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장을 걷는 기도
<걷는 기도 詩 3. 광장 순례〉는 2024년 12월 3일 ‘계엄령 선포’라는 정치적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그 사건을 단순히 ‘비판’하거나 ‘기록’하려는 시가 아니다. 이 시는 폭력의 언어가 지배하는 시대 속에서 “시의 언어가 어떻게 기도가 될 수 있는가”를 실험하고 싶었던 나의 희망을 담고 있다. 즉, 현실참여의 언어가 아니라, ‘기도의 윤리’로 확장된 참여시학의 언어다.
1. 시의 첫머리―침묵의 기도로 시작되는 저항
“오늘 슬프나 버틸만한 / 생각 깊어진다.”
이 첫 행은 감정의 폭발 대신, 버티는 내면의 사유를 택했다. ‘버틴다’는 단순한 인내가 아니라 양심의 저항에 닿아 있다. ‘여의도 광화문 길바닥 찬바람’이라는 구체적 장소는 내가 머물렀던 지난겨울의 냉혹한 현실을 상징한다. 그 냉기 속에서 나는 자주 물었다.
“쿠오 바디스 Quo vadis / 당신은 어디로 가시나요.”
시의 끝에는 이 물음이 멕시코와 미국 국경을 넘어야 하는 이민자들의 애환이 담긴 ‘돈데 보이’로 변주되었다. 이 물음들은 하나는 문학에서, 다른 하나는 현실에서 들려오는 작은 실존의 외마디 같다. 하지만, 사실은 그 작은 함성이 모여 역사적이며 시학적인 질문이 되었다. 베드로의 회심을 떠올리게 하는 이 문장은, ‘신이 어디로 가는가’가 아니라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를 묻는 존재적 반문으로 변주된다. 따라서 이 시의 출발은 정치적 발언이 아니라, 인간의 영적 진로(進路)를 탐구하는 묵상시로 전환되려는 의도를 품고 있다.
2. 중반―예언자의 음성으로 드러나는 시대 비판
시의 중반부는 예언자의 어조를 따른다.
“너, 정치여―”
이 한 문장은 고대 히브리 시인들의 예언자적 발성을 흉내 낸 것이다. 나는 이 대목에서 ‘분노의 직설’과 ‘시적 비유’ 사이의 긴장을 유지하려 했다. 정치 권력의 위선을 단죄하면서, 그것을 개인의 탐욕이자 인간 본성의 타락으로 치환하고자 했다.
“아담과 하와의 후예.”
이 짧은 한 줄이 시 전체의 축이다. 나는 구조적 부패를 불가항력이라 말하는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동의하지만, 그것이 단순히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죄의 유산’으로 이어지는 인간학적 현실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다. 결국, 이 시의 ‘너’는 나 자신이다. 그러므로 나의 비판적 어조는 원망이 아니라 참회의 음성이다.
“기계처럼 멀뚱멀뚱, AI처럼 투석투석”
이 표현은 현대 문명 속에서 스스로 초래한 자기소외의 압축된 은유다. 설교가 아니라 시의 리듬으로 말하고자 했다. 설교는 윽박이 아니라 언어의 리듬을 따라 진동하는 사유의 파동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풍자도 냉소도 아닌, 언어의 속살을 빚어내는 시적 사유가 내가 지향한 바였다.
3. 전환―‘그러나’로 시작되는 회심과 연대
“그러나 / 여기,”
이 ‘그러나’는 시의 구조를 바꾸는 전환점이다. 앞서 냉철한 고발의 어조가 연민과 연대의 찬가로 변한다. 광장의 공동체, 그 사람들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이전까지 나의 언어가 분리와 비판의 기조였다면, 이제부터는 포용과 공감의 문법으로 넘어가려 했다.
“찬바닥에 마음을 쏟아붓는 청년, / 민주주의 절차를 기다리는 어른, / 촛불 아이…”
이 장면들은 내가 광장에서 실제로 보았던, 다성적(多聲的) 성가의 합창과도 같았다. 광장은 나에게 여전히 하나의 성소(聖所)다. 서로 다른 세대와 계층이 한 자리에 모여 오색빛 합창을 이루는 종교적 처소였다. 나는 그들을 “신로(神路)의 순례자”라 부르고 싶었다. ‘신로’는 종묘의 ‘신이 다니는 길’을 의미하지만, 내 시에서는 ‘신의 길’이자 ‘믿음의 길(信路)’로 중층화된다. 즉, 신의 길을 인간이 걷고, 인간의 길을 신이 함께 걷는다는 종교적 상상력을 담았다. ‘광야 같은 신의 길, 믿음의 길’이라는 구절은 서울의 특정한 광장을 넘어, 햇빛이 쏟아지는 광야의 시공간, 즉 인간의 순례와 신의 동행이 이루어지는 시간으로 확장된다.
4. 시의 마지막―“기다리지 않아도 겨울은 끝난다”
이 마지막 문장은 시 전체의 윤리적·신학적 결론이다. ‘겨울’은 단순한 계절의 표상이 아니라, 억압과 닫힘의 은유, 곧 계엄의 계절이다. ‘기다림’은 능동적 쟁취의 수단이 아니라, 수동적 신앙의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나 그 기다림조차 무력해질 때가 있다. 그때 필요한 것은 인간의 손이 아닌 신의 개입, 신의 결단이다.
“기다리지 않아도”
라는 말은, 신이 공의와 정의를 더 이상 지체하지 않기를 바라는 탄원과 기도다. 이 문장은 신의 시간(카이로스)과 인간의 시간(크로노스)이 만나는 순간을 포착한다. 겨울을 기다리는 자는 단순히 인내하는 자가 아니라, 겨울이 지나가는 길목을 찾아 걷는 자다. 그 걷기가 곧 자유로 나아가는 기도의 행위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봄은 오는 것이 아니라, 걷는 자의 발걸음으로 이미 만들어진다.”
5. 형식과 언어 ― 산문시의 구조와 기도의 리듬
이 시는 산문시 형식이지만, 각 행의 리듬과 여백은 명확한 낭송의 구조를 가진다. ‘단행’과 ‘숨/쉼표’는 기도문의 호흡과 일치한다. 이 시는 읽히는 시이자, 들리는 시다. 즉, “광장의 낭송시”에 적합하다. 특히 “청계 따라 전진하며”라는 구절은 현실의 공간을 언어의 리듬 속에 끌어들인다. ‘청계’는 한국 현대사의 상처와 회복을 동시에 상징한다. 그 지명이 시의 구체성을 강화하고, 추상적 선언을 살아있는 풍경으로 바꾼다.
6. 종합 ― 걷는 시, 기도하는 언어
〈걷는 기도 詩 3. 광장 순례〉는 부족하지만, 민주주의와 신앙, 개인의 윤리와 공동체의 책임, 시와 기도의 경계를 넘나드는 시도였다. 나는 ‘걷기’를 행위적 은유로 삼았다. 말로만 믿지 않고, 몸으로 믿는 신앙을 보여주고 싶었다. 민주주의는 제도나 투표의 형식 속에서가 아니라,
“추위에도 서로 둥글게 얼싸안으며
깃발 높이 올리는 사람들”
의 몸짓 속에서 살아 있다고 믿는다. 이 시는 정치저항시라기보다, 걸으며 발견한 언어로 드리는 기도시, 즉 시적 예전(禮典)에 가깝다.
7. 결론
〈걷는 기도 詩 3. 광장 순례〉는 저항의 시가 아니라, 희망의 시다. 그 희망의 형식은 구호가 아니라 걸음 속에 있다. 이 시는 성찰적인 사회참여시이자, 현실적 신학의 영성시(靈性詩)로 읽히기를 바란다. 내가 바라는 광장은 더 이상 정치의 현장이 아니라, 신의 발자취가 스며든 길, 인간의 순례가 신의 침묵을 깨우는 자리다. 그곳은 평화롭고 자유로운, 차벽 없는 광장이어야 한다. 그렇다.
“기다리지 않아도 겨울은 끝난다.”
이 문장은 위로의 말이자 신앙의 선언이다. 희망은 드러내려는 자에게만 보이는 선명한 신기루다.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걷는 자의 믿음이 만든 새 계절’, 민주주의와 신앙이 손을 맞잡는 시대의 봄을 예언하는 작은 함성이다. 그리고 나는 덧붙이고 싶다.
“당신이 신학에 깃든 삶을 산다면, 당신의 언어는 오늘도 시로, 문학으로 창발해야만 한다."
누군가 말했다.
"옛 언어를 시대의 언어로 창발하지 않는 일은 게으른 사역같다."
라고.
나도 동의한다. 어쩌면 이 문장은 나의 시적 신앙 고백이자, 시대를 향한 시학의 결의일 수도 있다. 시를 걷는 일, 언어를 창발하는 일, 그것이 곧 나의 철학이며, 신앙이며, 오늘 나의 작은 기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