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 거류자의 기쁨

― 야곱의 130년 세월의 시간 철학적 함의

by 푸른킴
“나의 떠돌아다닌 곳의 해의 날들이 130(년)입니다.”
―「창세기」 47장 9절 a


우리 공간은 우리의 길로

여름의 끝을 알리는 매미 울음이 가을 아침에도 요란합니다. 비는 그쳤고, 빗소리는 흐르는 물과 함께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집이든 서재든 내가 머물기 딱 좋은 공간이 있다는 사실이 새삼 감사했습니다.

오래전, 둘째 아이가 우리가 이 집에서 얼마나 살았는지 계산해 보더니, 정작 하고 싶은 말을 슬쩍 덧붙였습니다.


“새로운 곳으로 가면 좋겠다.”


그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나는 말해주고 싶었습니다. 우리가 함께 머물러 온, 이 공간은 가족의 생이 흘러온 소중한 증거라고. 사실 거의 20여 년을 사는 이 집에는 우리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함께 담겨 있습니다. 이곳은 단순한 ‘장소’가 아니라 경험과 기억의 축적, 앞으로 새 추억이 쌓여갈 시간의 응집체입니다. 이제는 아이도 그 의미를 알아주는 듯해 마음 한쪽이 따뜻해집니다.


집이라는 공간은 가족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사건과 기억의 축을 따라 농축된 시간 응축체입니다. 이 공간이 그대로 여기 있다는 것은 우리가 행복하게 걸어온 시간의 흔적이며, 앞으로 걸어갈 길에 대한 전망입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이사보다는 조금 더 머물고 싶은 것이 솔직한 바람입니다. 집은 단순한 장소가 아니라, 함께 걸어온, 걷고 있는, 걸어갈 ‘길’입니다.


길은 다시 희망의 공간으로

길은 걷는 이에게 언제나 희망의 공간입니다. 과거·현재·미래를 불문하고 길 위에서는 불가피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몸 하나가 감당할 만큼만 짐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 한 번은 가족 여행을 준비하며 큰 가방을 꺼내 이것저것 담다 보니, 가방은 금세 가득 찼습니다.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무엇을 넣을지가 아니라 무엇을 남겨둘지가 더 어려운 고민이 됩니다. 모든 것이 필요해 보이지만, 다시 보면 대부분은 없어도 되는 것들. 이 이중적 감정 속에서 떠남의 의식이 시작됩니다. 이런 실랑이는 길로 나서는 모든 여행의 필연적인 준비입니다.


여행은 이사와 다릅니다. 이사가 상시 정주자가 되기 위한 절차라면, 여행은 임시 거류자의 삶에 가깝습니다. 떠났던 자리로 다시 돌아올 시간을 생각해야 하기에 여행은 과거와 미래가 맞닿는 사건이 됩니다. 이사처럼 공간을 완전히 바꾸는 것이 아니라, 같은 공간으로 귀환할 가능성을 품습니다. 그래서 임시 거류자의 시간은 직선이라기보다 사건들의 복합체이며, 그 사건 속에서 자기 존재를 재정위 하는 실존의 문제가 됩니다. 이 이야기는 현대만의 문제가 아니라, 오래전 야곱의 서사에서도 들을 수 있습니다.


야곱의 나그넷길

생의 말년에 타국의 통치자 앞에 선 야곱은 자신의 삶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나의 나그넷길의 세월은 130년입니다.”


나는 오래도록 이 ‘나그넷길’이라는 우리말 표현에 머물렀습니다. ‘나그네’와 ‘길’이 이어 붙은 이 말은 정착지를 향한 단선적 길이 아니라, 방황과 헤맴이 응축된 존재 전체를 가리킵니다. 이상하게도 그 말은 알 수 없는 부러움과 동경을 불러일으켰고, 내 삶을 광야로 내몰 듯 흔들었습니다.


그의 ‘나그넷길’은 내 삶과도 교차했습니다. 그 표현을 곱씹을수록 야곱의 속살을 더 들여다보고 싶어 졌고, 때로는 그의 서사가 추동력이 되어 나를 관통해 지나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종종 정해진 목적지 없이 걷는 수요 걷기를 염두에 두었습니다. 내 삶에 의미 있는 균열이 일어난 것입니다.


나그넷길 인생의 보편성

그렇게 보면, 회심이란 삶의 균열을 허용하겠다는 자기 성찰의 의지인지도 모릅니다. 순간처럼 스쳐 오지만 생을 바꾸어 놓는 그 균열. 야곱의 ‘나그넷길’이라는 행동방식이 내 삶에 들어온 순간, 화석처럼 굳은 습관에 금이 갔습니다.


그날 이후 나는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삶은 나그넷길이다”라는 명제와 “삶은 떠돌아다니는 것의 연속이다”라는 말은 결국 같은 사실을 가리킨다고. 그 사실이란 길(이동)과 장소(머묾)의 변증법적 조화입니다. 우리는 이동과 머묾의 긴장 속에서 살아갑니다. 이 틀에서 야곱의 고백을 다시 들어봅니다.


“나의 떠돌아다닌 곳의 해의 날들을 모으면 130년입니다.”


이 말은 단순한 표제어가 아니라 미세한 생활의 방식을 드러냅니다. 짐을 풀고, 싸고, 잠시 머물다 다시 떠나는 과정을 130년 동안 반복했다는 뜻. 비유적이면서도 동시에 매우 사실적입니다.


다시 말해, 야곱은 길과 공간을 오가며 보낸 130년의 ‘시간’을 나그넷길이라 부른 것입니다. 그 세월은 단순한 물리적 나이가 아니라, 버릴 수 없는 최소의 짐만으로 걷고 머문 자기 성찰의 시간이라는 의미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노년에 이르는 동안 그는 이해 가능·불가능, 예측 가능·불가능한 수많은 사건을 그의 몸에 각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그의 나그네 삶은 고립된 낙오가 아니라, 세계와 자신을 잇는 길 위의 분투였습니다.

이것이 가능했던 까닭은 그가 길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형 에서에게서 장자권을 속여 빼앗은 뒤 그는 길 위로 던져졌고, 그의 삶은 목적지를 향한 직선(way)이 아니라 장소(place)들의 총합이 되었습니다. 그는 단순히 시간을 보낸 것이 아니라, 시간성을 살아낸 사람입니다. 선명한 것은 공간의 출입이 아니라, 공간과 공간을 잇는 길이었습니다. 130년은 바로 그 시간성의 고백입니다. 결국, 그는 이방 땅 이집트까지 밀려들어 갔습니다. 길의 끝에서 도착한 그 공간은, 어쩌면 비운의 장소였을지도 모릅니다.


나그넷길에서 나그네 시공간으로

그렇다면 내 삶에서 길로 이어진 시간은 무엇일까요? 길에 자신을 맡긴 이에게 공간은 언제나 ‘잠시’라는 시간제한에 걸려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곳에서 저곳으로 오갈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정주 자체가 아니라, 길 걷기를 삶의 한 축으로 여기는 이에게 정주성이 때로 안주 욕망으로 변한다는 점입니다.

길을 걷는 이는 ‘시간 중심’으로 살아갑니다. 길 위의 삶은 공간보다 시간이 더 중요한 실존의 이유입니다. 인류는 오래전부터 생의 시간을 늘리고자 했습니다. 한계가 분명해지자 욕망은 움직이지 않아도 되는 공간의 확보로 옮겨갔고, 모든 것을 거기에 쏟아부었습니다. 이제 머물 곳만 확보되면 길로 나가지 않아도 된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야곱의 130년은 바로 이런 정주욕망과 순례 의식이 동거하는 시간의 증거입니다. 그는 생을 돌아보며, 인간이 시간의 불가항력과 공간의 확보 가능성 사이에 놓여있음을 숫자로 들려줍니다.


시간성에 근거한 야곱의 130년: 상시 정주자 vs. 임시 거류자

야곱의 130년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존재와 시간을 되묻습니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시간은 존재를 공간적으로 재는 기준이 아니라 존재가 스스로 드러나는 방식입니다. 그는 미래·과거·현재를 각각 앞서 달려감(죽음을 향한 가능성의 선취), 되돌아옴(내가 되어온 것의 수용), 마주침(지금-여기에서의 대면)으로 읽어냈습니다. 이 세 차원이 하나로 얽힐 때, 우리는 ‘고유한 시간성’ 속에서 실존적으로 살게 됩니다.


야곱의 130년은 이 시간성의 통일을 고대의 언어로 증언합니다. 그의 삶은 과거를 짊어지고, 미래로 걸어가며, 현재를 온몸으로 맞닥뜨린 실존의 시간이었습니다.


그의 생애는 한 곳에 머물지 못하고 쫓기고 피해야 했던 시간이기도 합니다. 그중에서도 창세기 32장은 가장 극적인 순간입니다. 이름 모를 존재와 씨름하던 얍복 나루(훗날 그가 ‘브니엘’이라 이름한 곳)의 밤, 그는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얻습니다. 극도의 불안 속에서 자기 정체를 확인했고, 동틀 무렵 미래의 자신을 향해 다시 길을 떠났습니다. 그 이름은 머무름의 보상이 아니라 떠남의 시작이었습니다. 요컨대 야곱의 130년은 한 사건(브니엘)의 현재화가 생의 시작과 끝 사이에서 죽음을 향해 전진하는 실존을 끝없이 이어준 시간성의 실증입니다. 그는 상시 정주자가 아니라 임시 거류자로서의 실존을 드러낸 것입니다.

‘상시 정주자’는 마지막까지 자기 자리만 지키려 합니다. 길 위로 나가는 순간을 패배로 여깁니다. 그러나 야곱의 예에서 보듯, 야훼의 질서를 재현하려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그 길로 나가야 합니다. 무방비의 위협과 마주하고, 정주욕망과 싸우며, 그 욕망에 자신을 굴복시키지 않습니다.


푸코가 말한 헤테로토피아는 사회의 중심이 아닌 변두리에서 새로운 질서를 꿈꾸게 하는 이질적 공간입니다. 야곱의 얍복 강가는 바로 그런 자리였습니다. 익숙했던 광야가 낯선 공간으로 바뀌는 그 변두리에서, 그는 빛의 세계로 전진하는 미래를 끌어당겼습니다. 이곳에 잠시 머무는 거류자는 유랑민이 아닙니다. 한 공간의 질서를 다른 공간으로 이행시키는 책임 있는 행위자입니다. 다시 짐을 싸고 풀며, 공간과 공간 사이의 길을 묵직하게 옮깁니다. 머무는 곳을 통념에 갇히지 않은 저항의 공간으로 재창조하는 고통을 감당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의 삶은 불안정하되 불행하지 않습니다. 기존 질서에 균열을 내고,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가는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어진 공간에 잠시 머물다, 언제든 길로 나섭니다. 공간은 정지된 물체가 아니라 살아있는 시간의 흐름을 담는 그릇입니다. 삶의 지속성으로 채워지는 시공간입니다.


임시 거류자의 삶으로

나는 오늘 아침, 길 위로 나서야만 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평안하길 구합니다. 천막 앞에서 머뭇거리는 이들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기를, 낮고 거친 생을 묵묵히 이어가는 이들의 숨결이 지켜지기를 기도합니다.


길로 나서야 한다는 당위를 말하면서도, 정작 그 천막 앞에 서기를 두려워하는 나 자신을 봅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묻습니다. 나는 과연 길 위의 사람인가. 하지만,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닙니다. 시간성의 관점에서 유한한 인간은 영원의 시간 안에서 언제나 불안한 임시 거류자입니다. 야훼의 사람은 필연적으로 임시 거주자입니다. 어디서나 자신을 멈춰 세우고, 어디서나 다시 떠날 줄 알아야 합니다. 상주하는 자리가 ‘오만한 자의 자리’가 되지 않도록, 기꺼이 공간과 장소를 떠날 태도가 필요합니다.


나도 내 삶에 길 걷는 나그네, 임시 거류자의 영성으로 강력한 균열이 일어나기를 허용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삶의 균열은 불안이 아니라, 기쁨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그 기쁨이야말로, 시간이라는 틀 안에서 임시 거류자가 누릴 가장 깊은 자유이며, 우리 안에 새겨 주신 ‘살아있는 시간성’의 증거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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