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 낭독의 미학

-M 로제, 윤미연 역,『그레구아르와 책방 할아버지』(문학동네, 2020

by 푸른킴
“모든 사람은 한 권의 살아있는 책”



읽어주는 이 없으면 고독해진다

당신은 한 권의 살아있는 책이다. 마르크 로제의 소설은 ‘책’을 단순한 사물이 아닌, ‘살아있는 책’으로서의 인간 존재를 잇는 강력한 관계의 매개체로 제시한다. 낭독이라는 행위는 사회적 불균형을 해소하고 외로운 이들을 연결하는 ‘작은 저항’이자, 개인의 내적 성장을 완성하는 성장의 서사(Bildungsroman)를 구현한다. 궁극적으로 이 글은 문학, 과학, 신학의 관점을 아울러, 낭독 속에 담긴 타인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곧 이 시대에 필요한 ‘정의(체데크)’임을 고찰한다.


모든 사람은 한 권의 살아있는 책: 낭독과 존재의 연대

시인 정현종은 시 ‘방문객’에서 인간 존재의 가치를 역설하며,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라고 노래한다. 이는 단지 그 사람이 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며, 결국 한 사람의 일생 자체가 한 권의 책과 같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오늘날 ‘사람책(Human Book, like Library)’이라 부르려는 움직임은 이런 사회적 맥락을 반영한다. 하지만, 굳이 글로 남기지 않더라도 그의 존재 자체가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마르크 로제의 소설 『그레구아르와 책방 할아버지』는 이러한 ‘살아있는 책’의 가치를 가장 서정적으로 그려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이 책은 낭독의 의의를 다시 생각한다. 평생 책을 사랑하며 살았던 노인 피키에와 그의 마지막 삶을 함께 읽어주고 동행해 준 젊은이 그레구아르의 이야기 사이에서 낭독의 심오한 가치를 되새길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 자신이 프랑스의 저명한 대중 낭독가이기도 한 로제는 이 소설을 통해, 책이 단순히 정보를 담는 사물이 아님을 역설한다. 책은 누군가에게 ‘읽어줌으로써’ 상호 관계를 위한 강력한 연결 기제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로제에게 있어 이것이야말로 ‘낭독’의 궁극적인 의의다. 나아가 이 낭독을 통해 고립된 개인들을 공동체로 묶어내는 책의 존재 이유가 명확해진다. 이 소설은 자신의 삶을 책처럼 말하는 노인과 그 삶을 읽어주는 청년, 그리고 그들 사이에 놓인 ‘관계의 매개체로서의 책’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요컨대 낭독이 한 사람의 내면을 열어 타인의 세계로 이어주는 문이라면, 책은 그 길의 지붕과 기둥이다. 이제 ‘읽어주는 행위’ 너머, 책 자체의 존재론적 의미를 물어야 한다.

책의 정신과 존재론적 전일성

책은 무엇인가? 단순히 보자면, 책이란 흩어진 글, 말, 그림들을 가지런히 모아 엮어놓은 ‘한 사람의 생각 집’이다. 이 정의에 따르면, 글의 집 속에서 생각은 태어나고, 한 글자는 옆 글자와 어우러지며 조화의 미학을 이룬다. 독자는 글쓴이의 문학적 직관과 읽는 이의 문학적 상상이 알맞게 이어진 책을 읽을 때, 비로소 그 책의 정신(spiritus)을 안정되게 체감한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책의 정신’은 곧 총합적이고(holistic) 관계 지향적인 세계관을 반영한다. 예를 들어, 김상욱과 유지원의 『뉴턴의 아틀리에』는 과학과 예술의 관점을 조화시켜 이러한 공존과 상호관계성을 밀착시키는 책의 정신을 명확히 보여준다. 그들에 의하면, 책은 우리 삶의 모든 현상이 물리학적 현상인 동시에 디자인이며 예술이다. 나아가 그들은 이 주제에 천착하여 ‘나와 너, 나와 그것’이 분리되지 않고 전일성으로 유지되는 세계관을 드러낸다. 특히 결정론적 세계관이 불확정성과 비국소성(non-locality)으로 바뀌는 양자역학적 관찰을 통해, 인간과 세계가 긴밀하게 상호 관련되어 있음을 확증한다. 경계가 사라진 공존의 정신이야말로 로제 소설에서 ‘낭독’이라는 행위가 만들어내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적 연대와 일치한다. 이들의 견해를 종합하며, 낭독이라는 행위는 타자와 나 사이의 견고한 경계를 허물고, 서로의 존재를 비국소적으로 연결하는 통로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책이 다양한 삶의 연결고리로 기능한다는 것으로 집약된다. 특히 언어학자인 유지원에 따르면, ‘낯선 언어’는 사고의 간극을 만들어주고, 유연하게 이끈다. 유지원은 이렇게 말한다.


“낯선 언어는 서로 다른 것들 간의 뜻밖의 연결을 만들어 낸다. 이 연결을 자유자재로 적절히 구사하는 능력이 곧 창의력이다.”(13장, 213면)


동시에 김상욱의 다음 말도 유의미하다.

“언어로 모든 것을 다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은 왜 수학과 예술이 존재하는지 설명해 준다. 우주는 인간의 언어와 이해방식이 아니라 수학과 물리학의 방식으로 기술된다.”(222면)


김상욱은 보이지 않는 ‘연결선’이 사람과 사람, 사람과 사물 사이를 연결하여 상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과학적 관점에서 서술한다. 특히 여기서 ‘언어’는 책에 쓰인 ‘단어’에 가깝다. 요컨대 이러한 관점들은 책이 다양한 삶의 연결고리로 기능한다는 로제의 논지와 일맥상통하며, 책이 단순한 정보 전달을 넘어 창의적 사고와 새로운 관계망을 형성하는 기제임을 보여준다.




이와 유사하게 삶과 죽음의 전일성에 주목한 글도 있다. 김지수의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이다. 이 책에는 삶의 끝을 기다리는 노인(이어령)의 ‘말’이 젊은이에 의해 ‘글’(김지수)로 옮겨져 다시 ‘책’으로 태어난다. 이 과정은, 죽음과 삶이 조화로운 순환을 이루는 모습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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