己(등대처럼 자신을 안내해 주는 벗), 人生莫章(인생은 멈출 수 없는 소설) 등은 의미상으로는 ‘닫힘’ 같지만, 구조상으로는 여운을 남기는 열린 마침표다.


한편, ‘도석’이란 길을 걸으며 사유하고, 사유를 걷기 위해 쓰는 행위—곧 길 위에서 해석한다는 뜻이다. 나의 철학시는 바로 그 길 위에서 존재와 언어가 다시 만나는 순간을 기록한 여정이다. 길을 걷고, 깨달음을 언어로 해석하며, 다시 삶으로 걷는 순환의 시학. 따라서 이 시들은 단순한 시 모음이 아니라 ‘철학적 수행’의 기록이자 ‘삶의 언어학 실험’의 결과다.


존재의 미학―‘인생 사막’의 종결과 시작

연작의 마지막 〈인생 사막〉은 전체를 결집하는 철학적 총결이다. 2024년 10월 9일, 아름다운 예식 속에서 결혼한 부부를 기억하며 그들의 길이 “영원의 사막순례”로 이어지길 기원했다. 사막은 부정의 장소가 아니라 하늘의 길을 향해 걷는 과정에서 피할 수 없는 통과의식의 공간이다. 사막은 고통의 장소가 아니라, 의미의 침묵이 다시 말을 배우는 공간이다. “그 빛바랜 최후의 사진 한 장 / 지도처럼 품에 담아 / 다시 떠나는 출발선”은 끝에서 시작이 열리는 장면이다. ‘출발선’은 종말의 자리이자 재생의 시작점. 이것이 나의 철학詩가 제시하는 존재의 미학(ontological aesthetics)—삶은 단절이 아니라 변주의 연속이며, 모든 끝은 다른 시작의 문턱이라는 뜻이다.


결론 ― 시, 일상과 철학, 신학이 만나는 헤테로토포스

철학詩 1–20편은 시, 철학, 신학이 분리되지 않음을 증언한다. 여기서 철학은 개념이 아니라 행위이며, 신학은 초월의 관념이 아니라 실존의 체험이다. 그리고 시는 둘을 잇는 언어의 순례다. 평범한 일상의 길이지만, 동시에 사유가 순례하는 길—사순로(思巡路)이다. 나는 그 길을 걷는다.


오늘도 창밖에 비가 내린다. 서재에서 나는 다시 나에게 묻는다. “비가 닿으면 세계는 죽어가는가, 살아나는가?” 이 질문 자체가 이미 신앙이며 시학이고 철학이다. 리처드 로티의 물음—“철학은 시가 될 수 있는가?”—에 나는 기꺼이 긍정한다. 그 대답의 결과인 이 철학詩 연작은 여느 시인들의 태도를 본받아 나 자신에게 던진 물음이 빚어낸 스무 개의 응답이다. 하루의 조각들이 모여 하나의 영원을 증언할 때, 나는 비로소 알게 된다. 걷는 것은 사유하는 일이며, 사유하며 쓰는 일은 존재를 성찰하는 일, 그리고 그 성찰은 나의 길이 그 안에서 그분의 길로 이어짐을 믿는 일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나는 전통적 관념의 ‘철학시’와는 다른, 일상의 경험에서 출발해 철학/신학의 질문을 제기하고, 다시 실천으로 되돌리는 도석—길의 해석—을 시도했다.


폭넓게 보자면, 하이데거의 Unterwegs zur Sprache(언어로 가는 길)처럼 “말하기 이전, 나를 앞서는 언어의 길”을 더듬고, 가다머의 Verstehen als Weg(이해로서의 길)처럼 해석자와 대상의 상호 교섭으로서 이해를 지향하는 나의 해석학적 분투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실존 성찰과 행동의 철학시’의 가능성을 열어 보려 했다.


결국, 시는 삶의 속도를 늦추어 존재가 말을 되찾게 하는 행위다. 나의 시들은 시간과 존재의 현상학을 일상언어로 구현하고(형이상학), 도석에 따라 걷기, 기억, 언어의 순환 구조를 실현하며(미학), 일상의 감각으로 신학적 실천을 회복하고(윤리), 일상언어를 철학화하고 잠언화하며(언어철학), 부활, 돌이킴, 희생의 신비를 몸의 감각으로 번역하려는 시도다(신학). 이처럼 나의 철학시는 형이상학적 사유를 미학적 실천으로, 윤리적 체험을 신학적 믿음으로 변환하여, 일상의 언어를 존재의 기도로 바꾸는 작업이다.


결론적으로 이 시들은 “삶을 시로 걷는 자의 사순로 기록”이며, “말의 성육신을 더듬는 신학자의 보고서”다. 나의 철학詩의 세계에서 언어는 더는 개념 설명의 도구가 아니라, 세계를 새로 낳는 문학의 기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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