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보러 길로 나갔는가?’
*이 글은 제 연작시 1-14편에 대한 자기 비평문입니다. 이 글쓰기는 저의 문체로 작성되었습니다. 단, 자기 비평문의 한계상, 일반적인 인문학 개념 명확한 검증과 오탈자, 교열 교정의 최종 작업을 위해 AI(Gemini)가 관여했습니다.
걷는 기도―‘길 위의 시학’
나의 연작시 〈걷는 기도 詩 1–14〉는 ‘걸음’으로 ‘기도’하는 걷기를 토대로 작성한 것입니다. 모든 시는 ‘빠르게, 그러나 꼼꼼하게’ 주로 새벽과 아침에 작성되었습니다. 초고를 작성한 뒤 수차례에 걸쳐 수정과 교정 후 탈고한 것들입니다. 이 시들은 대체로 다음 세 개의 층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제1층 관찰하고 경험한(주로 걸었던 길) 사실
제2층 사실에 대한 나의 해석
제3층 해석의 인문학적 의의를 찾아 시철학으로 개념화(주로 제목)입니다.
이로써 이 시들은 ‘나 자신의 경험에 기반한 존재론적 순례기이며, 발을 움직여 걸음으로써 역동하는 몸을 활용한 시 철학’입니다. 나는 걷는다는 행위를 ‘인문신학적 사유의 한 형식’으로 활용했습니다.
다만, 나는 ‘무엇인가 기도하기 위해서’ 걷지 않습니다. 몸으로 걷는 행위 자체가 기도입니다. 길은 기도의 공간입니다. 어떤 길이든 그 위에서 홀로 걷는 나는 말을 삼키고 사물과 추상을 관찰하면서 느린 사유를 전개합니다. 이때, 관찰은 침묵의 언어를 더 깊은 사유의 세계로 이끌어준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누구나 알듯이, 걷는 동안, 나의 고독은 사유의 닫힘이 아니라 더 넓은 세계로 나를 이끌어가는 ‘관계의 열림’입니다. 관찰과 사유는 그 열림으로 넘어가는 문턱입니다. 이처럼 나의 ‘걷는 기도 詩’ 연작은 고독한 상태에서 길을 걸으며 ‘몸으로 생각하는 인간(homo sentiens)’이 만들어낸 미미한 결실입니다. 걸음의 시학이자, 걷는 기도의 영성입니다.
몸으로 쓴 초고-낭독의 호흡
나의 시들은 초고를 시작으로 탈고까지 여러 번 수정을 거칩니다. 이 반복되는 수정은 당연히 문학적 완성도를 높이기 위함입니다. 비록 나의 시가 전문적 영역을 다 반영하지는 못한다 해도 나름대로 꼭 필요한 요소를 극대화하려는 생각은 한결같습니다. 특히 나의 시에서 가장 중점적으로 교정하는 영역은 시의 운율입니다. 특히 이 운율은 읽었을 때 낭독자가 느끼는 호흡, 리듬을 일치시키려는 의지가 들어있습니다.
따라서 단어와 단어는 짧게, 또는 길게 이어져야 합니다. 시구 사이의 호흡이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행과 행 사이의 여백도 중요합니다. 이는 단순한 공백이 아닙니다. 걷는 걸음의 속도이면서, 걷기에 따라 달라지는 사유의 강도와 쉼의 조화를 반영하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나의 시가 걷는 리듬이 곧 문장의 리듬이 되고, 문장의 여백이 곧 사유의 연대로 이어지길 바랐습니다. 그저 읽히기보다 몸으로 살아지는 시, 언어 행위이자 동시에 ‘예전(禮典)으로서의 시’이길 기대했습니다. 이처럼 〈걷는 기도〉는 몸으로 쓴 초고가 낭독의 호흡을 따라 다시 몸 안으로 되돌아오고, 끝내 그 새로운 ‘몸의 언어’가 나의 일상에서 사건으로 실현되었으면 합니다.
‘길’이라는 공간― 관계적 시간과 존재의 순환
몸으로 걷기라는 나의 연작시의 철학적 중심 전제는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몸의 변화가 곧 시간이다.”라는 인식입니다. 예를 들어 〈하향원점〉, 〈흐르는 길〉, 〈공원 역사〉 등에서 나는 시간이 직선적 흐름이 아니라 되돌아감 속의 성숙, 순환 속의 회복이라는 것을 표현하려 했습니다. 걷기는 시간을 따라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맴도는 공간을 반복해서, 카오스처럼 움직이다 끝내 카오스모스로 귀결되는 철학적 행위입니다.
이 걷기는 필연적으로 몸으로 기억하는 사건을 누적을 선물합니다. 이로써 걷는 존재는 길 위에서 성장합니다. 나의 연작시들이 ‘고독–순례–귀환–평화’의 순환을 이루며, 마침내 관계적 시공간의 미학을 구현하려는 것도 이런 성장의 흔적입니다. 나의 시에서 시간은 ‘흘러 지나감’이 아니라 ‘나의 삶이라는 공간, 길 위에서 되살아남’입니다.
타자와의 동행 ― 걷기의 윤리와 공감의 사회학
나의 연작시에서 내가 묘사한 것은 보이지 않는, 수많은 타자와의 동행입니다. 〈광장 순례〉, 〈노인과 나〉, 〈바람의 평화〉 등이 그 예입니다. 여기서 나의 걷기는 더는 개인 안으로 침잠하는 명상에 그치지 않습니다. 당연히 사회 속에서 타자의 고통에 응답하는 비폭력적 연대의 수행입니다. 연대의 공간은 수없이 많습니다. 나는 길을 걸으면 현실에서, 상상에서 다양한 타자를 만납니다. 광장, 병원, 공원, 도심의 공사장—나는 이 경계 공간들을 걸으며 필연적으로 타자의 소리, 신음, 침묵을 몸으로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나는 자연스럽게 하늘을 향해 나의 말을 던집니다.
하지만, 그 기도는 하늘을 향한 말에 그치지 않고, 타자를 향해 귀 기울이는 나의 몸을 다독이는 위로의 행위입니다. 이처럼 나에게 걷는다는 것은 곧 타자의 얼굴을 상상하고, 그것을 관조하며, 그것의 샬롬을 구하는 윤리적 사건입니다. 거창하게 말하자면, ‘공감의 철학’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물론 그 실천의 강도는 여전히 미약할 뿐입니다. 그저 이런 연작시로 그 ‘관계의 윤리’를 표현하는 작은 시적 정의를 구현할 뿐입니다.
언어의 수행 ― 시 쓰기라는 예전
나는 〈걷는 기도〉를 매일 새벽, 또는 아침에 씁니다. 이는 나에게 새벽 경건한 기도의 시간과 같습니다. 나는 언어를 조각할 능력보다도 그것을 어루만지는 힘을 더 갖기를 희망합니다. 언어가 나에게 말을 걸고, 그 말이 내 몸을 자유롭게 걷도록 허용하려 합니다. 합니다. 그러니 침묵은 필수적입니다. 나의 말을 줄이고 그의 말을 따라 배열하면 시는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더 많은 말을 하곤 합니다. 이런 의도적 침묵 아래에서 나는 ‘검은 안식’의 의미를 다시 경험합니다. 내가 추구하는 철학, 즉 ‘검은 안식’은 고통을 부정하지 않고 통과함으로써 얻는 샬롬입니다. 어둠을 견딘 끝에만 평화의 빛이 드러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점에서 시를 언어로 쓴다는 것은 내가 관찰한 것이 무엇인지 평면적으로 서술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관조한 것의 속살이 어디로 향하는지, 어떻게, 왜 그렇게 보여주는지를 비판적으로 성찰하여 끝내 ‘개념’으로 명명하는 입체적 활동이어야 합니다. 〈너의 이름〉에서 “그대 이름은 호모 파키피쿠스”라 쓴 것도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이 명명으로 나는 아침, 저녁 길을 걸으며 느꼈던 삶의 갈등을 모든 인간이 ‘평화추구’의 의무가 있다는 도전으로 상기합니다. 그 평화추구 수고가 인간의 본질이라는 것을 개념으로 말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나의 시 쓰기 방법론 ― 걷는 글쓰기, 관계의 문체, 안식의 형식
이번 연작시에서도 나의 시 쓰기 방법은 분명합니다. 나에게 시는 단순히 선택된 문학 형식이 아니라 인간 존재 의의를 심화하는 문학 내용입니다. 나는 시를 내 몸으로 직접 ‘걷는 글쓰기’로 만들어냅니다. ‘만들어낸다’라는 말은 중요합니다. 즉, 나는 시를 몸의 리듬에 문장을 맞추고, 세계의 속도에 맞서 느림의 감각으로 사유를 옮기는 과정을 반복합니다. 즉 세 가지 기법이 중요합니다.
첫째, 걷는 글쓰기 (Writing by Walking)입니다. 글은 걷는 몸의 속도와 호흡에 문장을 맞추려 합니다. 사물이 변화하는 리듬을 관찰하고 그것을 문장에 반영하면 글은 사물처럼 흘러갈 수 있습니다. 완결보다 미완으로도 충분합니다. 걸음을 반영한 문장은 닫히지 않고 세계를 향해 열려있다는 상징입니다.
둘째, 관계의 문체 (Relational Style)입니다. 나는 대체로 ‘나’의 경험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시의 처음과 과정에 두려 합니다. 하지만, 시의 끝과 중심에는 드러나지 않아도 항상 타자의 목소리를 반영합니다. 사물 역시 대상으로만 묘사하지 않고, 그것들과 나의 유기적 관계로 문장을 구성하려 합니다. 따라서 1인칭 주어는 최소화, ‘나+세계’의 공동 주어는 최대화하여 문장을 구성합니다.
셋째, 여백의 형식 (Form of Rest)입니다. 부족하지만, 시를 통해 걷기의 모습을 적극 반영하려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50분 걷고 10분 쉬는 걷기의 고유한 리듬처럼 글, 시도 여백과 침묵이 필요합니다. 짧고 긴 문장의 조화, 응집된 밀도 있는 표현과 사실 묘사의 문장으로 직조된 글은 드러난 의미에 그치지 않습니다. 드러나지 않고 찾아낼 수 있는 의미까지 확장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연작시의 구조는 대체로 호명–응답–침묵–회복이란 시편 탄원시의 예전(禮典)의 미메시스이기도 합니다. 나의 시는 걷기에서 얻어진 여정과 여백의 조화입니다.
이 세 가지 항목은 나의 시 전체를 관통하는 글쓰기 기법입니다.
나의 걷는 기도 시의 철학-몸으로 써 내려간 시간의 기록
이번 연작시 〈걷는 기도 詩 1–14〉는 시철학을 적극적으로 반영한 결실입니다. 서로 다른 계절의 기록이면서 내가 겪은 삶을 다양하게 변주한 일기입니다. 이 시 안에는 등산, 질병, 회복, 만남, 공동체의 사랑 등이 교차합니다. 예를 들어, 〈하향원점〉에서는 되돌아감의 지혜를, 〈광장 순례〉에서는 사회적 연대를, 〈바람의 평화〉에서는 몸의 치유를, 〈너의 이름〉에서는 인간 평화의 종착을 노래했습니다.
이 시들은 모두 현실의 길에서 출발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나에게 그 길은 기억과 관계의 길, 존재 회복의 길이었습니다. 나는 이 길 위에서 인간의 시간과 신의 시간이 만나는 지점을 포착했고, 그 만남의 흔적을 언어의 호흡으로 새겨두었습니다. 따라서 나의 시는 정형시도, 단순한 산문시도 아닙니다. 그저 잡문일 수도 있습니다. 다만, 걷기의 리듬과 기도의 리듬이 결합한 사유의 형식, ‘몸으로 사유하고, 세계를 경청하는 시학’을 실현하고 싶은 습작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걷는 기도〉 연작은 내가 추구하는 ‘길 위의 시 쓰기,’ 이른바 ‘도석(道釋)’이라는 나만의 인문학적 사유 실험이라는 점입니다. 리처드 로티(Richard Rorty)가 말한 대로 ‘시철학이 가능한가’에 “그렇다”라고 답하는 나의 철학 신학 여정입니다.
나의 걷는 기도 시와 인문학의 걷기 철학 ― 몸, 시간, 관계의 사유를 넘어
나는 길 위의 시를 통해 인문학의 ‘걷기 철학’을 배우고 있습니다. 이 철학은 근대 이후 분리된 몸과 사유의 통합을 되찾으려는 시도였습니다. 자료를 찾으면, 루소는 걷기를 “내면의 대화”로, 벤야민은 “도시의 기억을 읽는 행위”로, 리베카 솔닛은 “인간 경험의 원초적 서사”로 정의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도 현대적 의미에서 ‘걷기 철학’의 의의를 주창하는 학자들은 많습니다. 그들에게 걷기는 자유의 상징이자, 사유의 해방이었습니다.
하지만, 나의 〈걷는 기도〉는 그 지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려 합니다. 나는 걷기를 그저 사유의 도구가 아니라 ‘존재 찾기’로 명명하려 합니다. 다시 말해, 걷는 이는 신 앞에서 자신을 새로 듣는 행위, 즉 영성적 사건에 자신을 기투한다는 것입니다. 대체로 인문학적 걷기가 ‘생각하기 위해 걷는다’라고 한다면(이것도 부족한 이해겠지만), 나의 걷는 기도는 ‘걷는 행위가 곧 기도다’라는 철학 시학, 철학 신학을 구현하려는 것입니다. 또한, 철학적 걷기가 길 위라는 ‘공간의 탐색’에 주목한다면, 나의 걷기는 길 위가 곧 올람(Olam, 영원)이란 ‘시공간’의 복합체 안을 벡터처럼 움직이는 삶을 추구한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앞서 말한, 〈하향원점〉과 〈흐르는 길〉에서 시간은 직선이 아니라 시공간을 순환하는 영원의 운동으로 묘사한 것이 그 예입니다.
나는 이 사유를 메를로 퐁티의 몸의 현상학, 미셀 앙리의 육화(肉化, 살의 철학), 로벨리의 관계적 시간론과 대화하며 조금 배웠습니다. 나아가 그 위에 신학이 추구하는 아드 퐁테스(Ad fontes, 근원으로 되돌아감)를 더했습니다. 결국, 나의 걷는 기도는 인문학의 걷기 철학에 ‘관계적·신학적 인문학’으로 확장한 시적 실천입니다. 이 걷기의 궁극적 목적은 바로 나의 첫자리로 되돌아감입니다. 걷는다는 것은 전진이 아니라 생각하며 경험하는 긍정적인 환상방황입니다. 길 위에서 나를 듣고, 나를 용서하고, 결국 너와 세계와 공명하는 시적 정의 그 윤리적 결정체입니다. 이로써 나의 걷는 기도는 루소나 솔닛이 말한 ‘사유의 걷기’를 넘어, 신의 은총 아래 나와 너-세계라는 삼면 일체의 조화를 통해 ‘관계와 샬롬의 걷기’를 실현하는 시학적 운동입니다.
철학과 인문학의 울림―걷기의 사유 구조
이제 나의 연작시가 가진 철학적 주제를 잠시 언급해두려 합니다. 나의 걷기시는 대체로 실존주의의 불안, 현상학의 몸의 지각, 그리고 탈중심적 윤리의 사유를 품고 있습니다. 길을 잃어도 좋다는 불안은 사르트르, 키르케고어의 실존의 자유와 몸으로 세계를 느끼는 감각은 메를로 퐁티의 현상학과 미미하게나마 연결되어 있습니다. 특히 윤동주의 시를 통해 나는 ‘나–세계–몸’의 관계를 다시 엮어낼 수 있었습니다. 나의 연작시는 존재의 초월을 통해 추락마저도 내재의 발견, 즉 하강의 영성이자 겸손의 철학이라는 것을 사유합니다. 이 사유들은 “길은 곧 생명이며, 걷는 자는 그 생명의 증언자”라는 철학 신학의 실현자 예수의 걷기와 조응합니다. 다시 말해 나의 시들은 문학이면서 곧 신학이라는 것입니다. 영성입니다.
걷기의 영성 ― 고독, 하향, 뒤따름의 신학
<걷는 기도〉의 영성은 세 가지 요소로 요약됩니다.
첫째, 고독함의 질서: 고독은 혼자가 아니라, 홀로 세계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지혜 행동입니다. 홀로일 때 인간은 비로소 흩어진 자기 질서를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성찰입니다.
둘째, 하향의 겸손: 하향은 낮은 곳으로 흐르는 몸의 정상적 움직임입니다. 산의 정상보다 아래로 향하는 길, 올라감과 옆으로 이어진 길을 동시에 걷는 태도입니다. 케노시스입니다.
셋째, 뒤따름의 용기: 내가 걷는 길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닙니다. 앞선 자의 걸음이 길의 창시입니다. 나는 그 뒤에서 그들의 길을 걸을 뿐입니다. 길을 만들기 위해서는 길 아닌 곳을 걸어야 합니다. 그러니 본래 길은 없습니다. 걷는 자가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나에게 걷기는 세계와 연대한다는 실천적 믿음입니다. 뒤따름이 동행입니다.
이 세 요소는 내가 신학을 문학의 몸을 빌려 다시 해체(분해, 결합)한 개념들입니다. 이 요소들을 상기할 때, 나는 걷는 일이, 곧 시철학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역으로 시가 곧 신학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 성찰 ― 언어의 절제와 다성의 확장
나는 이 연작시를 내 세계가 어디쯤 자리하는지 그 좌표를 찾아가고 있습니다. 정확하게 영점 조정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나의 걷기는 점차 ‘언어의 절제’와 ‘다성의 확장’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물론 아직 지나친 철학적 진술에 갇혀 시의 긴장감을 약화하기도 했습니다. 여전히 나의 사유는 더 침묵 속에서, 시는 더 여백 속에서 빛나야 한다는 것을 잊을 때가 있습니다. 걷기의 세계를 나 아닌 타자—여성, 아이, 노인, 자연—의 목소리로 확장해, ‘다성적 걷기시’로 발전시켜야 할 필요도 있습니다. 나의 〈걷는 기도〉가 시대의 시학으로 자리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시인간(詩人間)-걷는다는 것은 시를 통해 인간성을 심화하는 일
이번 〈걷는 기도〉에서도 나는, 나라는 존재가 어디쯤 위치하는지 살필 수 있었습니다. 길 위에서 얻는 텍스트를 시라는 콘텍스트로 바꿔 얻어낸 결실입니다. 이 시를 쓰며 나는 철학의 토대 위에 선, 시 쓰는 사람(시인은 아닙니다)이 되었습니다. 신학자를 넘어 내가 주창하는 시인간으로 또 한 번 태어났습니다. 여전히 나는 확신합니다. 걷는다는 것은 존재를 다시 배우는 일이며, 그 느린 발걸음 안에서 인간은 비로소 인간이 된다는 평범한 사실을. 어쩌면 아래 이 한 문장이 나의 시 세계를 대표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걷는 기도〉는 나의 문학이자 신앙이며, 한 인간이 되어가는 서사다.”
<걷는 기도>와 검은 안식의 철학―어둠 속에서 찾아 누리는 샬롬
〈걷는 기도〉 연작은 나의 사유의 뿌리인 〈검은 안식의 철학〉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걷는 기도가 몸의 리듬으로 세계를 읽는 사유의 여정이었다면, ‘검은 안식’은 그 여정의 끝에서 어둠 속의 안식을 누리는 생존 철학입니다. 걷는 동안 나의 몸은 세계를 향해 열렸고, 긴 어둠 속에서도 안식하며 다시 나 자신의 평화를 닫습니다. 걷는 기도가 운동의 철학이라면, 검은 안식은 멈춤의 철학입니다. 이 둘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삶과 죽음, 낮과 밤, 빛과 어둠처럼 서로를 지탱합니다. 따라서 ‘걷는 기도’가 외향의 열린 안식이라면, ‘검은 안식’은 내향의 닫힌 안식입니다. 전자는 세상을 향한 발걸음이고, 후자는 세상 속에 스며있는 쉼을 찾아내는 분투입니다. 다시 말해 “걷는다는 것은 안식으로 향하는 여정이며, 안식은 걷기의 끝이 아니라 그 본질이다.”라는 나의 말을 그대로 담은 〈걷는 기도〉는 ‘검은 안식’의 서곡이자 여정입니다.
정리하면, 나는 이 연작을 통해 어둠과 동행하는 우리 삶에도 여전한 안식을 배우고, 멈춤 속에 살아있는 빛으로 이어가려 했습니다. 걷기와 안식, 행위와 침묵, 몸과 영혼이 서로 잇대어 있는 이 구조가 나의 신학이며, 문학이자 철학의 지향점일 것입니다.
이처럼 이번 연작시 〈걷는 기도〉는 ‘몸–시간–타자–언어’의 네 축을 따라 인간을 다시 사유하게 하는 관계적 인문학의 시학을 구현해 보았습니다. 그 시학은 ‘검은 안식’으로 이어져 어둠 속에서도 평화를 노래하는 존재의 철학으로 완성될 것입니다.
나는 오늘도 걷습니다.
시를 쓰듯, 기도하듯,
한 발씩 느리게 세계를
다시 배우며 영원과 함께 검은 안식을 누리고 있습니다.
*다음 연작시는 <듣는 기도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