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커 파머, 김찬호역. 글항아리, 2012
원제:Healing the Heart of Democracy(2011).
바다에 던져진 유리병 같은 어느 책의 2023년 소생
2014년 8월 광화문. 당시 세월호 특별법 제정 촉구 단식 농성을 벌이던 유력 정치인 옆에 놓였던 한 권의 책이 화제였다. 어떤 사람들은 이 책이 삶의 곡기를 끊으면서 지켜내야 할 절실한 투쟁을 웅변한다고 생각했다. 또 다른 이들은 이 책이 죽음을 불사하며 삶의 가치를 시위하려는 인간과 생의 가치를 상실하는 세상을 이어주는 상징 같다고 여기기도 했다. 이념과 세계관이 어떠하든 이 책은 삶이 가볍게 끝나지 않아야 한다는 인간의 간절한 탄원을 옹호한다는 것에 충분히 공감했었다. 그렇게 알려진 그 책은 파커 J. 파머(Parker J. Palmer, 1939)의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이었다.
저자 파커 파머는 미국 사회를 교육 문제로 관찰 분석하며 대안을 모색하는 사회 운동가이다. 그의 주장은 교육의 핵심 가치가 ‘사랑’에 근거한 용기를 불어넣는 것이어야 한다는 데 천착한다. 그의 또 다른 책 《가르침과 배움을 위한 영성》에서도 이런 관심이 명확히 드러난다. 이처럼 사랑과 용기에 근거한 사회의 갱신을 주도하는 저자의 관심은 이 책에서도 잘 드러난다.
특히 저자는 광화문 농성장의 일화를 통해 글쓰기로 이 세계에 참여하려는 이들을 권면한 적이 있다. 그는 어느 책이든 ‘바다에 던져진 유리병’ 같을 때가 많지만 어떤 글이든 자신도 모르는 시공간을 넘어 누군가에게는 ‘갈라지기만 하는 세계의 긴장’을 오히려 끌어안는 용기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가 하고 싶은 일(글쓰기)이 당장 어떤 결과가 나오지 않더라도 희망을 잃지 않고 지속적으로 글을 쓰라’는 것이다. 진심으로 남긴 글은 언젠가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의 손에 들려 세계 어딘가에서 희망의 불꽃을 쏘아 올려진 작은 공으로 살아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는 이 책을 통해 개인의 아픔을 사회적 연대로 공감하고 나아가 정치적으로 극복하도록 용기를 북돋는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정치가 긴장과 갈등의 시대를 함께 버텨내야 하는 인간의 공동체적 용기를 채근하는 정치권면서로 충분하다. 2023년 이 책을 다시 소환하는 이유다.
마음과 용기의 관점에서 해석한 민주주의의 자기 치유
우리가 알듯이, 역사는 ‘비통한 자들’, 그 땅의 사람들에 의해 정중동(靜中動)으로 흐른다. 강물이 흐르듯 고요하게 그러나 역동하며 생동한다. 이미 잘 알려진 대로, 이 책은 민주주의라는 정치 체제의 본질을 되물으며 저자의 현실에서 답을 찾아가려는 사회운동의 한 증표다. 저자는 오늘의 미국 정치 현실을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협곡 같다는 평가를 기꺼이 수용한다. 그 상황에서 파생하는 개인과 사회의 긴장을 주저 없이 대면한다. 이런 비통한 정치 현실 속을 당차게 걷기를 자극한다. 뿐만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비통한 자들은 서로서로 그 마음을 다독이길 호소한다. 부서져버린 정치의 심폐소생술을 위해 힘겨운 두 발을 함께 내딛자고 권면한다. 그리하여 오늘날 정치가 환대와 배려를 북돋는 삶을 창발 하는 용기(勇氣, courage)의 발현체가 되도록 애쓰자고 제안한다.
이 책에서 용기는 마음(cor)과 연동된 저자의 핵심 개념이다. ‘마음’은 정치의 바다를 항해하는 삶을 안내하는 좌표와 같다. 보이지 않으나 존재하고, 잡히지 않으나 꿋꿋이 거기 머물러 있는 표지다. 용기는 이 마음의 내비게이션을 따라 예측불가한 이 세계를 향해 전진하는 내적 동기다. 이처럼 저자의 통찰은 그 마음의 좌표를 따라 용기로써 정의에 안착하는 것, 그 ‘결실이 ‘정치’라는 것을 아우른다.
따라서 이 책의 저술 목적은 명확하다. 민주주의 마음을 치유하고 갱신하기 위함이다. 마음이라는 표현은 민주주의의 본질을 되짚어보고 그것에 기반한 정치를 갱신하려는 의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인간의 마음처럼 정치의 마음도 언제나 부서지고, 비통한 상황에 놓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저자가 말하는 ‘민주주의의 마음’은 필연적으로 ‘정치의 마음’으로 가시화될 수밖에 없다. 책의 결론인 8장은 저자의 권면이 잘 갈무리되어 있다. 그 결론적 권면은 ‘희망’이다. 이 희망은 마음이 부서진 자들을 위협하는 숱한 긴장 상태에서도 또 다른 마음이 부서진 자들을 향해 자기 마음을 여는 용기로 창출된다. 이로써 나와 타인이 어우러진 민주주의의 마음은 치유되고 힐링된다. 민주주의 정치에 대한 저자의 한결같은 낙관이다.
한편 그의 또 다른 주장은 정치가 ‘마음’을 주목할 때 비로소 정치답다는 것이다. 저자는 ‘산산이 부서진 마음’을 보듬어 ‘새로운 세계를 향해 다시 열어주는’ 권면이 민주주의 정치의 목적이라고 논증한다. 따라서 이 주장에 의하면, 신(God)의 정치이든, 인간의 정치이든 모든 정치는 ‘마음이 무너져 비통해진 인간’을 일으켜 세우는 강력하고 공인된 물리력인 것이다.
하지만 저자의 통찰은 시대를 막론하고 현실 정치는 이런 힘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다는 관점을 배제하지 않는다. 자기 이익에만 기반한 이기적인 행위로 점철되어 왔기 때문이다. 오늘날 이 점은 더욱 가속화된다. 이익이 수반되지 않을 때 정치는 스스로 기만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권력을 무력으로만 사용하려는 어그러진 행태로 무모하게 진격할 뿐이다. 오늘날 민주주의 정치에서 인간을 그저 ‘한 표를 가진 도구’로만 이해하려는 경향이 이를 방증한다. 그런 점에서 저자가 원서의 제목에 ‘힐링 Healing’이라는 단어를 쓴 것은 어쩌면 아픈 이들이 병원을 찾듯이, 질병에 걸린 정치도 치유가 필요하다는 주장으로 들린다.
힐링, 마음, 민주주의 그리고 용기
이 책은 먼저 번역본의 표지를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 표지는 여러 상징들이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선 무채색 표지가 인상적이다. 그 위에 네 개의 손이 겹쳐져 있다. 두 사람의 손이 번갈아 포개져 있다. 손 아래 손, 손 위에 손이 감싸고 있다. 그 손들 위로 한글 제목이 걸쳐져 있다. 아마도 손이 겹쳐진 곳에서 마음을 이야기하겠다는 것이리라. 손과 마음은 한 곳에서 만난다(참고. 96쪽 ‘손을 잡고 오르리’).
한편, 이 즈음에서 원서의 제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원제는 ‘Healing the Heart of Democracy.’이고 그 부제는 ‘The Courage to Create a Politics Worthy of the Human Spirit.’이다. Healing the Heart of Democracy 제목에서 세 개의 단어를 주목해야 한다: Healing, Heart, Democracy. 즉 치유/힐링, 마음, 민주주의다. 직역하면 ‘민주주의의 마음의 치유’다. 풀어 읽으면 다음과 같은 문장이 가능하다. ‘민주주의 정치의 마음은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치유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 Healing’을 원문 그대로 ‘힐링’으로 옮겨도 좋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날 사회적 관심사에 따른 의미 범주를 고려하면, 힐링이 훨씬 더 포괄적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만약, 그렇게 바꿔 읽으면 ‘갈수록 피곤해지는 민주주의의 마음을 힐링하는 정치’라는 뜻도 가능해질 것이다. 어쩌면, 저자가 선택한 ‘힐링’이라는 단어는 ‘민주주의가 어그러져 망가진 상태’ 너머 ‘민주주주의 피곤함’을 더 연상했을 수도 있다.
이처럼 이 책에서 사용한 ‘Healing’은 중의적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 망가지거나, 피곤해진 상태의 회복이다. 다시 말하면 한편으로 민주주의는 치유가 필요한 어그러진 상태이라는 의미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민주주의가 마음이 부서져 피곤해진 자를 힐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저자는 치유, ‘힐링’을 아우르며 ‘마음’과 적절하게 어울리는 수사적 기교를 보여준다. 민주주의, 마음, 힐링은 이 책 전체 내용을 견인하는 동기어(Leitwort)로 기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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