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기록자, 기록 비판자의 가치 (2-2)

어느 역사 기록에 대한 냉정한 이해

by 푸른킴

1. 글과 권력, 그리고 아래로부터의 비판 권력

글은 언제나 흔적에서 시작되었다. 손끝이 점토판 위에 남긴 자국, 갈대 깃펜이 종이를 스치는 흔적, 돌이나 나무에 새겨진 기호가 그 출발이었다. 그 흔적은 곧 “나는 여기 있었다”라는 자기 선언이자 존재의 표지였다. 그러나 그것은 곧 개인의 흔적을 넘어 공동체의 규칙으로 변모했고, 글은 세계의 질서를 새기는 장치가 되었다.


그러나 글은 단순한 소통 수단이 아니었다. 읽고 쓸 수 있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 사이의 보이지 않는 경계는 곧 권력의 분할로 이어졌다. 메소포타미아의 점토판, 이집트의 상형문자, 수도원의 라틴어 경전은 모두 글을 전유한 자들의 지배 장치였다. 법전과 경전, 행정 문서는 곧 권력을 제도화하는 장치였다. 글은 “타인 위에 군림하려는 욕망”과 “존재를 억압하려는 힘”을 품어온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글은 지배만을 위해 쓰이지 않았다. 법전이 있던 자리에 공공의 선언문이 등장했고, 해석이 독점될 때마다 저항하듯 새로운 해석이 나타났다. 글은 언제나 권력을 세우는 도구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전복하는 힘이었다.


2. 비판적 글 읽기의 필요성

따라서 글쓰기를 사유한다는 것은 곧 권력의 속을 성찰하는 일이다. 권력의 글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흔적을 남기고 규칙을 만들고 언어를 소유하는 과정에서 자기 힘을 행사한다. 그 힘은 억압을 강화할 수도 있다. 하지만, 글은 해방의 가능성을 열 수도 있다. 문제는 어떤 글을 쓰고, 누구의 언어를 기록하며, 그 글이 누구의 권력이 될 것인가 하는 비판적 질문의 여부다.


이 지점에서 기록 비판자의 가치가 드러난다. 역사 기록은 기록자의 손에서 완성되지 않는다. 기록자의 흔적을 해체하고 다시 읽는 비판자의 목소리 속에서 비로소 역사의 진정한 의미가 완성된다. 시인 김지하가 1970년 「사상계」에 발표한 「오적」은 권력자의 기록에 맞서 저항의 언어를 던짐으로써, 비판자가 지닌 사회적·역사적 위상을 잘 보여준 사례다.

글에 대한 이러한 문제의식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날마다 수많은 보고서, 선언문, 성명서를 접한다. 그것들은 단순한 의견 표명이 아니라, 특정한 질서를 정당화하려는 권력의 장치다. 따라서 과거의 기록을 오늘의 글로 비판적으로 읽어내는 일이 중요하다. 글의 의미는 고정되지 않으며, 독자가 어떤 시선으로 다시 읽는가에 따라 억압의 도구가 되거나 해방의 언어가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고찰할 수 있는 최근 사례가 통합 측 교단이 발표한 「퀴어신학(동성애, 양성애, 성전환)에 대한 연구보고서」다.

3. 역사 기록에 대한 비판적 글 읽기 ― 「퀴어신학 연구보고서」

이 보고서는 표면적으로는 연구라는 형식을 취해 발표했지만, 실제로는 특정한 권력의 결론을 확인하는 자기 선언문에 가깝다.


첫째, 보고서는 퀴어신학을 오직 ‘이단성 여부’라는 틀에 가둔다. “퀴어신학에 대한 상세한 논의보다 보편적 문제점을 다루겠다”(보고서 2쪽)라는 문장은 이미 권력의 언어를 드러낸다. 퀴어신학을 둘러싼 논쟁이 찬반으로 첨예하게 대립하는 현실에서 ‘보편적 문제점’이라는 표현은 객관적 진술이 아니라, 미리 정해진 결론을 합리화하는 장치다.


둘째, 보고서는 루터와 칼빈의 ‘문자적 해석’을 단순 인용하며 현대 신학적 해석을 배제한다. 그러나 최근 연구에 따르면, 종교개혁자들의 해석은 단순히 글자 의미에 머문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의 맥락과 중심 주제를 고려한 것이었다. 보고서는 이를 단순화하여 다양한 해석학을 ‘위험한 상대화’로 규정한다. 이는 학문적 토론이라기보다 교단 권력을 뒷받침하는 선언이다.


셋째, 보고서는 참고문헌을 축소한 듯 보인다. 주디스 버틀러의 『Gender Trouble』(1990), 마르셀라 알트하우스-리드의 『Indecent Theology』(2000) 같은 퀴어 신학의 전환적 저작이 전혀 다뤄지지 않았다. 또한, 국내에서 발표된 유연희의 “퀴어신학: 생명을 살리는 종교와 학문을 위하여.” 「한국 여성 신학」 93 (2021)같은 글도 검토하지 않은 듯 하다. 시대적 주제에 비해 탐구의 범위가 제한적이다. 이런 저작이 빠진 것은 단순한 누락이 아니라, 특정 담론을 의도적으로 배제한 선택적 편집의 결과다.

이처럼 보고서는 연구라기보다, 결론을 미리 설정하고 이를 입증하는 최소한의 근거만을 배열한 선언문이다. 따라서 이 문서를 비판적으로 읽는다는 것은, 그 안에 스며 있는 권력의 흔적을 해체하고 새로운 대화의 가능성을 여는 작업이다.


4. 이 보고서를 대하는 태도

기록자가 남긴 기록의 의미를 어떻게 완성할 것인가는 비판자에게 남겨진 몫이다. 이를 제대로 실현하기 위해서는 다음 세 가지 태도를 고려할 수 있다.

첫째, 배제된 목소리를 찾아내기: 보고서가 외면한 버틀러, 알트하우스-리드, 유연희 등 학자들의 연구를 참고하여 주변화된 이들의 목소리를 다시 불러와야 한다.

둘째, 권력적 언어 의심하기: ‘보편적’, ‘위험하다’와 같은 단정적 표현 속에 숨어 있는 권력의 기준을 찾아내야 한다.

셋째, 함께 대화의 장 열기: 보고서가 차단한 해석학적 가능성을 비판하면서도, 최근의 신학적 다양성을 반영한 학문적 대화와 교회적 토론의 자리를 마련해야 한다.


이러한 태도는 비판적 글 읽기가 개인의 능력만이 아니라 공동체의 역할도 중요하다는 것을 함의한다.

5. 비판자의 공동실천적 책임

앞서 언급한 대로, 기록자는 기록으로 흔적을 남기지만, 역사는 그것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비판자가 그 흔적을 다시 읽어내고, 억눌린 목소리를 되살려내며,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야 한다. 오늘날 교회와 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은 바로 이 비판적 공동체의 실천이다. 글이 지배의 도구가 아닌 해방의 가능성으로 쓰이도록 지켜내는 것, 그것이 곧 기록 비판자의 책임이며, 우리가 감당해야 할 시대적 과제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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