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존재의 시원’으로
회귀하여 찾은 미래

윤대녕, 「말발굽 소리를 듣는다」. 1993.

by 푸른킴

소설의 등장 배경과 주제

윤대녕의 「말발굽 소리를 듣는다」(1993, 『은어낚시통신』 수록)는 1990년대 초, 한국 사회가 문화적 전환기를 맞이하던 시점에 발표되었다. 당시 그룹 「서태지와 아이들」은 파격적인 춤과 랩, 의상으로 혜성같이 나타나 대중음악계에 일대 혁신을 일으켰다. 이후 그들의 여파는 대중문화 전반으로 확산하여 기존의 이념적 질서를 넘어 새로운 감수성과 정체성을 모색하던 흐름으로 이어졌다. 큰 틀에서 보자면, 80년대 말 등단한 윤대녕도 이런 혁신에 이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등장은 이념과 운동에 의한 문화 양산의 시대가 저물고, 인간의 내면, 삶의 불안전한 현실과 그에 대응하는 인간 본연의 존재 이유에 천착하는 내면 문학의 등장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이런 혁신으로 문학은 인간의 존재의의를 사유하는 양상으로 방향을 선회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소설이 ‘청년문화의 또 다른 정신적 기원’으로 불리며 회자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의 소설은 한마디로, 우리 안에 도대체 무엇이 들어있는지 그 심연을 파고 들어보겠다는 것이다. 이처럼 존재의 내면으로 ‘회귀’는 과거와 미래를 잇는 그만의 방식이다.


1993년 발표된 소설, 「말발굽 소리를 듣는다」는 ‘회귀’의 의미를 새롭게 조명한 작품으로 평가받았다. 내가 보기에 이 소설에 가장 흥미로운 것은 바로 이 ‘회귀’의 의미다. 사실, 윤대녕이 말하는 ‘회귀’는 단순히 과거를 찬미하는 복고 지향 정서는 아니다. 오히려 그는 미래로 치닫는 의미를 투사한 듯하다. 다시 말해, 미래를 향하려는 인간은 과거의 시원으로 되돌아가려는 내면적 갈망을 주시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그의 동력인 것이다. 따라서 단도직입으로 말하자면, 이 소설의 주요 개념인 ‘회귀’는 미래로 가는 길을 함의하는 소설적 장치다.


결과적으로 1990년대의 시대 전환기에 등장한 윤대녕의 소설은 오늘날, AI와 같은 ‘유사인간’이 출현한 새로운 문명 전환의 시점에서 다시 읽힐 가치가 있다. ‘레트로’의 부흥 또한 그러한 회귀적 감수성의 동시대적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윤대녕은 과거와 미래의 교차 영역으로서의 인간의 내면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다. 이를 토대로 미래로 나아가는 변혁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결국, 인간 존재의 시원을 향한 문학적 갈망이야말로 미래를 여는 문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이 소설은 인간이 미래를 꿈꾸는 방식 자체가 과거 상상 속 자아를 다시 호출하는 일임을 문학적으로 입증한다. 인간은 언제나 기억의 파편 속에서 미래를 설계하고, 과거의 이미지를 토대로 자기 존재를 재구성하는 데 익숙하다. 무엇보다 1990년대의 변화된 문화 토양은 이러한 ‘회귀의 미학’을 가능하게 했다. 특히 과거로의 회귀는 개인의 삶에서 드러난 역사뿐 아니라, 한때 상상 속에 머물렀던 잠재적 기억까지 소중히 여기는 사회적 실존 인식으로 이어졌다는 것도 주목할만하다.


정리하면, 이 소설에서 윤대녕이 말하는 회귀는, 미래로 가는 길로서, 그것은 단순히 과거로 돌아가 그 옛 기억을 떠올려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화되었으나 잊힌 자아와의 재회(상상이나 꿈을 통해) 속에서 새롭게 생성되는 삶의 동력을 의미한다. 그 잠재된 의식과 재회를 통해 그 의식을 새롭게 일깨울지, 아니면 과감히 털어버릴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의 과거가 불안정한 미래를 향한 동력이 되도록 재서술하는 것이다. 과거로의 회귀는 이른바, 시간의 지평인 것이다. 그래서 미래는 곧 과거로부터 오는 것이며, 과거는 미래의 미메시스다. 이처럼 윤대녕의 ‘회귀’는 종교적 윤회나 전생 신앙과 구별되면서, 첨단 문명 속에서 사라져 가는 인간의 감각과 내면의 시간성을 되살리려는 인문철학적 개념어라 할 수 있다.


소설의 구성과 전개 : “말발굽 소리를 듣는다”

윤대녕의 「말발굽 소리를 듣는다」(이하 ‘말발굽’)는 ‘회귀’라는 주제를 존재의 시원으로 되돌아가려는 내면적 운동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이 소설은 겉으로 보기엔 일상적 개인 서정 소설의 형태를 띠지만, 그 내면에는 기억과 시간, 세대 간의 유전적 운명이 수직으로 교직 된 순환적 서사 구조가 자리한다. 이제 나는 본문 자체의 흐름을 따라가며, 작품이 어떻게 ‘회귀의 미학’을 구체화하는지를 생각해 보려 한다.


(1) 읽기 방법과 도입부

여기서는 본문 중심 비평의 관점을 따른다. 이는 작가의 의도나 독자의 해석을 넘어, 텍스트 자체가 발화하는 의미망을 따라가는 방식이다. 즉, “본문이 무엇을 말하는가?”라는 질문을 중심에 두고, 작중 서사와 언어의 결을 그대로 따라가 보려 한다.


소설의 도입에서 주인공 ‘나’는 평범한 남성으로 등장한다. 그는 아내의 심부름으로 커피를 사러 나가는 길에, 우연히 경복궁을 거닐며 오후의 햇살 속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낸다. 그런데 그 평온한 일상 한가운데, 그는 문득 한 마리 말을 보게 된다.


“그리고 거기 아내와 나와 성지에서 나는 한 마리 말을 보았다.” (111면)


주목할 것은 그가 이전에도 여러 번 경복궁을 찾았지만, 그때 처음으로 말을 ‘보게 되었다’는 점이다. 심지어 그는 “지나가는 일본인들의 발소리마저 말발굽 소리처럼 들린다”라고 말한다. 즉, 우연한 시각적 발견이 청각적 환상으로까지 확장되면서, 그의 감각 전체가 어떤 기억의 문턱에 서게 되는 것이다.


이 우연한 ‘말의 발견’은 이후 지하철, 집, 저녁 시간의 텔레비전 장면으로 이어지며 계속 주인공의 의식을 점유한다. 작가는 그 이유를 곧바로 제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독자가 그 의미를 시간의 역류 속에서 서서히 체험하도록 구성한다. ‘말’이라는 표상이 주인공의 무의식 속 깊은 기억을 자극하며, 그를 자기 존재의 과거로 이끄는 매개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2) 소설의 시간 흐름과 회귀의 구조

소설의 현재 시점은 아내와의 일상적 대화로부터 시작되지만, 곧 회상의 시간으로 전환된다. 주인공은 ‘말’의 기억을 통해 아버지와의 관계로, 더 나아가 집안의 오래된 전설로 되돌아간다. 이 전환은 단순한 플래시백이 아니라, 존재의 근원을 더듬는 내면적 회귀의 서사 장치로 기능한다.


그의 회상 속에서 ‘말’은 아버지의 ‘차(車)’로 대체된다. 즉, 말과 차가 동일한 의미권 안으로 들어오며, 이동·진행·운명이라는 상징적 층위를 공유하게 된다. 주인공의 기억 속에서 아버지는 이렇게 말한다.


“본디 우리 집안은 역마살이 껴 있다는 게야. 말의 업을 지고 재가에 다시 난 사람들이란 게야... 그렇게 달리다 보면 앞서가고 있는 또 한 마리의 말이 보이리란 말씀이었어.” (118면)


이 대목에서 ‘말’은 단순한 동물이 아니라 세대 운명의 표상이다. 주인공은 아버지의 기억을 통해 자신의 존재가 이미 어떤 반복된 운명, 즉 ‘달림’과 ‘회귀’의 궤적 속에 있음을 깨닫는다. 이 회상은 더 멀리, 할아버지와 백부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말’은 세대를 이어 내려오는 상징적 유전이며, 각 인물은 그 말을 타고 자신만의 ‘길’을 달린다. 다시 말해, 서사는 현재 → 과거 → 대과거로 흐르다가, 다시 현재로 회귀한다. 즉, 시간의 직선적 전개가 아니라, 원형적 순환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주인공이 말발굽 소리를 ‘듣는다’라는 것은, 단순히 과거를 기억한다는 뜻이 아니라 세대의 기억이 자신의 몸 안에서 되살아나는 청각적 체험을 의미한다. 그가 듣는 것은 실재의 소리가 아니라, 존재의 내면에서 되풀이되는 시간의 울림이다.


결국 ‘말발굽’의 서사에서 회귀는 기억의 복원이자 존재의 재생이다. 주인공은 말을 통해 자신의 뿌리, 아버지의 운명, 더 먼 세대의 시간과 만난다. 그리고 이 만남의 여운 속에서 소설은 다시 현재로 돌아와 닫힌다. 과거를 거슬러 올라간 그의 의식은 다시 오늘의 자리로 회귀하며, 그 여운 속에서 ‘말발굽 소리’는 여전히 귓가에 남는다.


이처럼 ‘말발굽’은 윤대녕이 1990년대에 제시한 ‘회귀의 미학’을 가장 명확하게 구현한 작품이다. ‘말’은 인간의 기억과 시간, 그리고 존재의 시원을 잇는 매개체로 기능하며, 주인공의 귀환 서사는 곧 인간이 자기 내면의 기원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을 상징한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흐름으로 표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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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은 시간의 흐름을 의미한다.


위의 표에서 보듯이, 이 소설의 전체 구조는 직선이 아니라 원형에 가깝다. 주인공의 의식은 현재에서 출발해 대대과거까지 회귀했다가, 다시 현재로 돌아오면서 완결되는 순환적 시간의 체험을 겪기 때문이다. 또한, 이 구조는 단순한 플래시백이 아니라, 기억의 심층에서 발생하는 무의식적 반복이며, 윤대녕 소설의 시간론적 핵심이다


한편, 이 흐름에서 중요한 변곡점은 ‘말(馬)’이 가족의 운명 전체를 주도한다는 인식이다(126면).


“잠시 후 우리는 말발굽 소리가 안방을 향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이 소리는 단순한 환청이 아니라, 세대의 기억이 되살아나는 징후다. 그 순간 백부가 말을 타고 나가 버리고, 마치 말이 되어 돌아오듯 4일간 마구간에서 머무른다. 그는 말과 합일된 존재로서, 새로운 삶의 형태—즉 ‘개벽’을 경험한다. 백부의 귀환은 단순한 신비 체험이 아니라, 과거로의 회귀를 통해 존재가 다시 태어나는 사건이다.


이후 서사의 초점은 다시 대과거로, 아버지의 세계로 돌아온다. 아버지는 생계를 위해 차(車)를 사지만, 그에게 차는 여전히 말의 대체물일 뿐이다. 그는 휴일에도 차를 몰고 나가며, 모든 차에 ‘말’의 이름을 붙인다(131면). 이 반복은 백부의 체험이 세대를 건너 아버지에게로 전이된 형태다. ‘앞서가는 말이 보일 때까지 달려야 한다’라는 집안의 운명처럼, 아버지 또한 달림을 멈추지 못한다.


주인공의 회상은 결국, 아버지의 차 사고 장면(133면)에 이르러 절정을 맞는다.


“사고가 났었어요, 사고가, 흐흐. 한데 사고가 아니기도 하구....흐흐.”


아버지는 이 사고를 통해 또 한 번의 개벽을 경험한다. 죽음과 삶의 경계를 통과한 그는 이제 ‘자신이 평생 좇던 말이 곧 자기 자신이었다.’라는 깨달음에 이른다.


“아버지가 평생 운명의 길을 좇아 달리며 잡으려 했던 그 앞서가고 있다던 말은 바로 아버지 자신이었으며, 그날 사고를 내고 집으로 돌아오던 그때에 이미 아버지는 그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134면)


이제 소설의 시간은 여기서 다시 현재로 회귀한다. 주인공은 잠에서 깨어났지만, 실은 처음부터 깨어 있었다. 그의 회귀는 꿈과 현실, 과거와 현재를 가르는 경계 자체를 지워버린다. ‘말발굽 소리를 듣는다’라는 것은 결국 존재의 내면에서 되풀이되는 시간의 울림을 듣는 일이다.


그는 더는 과거에 갇힌 존재가 아니다. 백부와 아버지의 개벽을 잇는 새로운 세대의 주체로서, 그는 또 한 번 길을 떠난다. 그 길은 목적지가 없는 여정이며, 오직 회귀를 통해 도달할 수 있는 새로운 출발이다. 윤대녕은 이 결말을 통해, 회귀가 곧 변혁이며, 과거로부터 오는 미래의 시작임을 보여준다.


(3) 소설의 주제

이 작품의 주제를 규정하는 데, 여러 평론가가 공통으로 언급한 핵심 개념은 바로 ‘존재의 시원으로의 회귀’이다. 이 말은 평론가 남진우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윤대녕 소설의 특질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윤대녕의 소설은 일관되게 어떤 한 지점을 가리켜 보인다. 범박하게 말해서 현실과 환상, 현재와 시원이 만나는 순간이라 할 수 있다. 특히 그 지점은 짙은 안개에 가려져 있다. 자욱한 안개의 베일을 뚫고, 혹은 그 유동하는 안개의 흐름을 거슬러 그의 소설 속 인물들은 그 지점(주. 원시의 시원점)을 향해 나아간다.”(287면)

이런 주장처럼 「말발굽」의 주인공인 ‘나’ 역시 현실의 시간 속을 흐르면서 동시에 그 너머의 어떤 지점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이다. 그는 현재의 일상에서 우연히 ‘말’을 발견하고, 그 말을 매개로 과거의 기억과 세대의 시간을 차례로 거슬러 올라간다. 결국, 그 여정은 인간이 자기 존재의 근원을 탐색하고, 잊힌 시원으로 귀환하려는 내면적 움직임으로 읽힌다. 그런 의미에서 「말발굽」은 윤대녕 문학의 중심 주제인 ‘존재의 시원으로의 회귀’를 가장 선명하게 형상화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는 데 이견이 없다.


그렇다면 ‘존재의 시원으로의 회귀’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주인공의 마지막 독백, “내가 여기가 아닌 전혀 다른 곳에 가 있을 것 같아서 말이지.”라는 문장 속에 함축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대사는 곧 작가가 지향하는 정신적 성소(聖所), 즉 현실과 초현실이 만나는 지점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실제의 공간이 아니라 의식의 깊은 심층, 현재의 삶과 과거의 삶이 맞닿는 경계이다. 이런 점에서 철학적으로 윤대녕의 시원은 플라톤의 원형 관념보다, 니체가 말한 영원회귀, 내면화된 심상에 가깝다.


한편, 주인공은 이 경계점을 통과하는 순간, 자신을 ‘나’로 있게 한 근원적 사건—기억과 운명의 원점—으로 회귀한다. 바로 이 점에서 윤대녕에게 회귀는 단순히 과거로의 복귀가 아니라, 존재의 본질을 새롭게 갱신하는 ‘개벽의 체험’인 셈이다.


제목 「말발굽 소리를 듣는다」는 바로 이 회귀의 계기를 상징한 표현이다. 현실 속에서 우연히 들린 ‘말발굽 소리’가 주인공에게 무의식의 문을 열고 과거로 진입하게 만든다. 그것은 일상적 감각 속에서 비일상적 세계로 통하는 징후의 소리, 즉 경계선을 뚫고 나아가게 하는 결정적 신호다. 따라서 이런 점에 근거하면, 이 소설의 주제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일상의 시간에서 벗어나 자기 존재의 근원을 새롭게 발견하고,
그 의미를 다시 획득하려는 인간의 여정.”


결국, 「말발굽」은 현실에서 시원으로, 시원에서 다시 현실로 회귀하는 순환의 서사 속에서, 인간이 자기 존재의 근원을 자각하고 재탄생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이야기다. 윤대녕의 소설은 그 과정을 통해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지금 어디에서, 어떤 소리를 듣고 있는가?” 즉, 당신이 나아가는 그 미래는 어디서부터 기원했는가? 말이다.


소설에 대한 비평

한 시대를 소설 안에서 자기 사상으로 형상화했던 윤대녕의 작품은, 그가 인간 존재의 근원에 대한 사유를 일관되게 추구했다는 점에서 여전히 주목할 가치가 있다. 한 대담에서 그는 자신의 문학적 궤적을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다. 초기에는 사회적 현실에 관한 관심에서 출발했으나, 이후에는 불교적 세계관과 신화적 상상력, 나아가 시간의 본질에 관한 탐구로 중심을 옮겼다고 한다. 더 나아가 그는 후기 산업사회 속에서 인간과 자본, 그리고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어떻게 변형되는지를 주된 관심사로 삼았다고 언급했다.


그의 ‘존재의 시원으로의 회귀’ 개념은 단순한 회상이나 복고가 아니다. 윤대녕은 그것을 “일정한 주기마다 원형, 즉 존재의 본질로 되돌아가 그것을 회복하는 일”로 규정했다. 이러한 회복이 이루어지는 장소를 그는 ‘성소(聖所)’, 즉 인간이 상실한 자기 정체성을 다시 찾는 내면의 자리로 이해했다. 따라서 그의 시간에 관한 탐구 역시, “인간이 각각 다른 시간대에 속해 있으면서도 동일한 공간을 배회한다”라는 존재적 모순을 극복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말발굽」이 발표된 이후에는 비판적 견해도 제기되었다. 김경수(“윤대녕 소설을 비판한다,” 「소설과 사상」, 1995)는 윤대녕의 작품이 보여주는 초월적 세계관에 문제를 제기하며, 작가가 현실적 삶의 조건이나 사회적 맥락에 대해 구체적인 입장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는 특히 윤대녕의 소설 속 인물들이 이미 초월적 회귀를 예정된 운명처럼 수행하고 있으며, 따라서 현실을 갱신하거나 전복할 가능성이 차단되어 있다고 비판했다. 다시 말해, 그의 작품이 ‘영원회귀’의 세계를 꿈꾸면서도 그 안에 고통과 투쟁의 과정이 빠져 있다는 것이다. 또한, 김경수는 이러한 회귀의 매개로 ‘여성’을 설정하면서도, 여성 역시 독자적 주체로 드러나지 못한 채 상징적 통로로만 기능한다고 비판했다.


한편, 김진규가 지적한 것처럼 윤대녕의 회귀 개념은 니체의 실존적 ‘영원회귀’나 엘리아데(M. Eliade)의 제의적 ‘영원회귀’와는 방향이 다르다. 엘리아데에게 영원회귀는 세속의 시간을 주기적으로 갱신하며, 현실의 고통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그것을 새로운 삶으로 전환하는 제의적 반복이었다. 반면 니체에게 영원회귀는 동일한 삶이 끝없이 반복된다고 가정할 때, 그 반복을 기꺼이 긍정할 수 있는가를 묻는 실존적 시험이자 윤리적 결단이었다. 이 두 사상은 성격은 다르지만 공통으로 ‘반복’을 통해 현실을 근본적으로 갱신하거나 존재를 전면적으로 재구성하는 힘을 상정한다.


그러나 윤대녕의 회귀는 이러한 실존적 혹은 제의적 변형의 차원과는 거리가 있다. 그의 회귀는 고통의 세계를 변형시키거나 현실을 새롭게 창조하는 순환이라기보다, 내면적 정화와 존재의 회복이라는 개인적·정서적 차원에 머무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이런 점에서 그의 ‘회귀’는 니체적 실존 변화나 엘리아데적 세계 갱신과는 구별되는, 보다 문학적이고 사적(私的)인 회생의 서사로 읽힌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따라서 그의 ‘영원회귀’는 실존의 비극을 견디는 제의적 반복이라기보다, 한 개인의 정신적 회복과 자기 존재의 재생을 지향하는 문학적 순환으로만 기능한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이 지점에서 그의 회귀는 종교적 구원의 근원을 탐구하기보다 문학적 구원론으로 ‘회귀’한다고 할 수 있다.


정리하면, 「말발굽 소리를 듣는다」는 비록 초월적이고 내면적인 서사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는 인간이 시간의 상처를 치유하며 자기 존재의 근원을 복원하려는 개인 사유의 궤적이 담겨 있다. 윤대녕의 세계는 현실을 초월한 이상으로의 회귀가 아니라 현실의 피로와 분열을 통과하여 다시 시원의 자리로 귀환하려는 인간의 근원적 욕망을 문학 안에서 형상화한 세계라 할 수 있다.


‘존재의 시원에로의 회귀’라는 주제의 본뜻과 인간

여러 비판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의 장점은 우리가 누구나 자신을 끊임없이 돌아보아야 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한다는 점이다. 자기 자신을 지난하게 되돌아보는 일, 그것이야말로 오늘의 시대에 더욱 절실히 요구되는 과제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이 보여주듯, 인간은 어떤 계기를 통해—그것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자신의 내면세계로 다시 회귀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과한 뒤에는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 윤대녕은 그 가능성을 소설적 체험을 통해 보여주었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그렇다면, 새로운 존재로 변화하기 위한 결정적 계기는 무엇일까? 작가의 의도를 추론해 본다면, 이는 개인 경험을 통해 일상적인 삶을 통과하여 마침내 자신 존재의 가장 깊은 밑바닥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때—거기서 발견되는 ‘자기 근원’의 자리, 곧 존재의 시원에 닿는 지점이 이 계기의 원동력이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인간의 변화는 단순히 경험의 축적에서만 비롯되지 않는다. 오히려 경험은 종종 인간을 현재의 삶 속에 더욱 단단히 붙잡아두는 힘으로 작용한다. 존재의 변화는 경험을 긍정할 때가 아니라, 그것을 넘어설 때 일어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이 ‘경험’이라는 소재를 중심축으로 삼고 있다는 점은 작가의 의도와 별개로 다소 한계를 드러낼 수도 있다.


인간이 자기 존재의 시원으로 되돌아가는 길은 애초부터 물리적으로는 막혀 있다. 과거로 돌아가 존재를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 회귀란 과거로의 귀환이 아니라, 현재의 자리에서 자신을 새롭게 인식하고 변형시키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내가 ‘존재의 시원’과 얼마나 가까운가를 되묻는 것이다. ‘처음으로(ad fontes)’ 돌아간다는 말은 과거의 시간 속으로 빠져드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스스로를 새롭게 창조하는 힘과 흐름을 자각하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자기 초월의 의지이자, 새로운 가능성을 받아들이는 존재의 개벽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 시대는 과거로의 회귀에 매혹된 시대다. 복고와 레트로의 유행은 문화의 한 흐름이 되었지만, 그것이 곧 존재의 성찰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과거를 향한 회귀가 진정한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그 회귀가 ‘존재의 근원’을 재발견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단순한 추억의 복원이나 정서적 향수만으로는 어떤 새로운 삶도 열리지 않는다. 과거는 이미 지나간 시간이며, 그 자체로는 미래를 열어줄 수 없다.


소설 「말발굽」은 우리에게 그 사실을 조용히 일깨운다. 과거로 돌아가려는 마음은 결국 자신을 새롭게 하기 위한 현재적 사유의 실험이어야 한다. 존재의 시원으로의 회귀란, 잃어버린 시간을 다시 소유하는 일이 아니라, 그 시간을 통해 자기 존재의 가능성을 새로이 발견하는 일이다. 이 오래된 소설은 그러한 내면의 회귀를 통해, 오늘 우리 시대가 빠져 있는 복고적 회상과 과거 지향의 정서를 다시 사유하게 하는 하나의 거울로 남는다.


회귀의 현대적 연동 개념

오늘날 회귀의 개념은 윤대녕이 제시했던 범위를 훨씬 넘어, 새로운 현대적 의미를 획득한다. 더는 개인의 내면으로 되돌아가는 사유에 머물지 않는다는 말이다. 기억, 기술, 감각, 언어, 그리고 공동체의 층위에서 서로 얽히며, 현대적 연동의 의미망을 이룬다. 다음과 같은 점에서 그렇다.


첫째, 회귀는 기억의 윤리다.
자기 시원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곧 타자의 기억과 마주한다는 뜻이다. 망각한 목소리를 다시 듣는 일은, 존재의 근원을 함께 감당하려는 윤리적 행위다.
둘째, 회귀는 기계문명 속 인간적 시간의 회복이다.
AI와 가속의 시대 속에서 윤대녕의 회귀는 잃어버린 ‘느림’과 ‘리듬’을 되찾는 문학적 저항으로 읽힌다. ‘말발굽의 울림’은 아날로그적 생명 리듬, 인간의 고유한 속도의 상징이다.
셋째, 회귀는 소리의 존재론과 맞닿아 있다.
윤대녕의 인물은 ‘보는 사람’이 아니라 ‘듣는 사람’이다. 말발굽의 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존재가 자신을 스스로 드러내는 진동의 순간을 감각하는 일이다.
넷째, 회귀는 글쓰기의 시간과 이어진다.
글을 쓴다는 것은 이미 지나간 언어를 현재 속으로 되살리고, 과거의 흔적을 미래의 문장으로 옮기는 행위다. 그때 회귀는 주제이기 이전에 형식 그 자체의 리듬으로 구현된다.
마지막으로, 회귀는 개인을 넘어 공동체적 기억의 복원이다.
개인의 시원은 곧 세대와 공동체의 시원이며, 회귀의 여정은 ‘나의 이야기’를 ‘우리의 이야기’로 되돌리는 과정이다.


결국, 회귀는 윤대녕의 소설이 제시한 인간학적 사유를 넘어, 기억의 윤리와 기술 문명 비판, 청취의 철학과 글쓰기의 실천, 그리고 공동체적 삶의 회복까지 포괄하는 인문학적 복합 개념으로 확장된다. 그것은 과거로 돌아가는 일이 아니라, 잃어버린 인간적 시간의 감각을 되살리려는 조용한 지적 몸짓이다.


이처럼 회귀의 개념이 1990년대를 지나 21세기에 예측 불가할 정도로 빠르게 변화하는 현대적 삶의 여러 층위로 확장될 때, 윤대녕의 세계는 단지 한 시대의 서정이 아니라, 오늘의 인간이 시간 속에서 자신을 성찰하는 거울로 다가올 수 있다. 그때 그의 ‘회귀’ 관념은 철학이면서 동시에 일상의 감각으로 기능한다. 그리고 그 고요한 여정은 우리가 모두 지나야 할 내면의 귀환의 길을 모사한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 구체적인 모사의 형태는 바로 ‘글쓰기’다. 오늘날 글쓰기는 내면으로 회귀하여 지금-여기로 끌어올리는 수련적 행위라는 점에서 ‘회귀’의 철학적 의미를 그대로 반영한다.


회귀와 글쓰기의 의의

21세기의 인간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지만, 그 미래는 언제나 과거의 자기 상상으로부터 솟아오른다. 인간이 미래를 꿈꾼다는 것은 곧 과거의 기억을 다시 써 내려가는 일이며, 그 기억 속 상상은 미래를 가능하게 하는 근원적 토대다. 역사가 사회적 미래 전망의 기반이라면, 개인의 작은 상상의 기억은 그 사람의 미래를 관조하는 태도의 기저를 이룬다. 인간은 미래를 향한다고 하더라도, 본질적으로 자신이 이미 써 내려온 과거의 문장들 속에서 다시 출발한다.


내가 보기에, 「말발굽」은 그러한 시간의 역설을 문학적으로 구현한다. 이 작품에서 회귀는 단순한 과거 회상의 과정이 아니라, 시간 그 자체를 다시 구성하려는 존재의 실천이다. 주인공이 말발굽 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잊힌 시간을 다시 감각하는 일이며, 과거의 자신과 미래의 자신이 한 울림 속에서 만나는 사건이다.


글쓰기에서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시간은 직선적으로 이동하는 흐름에 그치지 않는다. 인간의 의식 속에서 겹겹이 중첩되어 현존하는 동시적 층위를 형성한다. 과거와 미래는 분리되는 것이 아니다. 글쓰기라는 현재 행위에서 인식의 장(場)이 교합하며 서로를 비추며 교섭한다. 따라서 글을 쓴다는 것은 이미 지나간 언어를 다시 불러내어 현재 속에 되살리고, 동시에 아직 오지 않은 세계를 언어로 앞당기는 종교적, 철학적 행위다. 문학은 바로 그 교차의 현장이며, 글쓰기는 인간이 시간과 관계 맺는 가장 근원적인 프락시스(praxis)다.


다시 말해, 글쓰기는 그저 과거의 소재를 회상해서 현재로 소급하는 것이 아니다. 과거를 토대로 한 미래의 재구성이며, 인간이 자기 존재의 시원을 다시 체험하는 창조적 회귀다. 작가가 한 문장을 써 내려갈 때, 그 문장 속에는 과거의 기억과 미래의 가능성이 동시에 숨 쉰다. 글 쓰는 인간은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오르며, 자기 안의 시원을 다시 쓰는 존재다.


결국, 개인이든 사회이든 과거로의 회귀는 인간과 세계 존재의 시원에까지 이를 때 비로소 그 의의를 극대화할 수 있다. ‘아드 폰테스’—근원으로 돌아가라—는 단순히 과거로의 귀환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곧 올람(Olam), 즉 영원의 시간, 카이로스(kairos)의 순간에 닿으려는 지혜추구의 삶의 방식이다. 이 지점에서 종교와 철학이라는 이중 구조로 건축된 희망은, 인문학의 온전한 가치를 현재 우리의 삶의 자리로 견인하는 지혜를 반영한다. 근원으로 향하는 사유는 신학적 초월과 철학적 사색의 경계를 잇는 인문학의 다리이며, 그 다리 위에서 인간은 시간을 새롭게 배운다.


정리하면, ‘존재의 시원으로의 회귀’라는 윤대녕 소설의 주제는 시간의 순환을 인식하면서 과거와 미래를 이어 붙인 현재 글쓰기와 호응하는 진자 운동이다. 정리하면, 이 소설로 되돌아가면 글을 쓰는 인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는 반복과 변형을 감당하며, 그 안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새롭게 빚는다. 시간은 흐르지 않지만, 그 고요한 정지 속에서 세계와 인간은 계속 고요한 중에도 자신을 성찰한다. 그 고요함의 중심에서 —우리도 여전히, 들리지 않는 자신만의 말발굽의 울림을 듣고 있다.


결론- 회귀는 우리의 길을 복원한다

윤대녕의 「말발굽」은 과거의 언어로 미래를 써 내려가고, 미래의 상상으로 과거를 다시 부른다. 이것이 30년 전 윤대녕이 자기 소설에서 천착했던 존재/시원으로의 회귀가 21세기 인문학에도 유의미하게 성찰할 수 있는 사유와 맞닿은 부분이다. 그가 말한 회귀는 곧 미래로 나아가는 문학적 전략이다. 이 전략을 시대를 떠나 적절하게 응용하며 구사할 때, 문학은 여전히 인간과 세계의 시간성을 갱신하는 유일한 실천으로 남아 있다는 철학적, 종교적 세계관과 긴밀한 관계라는 것을 스스로 입증할 수 있지 않을까. 누구에게나 과거 자신만의 ‘말’이 존재할 것이니 말이다.


결국, 회귀는 단순한 개인적 내면의 귀환이 아니라, 기억의 윤리와 청취의 미학을 통해 인간적 시간을 복원하고, 타자와 세계의 시원을 함께 감당하려는 인문학적 행위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당신의 글쓰기는 과거로 돌아가 미래를 끌어올리는,
현재에서 일어나는 고유한 회귀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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