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저항의 계절과 작은 실천

-이 계절에 글을 쓰는 이유와 그 방향에 관하여

by 푸른킴

“사회적 공동 기억은 과거 회상에 머무르지 않는다. 정치적 방관과 위선적 망각에 맞서는 공적 존재증명이며, 고통을 외면하지 않되 정의를 추구하고, 치유를 위해 선택하는 책임 있는 망각을 포함한다. 동시에 자유와 권리를 압박하는 권력에 대항하는 공동체 실천 윤리다.”




개인의 아픔과 사회의 슬픔이 만나는 자리

시인 T. S. 앨리엇(T.S. Eliot)은 그의 시 <황무지>를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이 애절한 문장에는 시인의 ‘개인적 상처’가 들어있습니다. 그 상처를 전장에 나간 지인의 부고로 읽으려는 해석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적 상흔은 개인의 서정에 머물지 않고 시 전체에서 문명적 폐허를 아우르는 감각으로 확장된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
죽은 자의 매장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기억과 욕망을 뒤섞어,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중략]
-엘리엇, 『황무지』(황동규 역, 2017, The Waste Land, 1922) 중 일부.


시인은 이 개인의 아픔에 사회적 슬픔을 이어 붙였습니다. 당시 1차 대전 전후 유럽은 희망 없는 세계였습니다. 시인의 시선은 그 어두운 세계에서 어떻게든 살아가야만 하는 삶에 닿았습니다. 그것이 ‘잔인하다’라는 것입니다. 엘리엇이 남긴 이 시구는 시인 개인의 감정을 훌쩍 넘어서 그가 살았던 시대의 밑바닥에 흐르던 깊은 애환을 분출한 흔적으로 보입니다. 과잉처럼 보이는 서정이 오히려 세계를 냉정하게 응시하게 하는 역설적 힘이 됩니다. 이 문장이 그의 시대 못지않게 지금 우리 시대에 더 실감 나는 말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4월은 이미 잔인함의 계절이었으며, 최근에는 10월도 그에 못지않습니다.


읽어본 분들은 이미 아시겠지만, 시 <황무지>는 서두 문장과 다섯 개의 연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전체가 길고 난해하기로 유명합니다. 하지만, 후대의 뭇사람들에게는 단지 이 짧은 한 구절로도 그 시의 정서를 느끼기에 충분했습니다. 어느 시대나 비극의 강을 정처 없이 떠돌고 있는 흔적이 계절을 따라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봄날의 꽃이 만개할 4월 즈음에, 가을 낙엽이 짙어지는 10월이 그런 계절일 것입니다. 우리 시대는 화려한 문명의 조명으로 포장된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실상은 옛 ‘황무지’의 재현이라 해도 반박할 여지가 없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시대에 대한 감성적 저항자인 앨리엇의 <황무지>를 오늘 우리의 눈으로 다시 읽는 일은 전혀 어색하지 않습니다. 요컨대 그의 비극은 ‘황무지’ 같은 세계에 얽혀 있습니다. 그것은 동시에 우리가 겪어온 시대, 앞으로 나아갈 세계를 있는 그대로 직시하도록 일깨웁니다. 그렇게 그의 시가 이 시월에 전령처럼 오롯이 머물러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개인의 아픔을 시대의 아픔에 담아 삶의 미래를 전망하게 하는 시작(詩作)은 더 거슬러 주전 8세기의 고대 히브리 시인에게서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는 바로 이사야라는 정치인입니다.


시대의 황무지에서 단절가를 부른 시인

이사야는 정치가이자, 시대를 주도하는 사상가였습니다. 국제 정치 영역에서 선지자의 안목으로 삶의 변혁을 촉구한 시인이었습니다. 그가 남긴 글 중 이사야서 35장 1-10절은 엘리엇이 노래한 <황무지>의 배경이 되는 시대와 다를 바 없습니다. 암울한 시대상이 시적으로 함축되어 그려져 있습니다.


[…]
3 여러분 손의 맥이 풀렸지만 힘내세요.
후들후들 떨리는 무릎을 곧게 바로잡으세요.
4 불안하여 허둥대는 사람들에게 말해 주세요.
“용기를 내세요. 두려워하지 마세요.
보세요, 여러분의 하나님이 앙갚음하러 오십니다.
하나님이 되갚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오셔서 여러분을 구해 주실 것입니다.”<중략>
[…]7 뜨거운 모래땅이 물웅덩이가 되고,
마른땅이 샘물이 될 것입니다.
자칼들이 사는 곳, 누워 쉬는 곳에서는
풀이 갈대와 파피루스가 될 것입니다.


짧게 묘사되어 있긴 하지만, 이 시의 보이지 않는 배경에는 삶의 황무지가 있습니다. 당시 국가체제는 겉으로는 안정되고 광대해져 갔지만, 정치적 소용돌이는 끊임없이 거세졌습니다(사 6:1 ‘웃시야 왕이 죽던 해’). 그 주변과 속사정이 점차 황무지 같아지고 있습니다. 땅은 흔들리고 있고, 안팎의 정세는 방향 없이 어지러우며, 삶은 바닥부터 전복되고 있었습니다. 이제 곧 역사의 막은 내릴 것이며, 기대하던 버팀목은 밑동부터 잘려나갈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충돌할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누구든 ‘보이는 것’을 선택하기 마련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손으로 잡을 수 있을 듯 믿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 삶을 지탱하는 실체라고 생각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시인은 아예 어둠을 직시합니다. 빛을 덮어버린 듯한 보이지 않는 ‘밤의 세계’를 자기 삶으로 적극 끌어들입니다. 그는 신학에 근거한 정치인이면서도 무엇보다 시인이었습니다. 그는 현실을 에차(‘עֵצָה’, etzah: 계획/섭리)라는 어휘로 읽습니다. 보이지 않는 통치의 질서를 예언자적 시선과 정치적 판단으로 동시에 포착합니다. 에차는 신의 섭리, 그 불가시적 세계통치를 의미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 계획을 신의 시선과 인문의 눈으로 동시에 읽어내는 역량을 발휘했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독법은 역설적으로 땅으로부터 송두리째 거부당했습니다. 그것이 잔인한 그의 시대였고, 힘겨운 그의 터전이었습니다. 그 와중에 그가 남겨놓은 이 시는 현실에서 실현되지 않는 희망을 말합니다. 잔인할 정도로 삶의 절망을 끊어버린 ‘단절가(斷絶家)’라 할 만합니다. 요컨대 이사야의 시는, 시인 앨리엇에서 느낀 것처럼, 세월의 희망을 ‘투쟁’으로 뚫고 나와야 하는 잔인함을 대면한 것이고, 그 ‘절망의 시대를 새싹 돋아나는 희망으로 끊어버리는 노래였습니다. 따라서 이사야의 노래, 앨리엇의 시는 기억의 윤리를 시적 언어로 변주하며 추동하는 예입니다. 이때 비로소 시가 절망을 끊어내는 희망 저항의 형식으로 기능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대비 위에서 이 글은 ‘단절가’를 기억 저항의 시적 형식으로 제안합니다.


단절가의 의미

‘단절가는 희망가가 아닙니다. 망각과 절망 매몰로부터 동시에 결별하는 형식의 윤리이며, ‘절망을 희망으로 치환’ 하지 않고 ‘절망 속에 남아-버티는’ 노래입니다. 기억의 윤리가 자기 파괴로 기울지 않도록 자기-애도의 형식을 확보하는 시학입니다. 다시 말해 단절가는 절망을 끊어내 버리는 희망 절대 중심주의가 아닙니다. 절망은 어느 시대나 사라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단절가는 사라지지 않는 절망으로 기울어지는 자신을 ‘무단의 희망’으로 견인하는 노래입니다. 절망 속에서도 두 발로 버티어 서게 하는 희망의 다른 이름입니다

시인 이사야의 노래가 이런 의미의 단절가를 잘 보여줍니다. 특히 그는 자기 절망의 상황 앞뒤에 희망을 이어 붙여 단절가의 의미를 고양했습니다. 우선 그가 직시한 현실의 절망은 이렇습니다.


너희는 맥 풀린 손이 힘을 쓰게 하여라. 떨리는 무릎을 굳세게 하여라.
두려워하는 사람을 격려하여라.”


여기서 ‘맥 풀린 손, 떨리는 무릎, 두려워하는’ 등의 표현은 이미 절망이 삶을 지배한 사람들을 묘사합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이 구절 앞뒤에 이런 희망의 노래를 붙였습니다.


앞부분을 보면,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처럼 피어 즐거워할 것이다. 사막은 꽃이 무성하게 피어, 크게 기뻐하며, 즐겁게 소리칠 것이다.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샤론의 영화가, 사막에서 꽃 피며, 사람들이 주님의 영광을 보며, 우리 하나님의 영화를 볼 것이다.


바로 뒷부분은,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희의 하나님께서 복수하러 오신다. 하나님께서 보복하러 오신다. 너희를 구원하여 주신다." 하고 말하여라.
그때에 눈먼 사람의 눈이 밝아지고, 귀먹은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다.
그때에 다리를 절던 사람이 사슴처럼 뛰고, 말을 못 하던 혀가 노래를 부를 것이다.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 시냇물이 흐를 것이다.
뜨겁게 타오르던 땅은 연못이 되고, 메마른 땅은 물이 쏟아져 나오는 샘이 될 것이다. 승냥이 떼가 뒹굴며 살던 곳에는, 풀 대신에 갈대와 왕골이 날 것이다.
거기에는 큰 길이 생길 것이니, 그것을 '거룩한 길'이라고 부를 것이다. 깨끗하지 못한 자는 그리로 다닐 수 없다. 그 길은 오직 그리로 다닐 수 있는 사람들의 것이다. 악한 사람은 그 길로 다닐 수 없고, 어리석은 사람은 그 길에서 서성거리지도 못할 것이다.
거기에는 사자가 없고, 사나운 짐승도 그리로 지나다니지 않을 것이다. 그 길에는 그런 짐승들은 없을 것이다. 오직 구원받은 사람만이 그 길을 따라 고향으로 갈 것이다.
주님께 속량 받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들이 기뻐 노래하며 시온에 이를 것이다. 기쁨이 그들에게 영원히 머물고, 즐거움과 기쁨이 넘칠 것이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질 것이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여전히 시대는 ‘맥 풀린 손’들의 세계입니다. ‘떨리는 무릎’들의 광야이자 사막 같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게 된 사람들이 있고, 듣지 못하게 된 사람들이 있으며, 제대로 걸을 수 없게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말을 할 수 없게 된 사람들도 있고, 사방은 거의 폐허 같은 공간으로 변모해 버렸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 황무 상태는 가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시가 노래하는 세계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가상의 현실이며, 미답의 열매들입니다. 이처럼 이사야의 희망 구절은 현재의 ‘기쁨’을 서둘러 확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미래의 시간성으로부터 현재를 지탱하게 하는 역설적 반어입니다.

이렇게 길게 이어진 노래들은 모두 희망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시의 표면을 따라가면, 영락없이 기쁨과 희망의 노래입니다. 하지만 잠시 숨을 가다듬고 시의 시선을 따라 더 안으로 내려가 보면 이 시가 그저 가벼운 ‘희망가’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슬픔과 탄식이 사라질 것이다’라는 노래는 현재가 아니라 지금부터 이어질 미래의 전망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희망을 품는다고 해서 절망이 빠르게 희망으로 대체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서둘러 ‘기쁨과 환호가 밀려오는구나’라고 단정 지을 수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시구들의 중요성은 과거와 미래를 현재로 엮어낸다는 것입니다. 절망의 과거, 절망의 현재 심지어 절망의 미래가 전망됩니다. 하지만, 그 절망 안에서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그 노래에 희망을 담을 수 있는 근거는 미래로부터 옵니다. 그러니 그 보이지 않는 미래를 전망하며, 현재 질식과 감금의 시대를 절망 중에도 버텨내는 것이 이사야의 관점입니다. 그는 이런 자기 시선을 문학적으로 그려낸 것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시 <황무지>와 노래 <단절가>가 만납니다. 앞서 말한 대로, <황무지〉가 인간 중심의 인식론적 절망을 폭로한다면, 이사야 35장은 하나님 중심의 존재론적 희망을 선포합니다. 전자가 폐허의 서정에 기반한 희망의 미래를 문학으로 표현했다면, 후자는 과거의 현실에 근거한 미래의 희망을 현재로 호출하여 노래합니다.


황무지와 단절가의 대면

‘황무지’와 ‘단절가’를 함께 읽으면 이 두 시가 같은 시선과 동시에 다른 시선을 따라 걷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두 시 모두 절망을 희망으로 뚫고 나가야 하는 분투의 대상으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 같습니다. 기본적으로 다른 점은 <황무지〉는 인간 중심의 인식론적 절망입니다. 반면에 이사야의 시는 신 중심의 미래 존재론적 희망입니다. ‘황무지’가 ‘애화(哀話)’로 그려낸 절망의 희망이라면, ‘단절가’는 ‘애화(愛畵)’로 노래하는 절망의 희망입니다. 다시 말해, <황무지>는 이야기를 토대로 절망의 공간 안에서 희망을 찾아내야만 하는 잔인한 시라면, ‘단절가’는 상상하는 그림으로 절망 너머에 이미 꽃을 피워내는 희망과 함께 광야와 사막 같은 길을 당당하게 걸어야 하는 사람이 불러야만 하는 노래의 아름다움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처럼 두 사람의 시와 노래의 다른 결을 좀 더 인문학적으로 재구성해 볼 수 있습니다. 앨리엇의 시에서 ‘절망의 공간’에 머무는 것이 폐쇄의 공포를 스스로 삭이는 분투로 투사된다면, 이사야의 노래에서 ‘절망의 길’을 걷는 것은 개방의 기쁨을 덧입히는 투쟁으로 전환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황무지’와 ‘단절가’는 절망의 삶의 자리라는 같은 공간을 노래하며 함께 흘러가듯 걸어가는 순례자를 보여줍니다. 그들이 함께 걷다 마침내 하나의 지점에 이르러 서로 자신의 방향으로 갈라진 것처럼 읽힙니다. 하나는 ‘길’의 막힘이 만들어낸 공간을 헤매며 용기를 불러일으키고, 다른 하나는 길의 열림을 따라 걸으면서 용기를 일깨우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황무지’의 길은 인식의 폐허 공간을 맴돌고 있습니다. 방향을 겨누지 못한 채, 전방위적으로 방사된 길 위에서 한참 머뭇거리며 출구를 찾고 있습니다. 그에 반해 ‘단절가’의 길은 인식의 폐허 속에서 기적 같은 출입구를 상상하도록 그려줍니다. 어둠의 표면에 일어난 균열 속으로 빛이 스며들고 있다는 것을 사실적으로 묘사합니다. 쉼 없이 들어오는 빛을 바라보며 그 절망의 길을 당당히 오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누구나 걸을 수 있는 길을 그려냅니다. 그 만들어진 길에 이름을 붙였습니다. ‘성로(聖路, 거룩한 길)’. 이 생존과 기쁨이라는 구별된 길은 그 길을 걷는 구별된 사람들에 의해 비로소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이사야의 노래, 앨리엇의 시의 만남

황무지 같은 시대에 이들은 ‘단절가’를 다른 방식으로 부릅니다. 하지만, 그들의 시와 노래는 한 점으로 수렴합니다. 즉, 삶의 자리에서 절망을 초극하라는 ‘공허한 희망 고문’을 들려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절망’으로부터 도피하지 않은 채 꿋꿋이 그 틈에 나 있는 ‘거룩한 길’로 걸어가라는 ‘희망적 절망’을 보여줍니다. 이 틀에서 두 시는 서로 만나고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우리의 4월, 10월은 한 세기 전, 근대 문학사의 한 획을 그어 준 장편시가 노래한 ‘가장 잔인한 달’을 예언하듯 실존해 버린 형국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 탄식이 현현체로 등장한 우리 사회의 단면은 슬픔과 탄식이 지배하는 시공간으로 모든 삶을 감금해 버렸고, 시간을 멈춰버렸다는 비판에 직면해 있습니다. 또한, 세월의 아픔, 시공간의 슬픔은 ‘기쁨과 환호’를 빼앗은 탈취자의 모습으로 재생산되고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봄가을은 탄식과 탄원의 저항이 기쁨과 환호 앞에서 절삭되는 사건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우리는 어느새 ‘황무지’라는 공간에 덩그러니 남아 있습니다.


예언의 시인 이사야가 ‘기쁨과 환희’의 언어로 들려주는 이 송가는 사실 탄원과 탄식의 저항 노래가 안감을 뒤집어 놓은 것입니다. 그것이 그 어둠의 시대를 관통하는 신앙의 한 방식이었던 셈입니다. 그가 말하는 기쁨은 ‘슬픔’에 대한 신앙적 대체어이며, 그가 노래하는 ‘환호’는 ‘탄식’에 대한 야훼를 인식하고 수용하는 행동의 동의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기쁨으로 슬픔을 몰아내는 것도 아니며, 환호로 탄식을 묻어버리는 저급한 방식도 아닙니다. 오히려 야훼 신앙 담지자는 기쁨과 슬픔이 가진 엄청난 언어적 틈을 옷의 안팎처럼 동일 선상에 놓아두었다는 것을 인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 이제 남은 것은 기억입니다. 이 비극으로 끝나버릴 시공간의 사건에서 우리는 기억이라는 탁월한 방식으로 저항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분명하게 인식할 것이 있습니다. 절망은 희망으로 가는 디딤돌이 아니라, 절망은 그대로 절망입니다. 탄식은 송영으로 가는 길목이 아니라 탄식은 그대로 탄식입니다. 절망 속에서는 절망의 노래를 부르게 하고, 탄식 속에서는 탄식의 음조를 읊조리게 하는 것은 ‘잔인한 달’을 걷는 하늘의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언제나 돌아오는 계절은 우리에게 ‘슬픔의 기쁨’을 현실로 체감하는 뜻깊은 하늘의 시간일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누구라도, 슬픔을 거세하려는 기쁨을 강요하거나, 탄식을 변색시키려는 환호를 강권하는 보이지 않는 권력의 소유자가 되지 말아야겠습니다.


또한, 신앙을 무기로 절망을 절망으로 끝내버리지 않도록 해야겠습니다. 탄식을 탄식으로 멈춰 세우려는 책략도 경계해야겠습니다. 오히려 절망 안에서도 죽지 않은 희망을 꺼내고, 탄식 안에 감금되었던 환희의 언어들을 해방해야겠습니다.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그날에 ‘슬픔과 탄식이 사라진’ 기쁨과 환희로 구원의 감격을 함께 그려내야겠습니다.


이제 남는 것은 기억입니다. 기억은 과거를 저장하는 기술이 아니라, 망각과 무관심의 체제에 맞서는 현재의 실천(praxis)입니다. 그러므로 기억 저항은 애도의 반복이 아니라, 절망이 희망을 삼키지 못하도록 세계를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아나므네시스(anamnēsis)의 습관입니다.

오늘도 바다의 깊은 슬픔과 골목의 어두운 비명이 우리 곁에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슬픔을 지우려는 억지 기쁨,

탄식을 덮어버리는 환호를 경계해야 합니다.

대신 절망 안에서 꺼지지 않은 희망을 끌어내고,

탄식 속에 감금된 환희의 언어를 해방해야 합니다.

그 길 위에서 우리는, 어깨 아래 작은 표지를 달듯

기억을 한 편의 시로, 한 줄의 노래로, 한 편의 산문으로 흩뿌려야겠습니다.

벚꽃처럼, 낙엽처럼, 푸른 하늘빛처럼 말입니다.

그것이 황무지를 거룩한 길로 바꾸는 가장 작은 시작,

그리고 우리가 부를 노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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