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안식의 철학으로 읽는 글쓰기의 존재·형식·실천-
이 글은 최근에 제가 공유한 네 편의 글에 대한 비평적 소고입니다. 그 글들은 모두 '기억 저항'이라는 알짬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해마다 4월과 10월의 국가적 재난, 그리고 드러나지 않고 망각된 수많은 국가 재난을 글쓰기라는 작은 행위로 기억하려는 마음을 담았습니다.
말하지 않는 시대에 나의 글쓰기의 정체성
나의 글은 오늘 나의 얼굴이며, 이 시대를 인식하고 드러내는 고백이다. 신학에 기대어 수행하는 인문학적 사유의 실험이며, 일상의 작은 창작을 넘어 존재가 시대와 관계 맺는 수행의 결과다. 글/언어는 나만을 위한 도구가 아니다. 가능한 한 나–사물–세계의 삼면 연대를 모색하는 실천이다.
특히 나의 시대는 잊는 속도가 너무 빠르다. 슬픔은 즉시 소비되고, 고통은 타인의 뉴스가 된다. 글쓰기는 이런 망각의 습속(習俗)을 거슬러, 기억해야 할 것을 가능한 대로 기억하며 유지하는 윤리를 회복하려는 시도다. 기억한다는 것은 단지 과거 사건을 있는 그대로, 사실로 보존한다는 것은 아니다. 기억함으로써 타인의 고통을 미흡하나마 내 안으로 받아들이는 수용의 행위이며, 공감과 동참의 몸짓이다. 그 기억의 지속으로 신학 또한 저항의 색채를 유지할 수 있다. 요컨대, 나의 글쓰기의 의의는 나의 존재감을 정의하는 것이며, 그 문학 형식은 시공간을 해체(분해와 결합의 종합)하는 것이며, 나아가 나의 몸으로 드리는 기도의 실천이다. 이런 일련의 과정은 곧 내가 사유하는 ‘검은 안식의 철학’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글을 쓰는 일은 곧 걷는 일이고, 걷는 것은 곧 기도하는 일이다.
그동안 나는 글을 쓰며 이 세계의 질서를 사유하고 또 나의 몸으로 배웠다.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도 침묵하지 않는 방법, 침묵 속에서도 세계를 인식하고 알아가는 지혜를 천천히 습득했다. 이 글은 그 지혜의 기록이며, 기억의 저편에서 사라지지 않고 다시 태어나는 작은 증언이다. 이런 과정에 대해 나는 “기억하라, 그러나 절망하지 말라. 쓰라, 그것이 곧 가장 조용한 기도이며, 세계를 향한 가장 오래 지속되는 저항이다.”라는 슬로건으로 언제나 상기한다.
나는 네 편의 글에서 기억을 다음 세 층위로 구분하고 동시에 하나의 저항 윤리로 구성하려 했다.
(1) 개인적 기억: 타자의 고통을 내 안에 수용하는 수행
(2) 사회적 기억: 애도를 공적 책임으로 전환하는 정치
(3) 신학적 기억: 절망 속에서 미래를 불러오는 희망의 시간론 등이다.
잊힘의 시대를 걷는 글쓰기
우리의 시대는 기억보다 망각을 권면한다. 슬픔은 즉시 소비되고, 애도는 의전으로 포장된다. 여기서 나의 한 문장은 망각의 속도에 맞서는 느린 저항이며, 수도자적 훈련으로서 세계의 침묵에 응답하려는 시도다.
이런 시대 상황에서 나의 작은 문장 하나는 그 망각의 속도에 맞서보려는 여린 저항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수도자적 행위이면서 세계의 침묵에 나름대로 응답하려는 인간적 수련이다. 궁극적으로 이 글들은 종종 현실의 자신의 감정과 맞닿아 있다. 그 대면 이후에 단순한 감정의 표출로 끝나지 않았다. 그 고통의 언어를 어떻게 쓰고, 견디며, 끝내 내 몸으로 살아낼 것인지를 탐구했다.
이번에 공유한 네 편의 글도 이런 글쓰기의 사유를 반영한 결과다. 내가 겪은 다양한 사건 중에서 특히 잊어서는 안 되는 것들과 함께 살아가기 위한 작은 몸부림이다. 앞서 말한 대로, 이 시대는 기억보다 망각을 권면한다. 바쁜 시대에 제대로 적응하려면 생각할 겨를 없이 정신을 놓고 살아가야 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슬픔은 빠르게 소비되고, 애도는 국가의 의전으로 포장된다.
이 글은 모두 ‘기억의 항존성’을 지향한다. 클레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토대로 한 인간 내면을 조망하는 문학 비평, 위화의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에 대한 문학적 해석과 기능, 「기억 저항의 계절과 작은 실천」에서 기억의 인문사회학적 의의, 그리고 「10·29 참사에 대한 애도」에서 기억과 정치적 저항을 다뤘다. 이들은 서로 다른 층위를 유지하지만, 나의 관점에서 한 가지 질문으로 수렴된다.
“기억은 어떻게 글쓰기의 윤리가 되는가?”
이 문장에서 보듯이, ‘기억’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다. 기억은 존재하는 것들의 당연한 윤리이며, 상호 관계성을 완수하는 실천적 행동이다. 이처럼 기억은 내가 타인의 고통을 나의 언어로 해석하고, 수용하는 삶의 방식이다. 해마다 사회적 재난을 추모하는 글을 쓰는 이유는 그런 기억 행동이야말로 내가 나의 타자에게 건너가는 다리이기 때문이다. 이 글쓰기를 통해 나는 윤리적 다리를 건너 세계의 사물과 대면하면서 궁극적으로 문학을 통한 저항의 신학을 연습하고 있다.
기억의 문학적 형식―관찰하기와 증언하기
네 편의 글은 기억 저항의 요소를 반영한다. 첫째, 클레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읽으며 나는 ‘관찰문학’이라는 개념을 다시 생각했다. 관찰이란 들여다보는 것이다. 무엇보다 그 ‘기원’을 찾아보는 찰기시(察其始)에 가깝다. 이 작품의 주인공 펄롱은 거대한 악 앞에서 직접 싸우지 못하는 소시민이다. 그는 시대에 저항하려는 마음을 드러내지 못한다. 단지 자기 눈에 발견된 한 아이를 구할 뿐이다. 그 미미하게 보이는 조용한 선택은 마침내 사회의 침묵을 흔들고, 무력한 정의를 다시 깨운다. 이 ‘작은 행동’은 삶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자기 내면에 대한 철저한 관찰에 기인한다. 그 관찰은 곧 윤리적 결단으로 이어지고, 그 일련의 서사는 사소함이 이뤄낸 구원의 은총을 보여준다.
https://brunch.co.kr/@inthehe0419/294
이처럼 키건의 문학에서 ‘사소한 것들’은 절대 작지 않다. 그것은 거대담론의 왜곡으로 비어버린 인간성의 자리를 메우는 평범한 인간의 미세한 움직임에 불과하다. 그는 악을 단죄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선을 미화하거나 옹호하지도 못한다. 대신 평범한 일상이 깨지지 않기만을 바란다. 그 일상 뒤에 숨어 방관과 묵인을 침묵으로 실현한다. 키건의 이 소설이 빛나는 대목은 바로 이 부분이다. 그는 문학이 인간 내면의 섬세한 관찰을 통해서 자신과 다른 인간의 내외적 삶을 구원하는 힘이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비슷한 시기에 다시 정돈한 위화의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는 다른 차원의 관찰을 보여준다. 그는 역사적 사실을 문학적 은유와 수사법으로 각색한다. 6월 4일이라는 날짜를 “5월 35일”로 표현한다. 존재하지 않는 날짜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를 통해 국가가 지운 역사를 문학의 언어로 기억해낸다. 세계인들이 알듯이, 그날은 천안문 민주화운동의 날이다. 이후 더욱 폐쇄된 언론 통제 조치에 의해 말할 수 없는 현실은 더욱 가중되었다. 하지만, 그는 문학, 글쓰기의 힘을 토대로 이 불가능한 말을 현실처럼 만들어낸다. 이런 언어의 창출은 국가 권력이 강요한 망각에 맞선 문학적 기억 투쟁의 상징이다. 따라서 그의 글은 단순히 에세이를 넘어 과거 역사에 대한 증언이면서도 동시에 그 증언 너머 미래를 향도(向導)하는 저항의 흔적이다.
https://brunch.co.kr/@inthehe0419/295
나는 두 작가의 글을 나의 언어로 다시 쓰면서 그들에게서 공통의 관점을 발견했다. 그들의 글은 과거의 사건을 회상하는 설명이 아니다. 대신 그 역사 이면에 숨어있는 침묵과 부재를 세심하게 관찰한다. 표면이 아니라 그 사실의 기원을 찾아내고, 그 빈자리를 자기 언어로 해석하고 재현하는 데까지 이른다. 요컨대, 그들의 글쓰기는 ‘사건의 표면적 기술(記述)’이 아니다. ‘기억으로 저항’하는 글쓰기를 보여준다. 그들의 문학이 실천적 윤리가 되는 이유다. 그 윤리의 핵심은 부재, 숨겨진 것을 꺼내 드러내는, 즉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시선”과 맞닿아 있다. 다시 말해, 그들의 글을 읽고 난 뒤, 나의 '글쓰기는 침묵과 기억 사이의 좁은 틈을 지나는 순례이다.'
신학-시학적 해석:절망을 끊어내는 단절가(斷絶歌)의 시학
「기억 저항의 계절과 작은 실천」에서 나는 엘리엇의 <황무지>와 이사야서 35장을 함께 읽었다. 둘 다 절망의 시대를 노래한다. 엘리엇은 인간의 내면에서 절망을 발견했고, 이사야는 절망의 한복판에서 인간의 관점을 신의 희망에 투사하여 노래했다. 나는 두 사람의 시에서 공통적으로 교차하는 장르로 ‘단절가’라는 나의 개념을 제시했다.
https://brunch.co.kr/@inthehe0419/301
단절가는 단순히 절망을 끊는 희망가가 아니다. 절망을 부정하지 않고, 절망 속에서 인간다움을 유지하려는 희망의 시학을 뜻한다. 나는 이 노래/시가 절망을 서둘러 봉합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오히려 절망 속에 남아 버티며, 그 틈새에서 희망의 언어가 공존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앨리엇의 시는 ‘잔인하다’라는 말 속에 희망의 단서를 보여주고, 이사야의 노래는 “맥 풀린 손, 떨리는 무릎”의 사람들에게 “두려워 말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말은 단지 현재 상태를 위로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를 전망하는 선언이다. 절망을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절망 안에서 존재하며 살아간다. 그것 자체로 희망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단절가의 시학은 절망을 절망하는 희망의 윤리다. 절망을 없애는 것이 아니다. 절망 속에서도 인간다움을 잃지 않으려는 사유의 몸짓이다. 요컨대 나는 이사야와 엘리엇 사이에 연동하는 희망을, 현실을 직시하며 기억 저항의 글쓰기 형식으로 받아들인다. 다시 말해, 하나는 ‘황무지의 언어’로 절망 자체를 응시하고, 다른 하나는 ‘거룩한 길의 언어’로 절망을 희망화하는 것이다. 그것은 현재 곧바로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 미래로부터 오는 종말론적 의의를 갖는다. 나는 이런 절망을 절망으로 희망에서 비롯된 긴장을 나의 글쓰기의 내면에 담으려 했다. 다시 말해 나의 글쓰기는 그 자체로 곧 절망 속에 깃든 희망의 씨앗,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선언하는 예언(預言) 행위이다. 곧,
“나는 절망을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절망이 언어를 낳고, 언어가 희망을 낳는 과정을 기록한다.”
증언하는 공적 애도와 저항의 윤리―기억의 정치학
끝으로 네 번째 글, 10·29 참사에 대한 글은 애도의 사회학을 천착한다. 나는 이 글에서 개인의 애도가 사회적 기억의 문제로 확장되기를 기대했다. 애도는 단지 개인이 자기 슬픔을 표현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사회라는 공동체의 윤리적 감각을 회복하는 회심이다. 특히 국가가 책임을 회피하고, 사회가 침묵할 때, 애도는 정치적 저항의 언어로 바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https://brunch.co.kr/@inthehe0419/300
나는 한나 아렌트와 앨리아스 카네티의 글을 통해 폭력과 군중의 관계를 관찰했다. 그들의 주장을 종합하면, 권력은 군중 속에서 존재하며, 군중이 사라질 때 왜곡된 권력이 자연스럽게 자리 잡는다. 2022년 10월 29일 이태원 골목에서 무너진 것은 군중이 아니었다. 그 군중을 지탱해야 했던 정치 권력의 책임회피였다. 따라서 애도는 죽은 자를 위한 의례가 아니라, 산 자가 자기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대해 책임을 되묻는 방식이다. 그 힘이 공의롭고 정의롭게 작동하지 않을 때, 그날의 기억을 지속함으로써 우리가 나아갈 길을 밝히는 것이다. 이것은 곧 개인이 자유롭게 나서는 정치적 선택이며, 그 선택의 지속이야말로 곧 저항이다.
나는 이 글을 쓰며 깨달았다. 개인의 애도란 결국 기억의 공적 실천(praxis)이다. 눈물은 사라져도, 글은 남는다. 글쓰기는 사람을 모으고, 모인 사람은 다시 공동체로 전이된다. 이때 글쓰기는 애도의 언어를 사회적 윤리로 변환시키는 예언적 작업이 된다. 비통함은 고난의 해석학이며, 그 해석은 다시 시민적 기억을 추동한다. 마침내 애도는 더는 일회적 감정 표현이 아니라, 그 궁극적 책임의식이 완성될 때까지 지속하는 시민적 이성에 근거한 실천 지성이 된다.
“기억은 과거의 저장이 아니라, 현재의 실천이다.
글쓰기는 그 실천을 지속시키는 도구이며, 애도는 그 도구의 가장 인간적인 형태다.”
검은 안식의 철학―기억 저항으로 망각의 시대 다시 쓰는 희망
이 네 편의 글쓰기는 내가 사유하는 ‘검은 안식의 철학’에 잇대어 있다. 검은 안식은 어둠과 빛의 공존 신학이다. 빛이 어둑해진 자리에서 발견하는 안식, 나아가 자기 세계가 망각하는 것들에 대한 기억의지, 침묵의 밤을 걸어가는 몸의 저항이다. 곧 기도다. 여기서 안식이란 멈춤이지만, 단순한 휴식이 아니다. 그것은 삶의 방향을 묻는 걸음의 멈춤이다. 그 멈춤이 ‘검은 안식’이다. 그것은 상실과 고통이라는 어둠의 한가운데서, 여전히 존재하는 빛을 놓치지 않고, 뒤따라가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검은 안식의 철학에서 기억은 망각을 거슬러 다시 현실로 소환하는 분투다. 따라서 검은 안식의 핵심 중 하나는 ‘기억하는 신학’이다. 이 기억은 슬픔의 무게를 짓누르는 것이 아니다. 슬픔의 무게를 견디며 공감으로 슬픔을 빛과 함께 유지하는 공동체 삶의 방식이다. 사월의 세월호, 시월의 10·29 참사, 수많은, 이름 없이 망각되는 국가적 재난들―그 사시(斜是)에 대한 슬픔은 우리 사회가 ‘집단적 망각’과 싸워온 투쟁이라 할 만하다.
글쓰기의 완성―어둠 속의 빛
나의 글쓰기는 그런 투쟁을 조금이라도 뒤따르려는 소박한 공감이다. 역사의 소음 속에서 쉽게 사라지는 기억을 나의 글쓰기로 재현해 보려는 것이다. 그 침묵을 기록할 때, 비로소 기억은 나를 구원하는 힘이 된다. 나의 검은 안식 철학은 바로 이 기억의 인문학적 구원을 의미한다. 어둠을 지워버리는 빛이 아니라, 어둠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희미한 불빛이다. 나의 글쓰기는 나로 하여금 그 불빛으로 인간의 존엄성이 지향하는 표지를 향도하게 한다.
이처럼 네 편의 글쓰기는 언어의 경계에서 검은 안식의 철학과 저항의 윤리가 맞닿은 흔적이다. 글쓰기로서 저항한다는 것은 단순히 시대와 싸우려는 것이 아니다. 시대의 아픔에 동참하려는 수련이다. 억압에 맞서 싸우되, 증오에 함몰되지 않는 힘이다. ‘안식’은 슬픔에 공존하는 지지력이다. 요컨대 나의 글쓰기는 검은 안식의 철학이라는 틀 아래서 기억을 소생시키고 그것의 유지를 추구한다. 망각은 권력이 선호하는 언어이지만, 기억은 인간다움을 입증하는 시민의 언어다. 글쓰기가 기억을 다시 불러내지 못할 때, 위의 권력은 아래를 지배하고, 인간의 존엄을 보이지 않게 짓누른다. 결국, 검은 안식의 글쓰기는 “잊지 않기 위해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하기 위한 사랑”에 머문다. 그 사랑은 동참과 공감이다. 이 윤리로 기억은 오래 지속하는 저항을 더욱 추동한다. 저항하려는 한, 글쓰기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네 편의 글이 ‘기억’이라는 알짬으로 엮인 것에서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글쓰기는 인문학적 사회 구원 행위다. 그 구원은 초월의 빛이 아니라, 인간의 어둠 속에서 태어나는 가장 낮은 빛이다. 검은 안식의 글쓰기는 그 빛을 뒤따르는 순례의 태도다. 그것은 “모든 것은 잊혀야 새로 태어난다.”라고 말하는 세계에서 “기억하는 한 모든 것은 사라지지 않는다.”라는 희망 행위다. 여기서 말하는 희망은 환상 독려가 아니다. 기억의 지속에서 자라난 현실적, 현재적, 이성적 믿음이다. 이제 나는 글을 나의 믿음의 실천적 행위로 받아들인다. 글쓰기는 기도이며, 기억이며, 저항이다. 그 셋은 서로 다른 이름이지만, 결국 같은 푯대를 지향하는 생명의 운동이다.
요컨대, 기억은 과거의 저장이 아니라 현재의 실천이다. 글쓰기는 그 실천을 지속시키는 가장 인간적인 기술이며, 애도는 그 기술의 윤리다. 검은 안식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그것은 기억의 밤이자 새벽의 언어다. 나는 그 언어로 세계를 다시 쓴다. 기억을 주제로 한 나의 글은 우리 시대의 아픔에 대한 작은 공감이자, 잊히는 것들을 되살려 인간의 존엄을 지키려는 신앙의 몸짓이다. 기억은 나의 신앙의 형식이며, 글쓰기는 그 신앙의 숨결이다. 나는 기억한다. 고로 존재한다. 결국, 이러한 나의 기억 저항의 명제를 한 문장으로 풀어 쓴다면, 기억은 실천이고, 애도는 사회적 윤리이며, 글쓰기는 걸음을 걷는 듯한 기도다. 이것은 곧 ‘글쓰기는 나의 얼굴이다.’라는 명제의 또 다른 표현이자, 존재의 등가적 진술이다.
“읽어주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