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또 다른 ‘너’를 찾아가는 여행
가을꽃들이 끝물이다. 꽃마다 계절을 따라 제모습대로 피다 지는데 가을에는 단연 코스모스가 두드러진다. 거의 가을에만 피는 이 꽃은 여름을 지나면서 햇빛보다 어둠이 길어야 피어나는 특성이 있다 한다. 또한, 대체로 시골길이나 흙길 주변에 많이 볼 수 있다. 무엇보다 이 꽃들은 색도 다양하고, 모양도 조금씩 다르고, 향기도 짙다. 이유인즉, 겨울이 오기 전에 씨앗을 만들기에는 계절이 너무 짧기에 벌과 나비를 서둘러 초대해야 하기 때문이란다. 어둠을 벗 삼아 짙은 색과 강한 향기를 만들어내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태생적 아픔을 간직한 꽃이다. 어쩌면 그처럼 청초하게 아름다운 이유는 꽃을 피워내야 하는 사명보다 치열한 자기 생존을 위한 싸움, 왜 피어야 하는지를 스스로 알고 있기 때문일지 모른다. 그 애틋한 존재 이유를.
일생(一生)을 사계절에 비유한다면, 나는 어느덧 여름과 가을 그 경계, 아니면 가을에 들어섰을지 모르겠다. 해마다 반복되는 일상이 익숙하니 이젠 삶이 결실을 향해 가야 할 때라고 스스로 말하는 버릇도 무르익어간다. 가끔 내 삶도 이 가을 멋지게 수놓는 저 검은 안식의 꽃 코스모스 같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끝 시간, 떨어질 것을 아는 탓에 그 순간이 오면 가장 자신답게 살다 떨어지는 코스모스 낙엽이었으면 어떨까 싶다. 화려한 색의 단풍이 즐거운 탓도 개천 흙길을 따라 제 모양대로 흔들리는 코스모스가 함께 있기 때문이 아닐까. 늘 생각하지만, 코스모스 속에는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삶의 질서가 들어있는 듯하다.
여행길에서 가끔 코스모스 나란히 심긴 둑길을 걷는 날이 있다. 특히 그런 날은 무슨 이유인지 여행(旅行)을 여행(汝行)’(당신을 향해 간다.)이라 써 둔다. 여행(旅行)이 ‘나 사는 익숙한 곳을 비켜나 한적한 곳, 아니면 훨씬 더 번화한 곳으로 다녀오면서 겪는 질문’이라고 정의한다면, ‘코스모스 한들한들 피어있는 길'을 걷는 일은 당연히 ‘여행(汝行)’이다. 이유인즉 ‘내가 나에 대해 익숙한 자리를 조금 낯설게 여길 수 있도록 세계를 향해 바람 따라 가볍게 움직여보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코스모스 가득한 길 위에서 나는 여행旅行을 여행汝行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다. 혼자 있되 저만치 있지 않고, 함께 있되 자기 색을 지키며 가볍게 흔들리는 모습에서 나는 ‘나를 너로 살피는 여행‘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무엇에서 ‘왜’로
어느 해, 태어나 몇십 번째 가을을 누리고 있었을 즈음, 바다에서 산으로 화사한 바람이 조금 불고, 햇살이 아름답고 강하게 내리쏟고 있었다. 나는 멀리 오래. 길을 걷고 굽이굽이 돌았다. 그날 내 삶에서 무한하고 견고한 담 같았던 ‘무엇’이라는 ‘상(像)’을 길바닥에 흩날리는 낙엽처럼 마침내 모두 떠나보냈다. 그 말은 물론이고 몸짓, 행동, 심지어 마음에서 지워버렸다. 과거, 현재, 미래 어느 순간에라도 그 흔적이 남아 있지 않도록 걸으면서 계속 긁어 닦아냈다. 그 떨어진 자리에 작은 생채기도 있었다. 조금 쓰리고 아팠다. 하지만 참을만했다. ‘무엇’을 향해 내달리기에는 나의 두 팔과 발과 마음과 몸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만이 나를 지배했다. ‘무엇’을 위해 쏟아부을 나의 능력을 ‘왜’라는 질문에 쏟아야만 했다. 세월의 끝이 가까이 와 있기 때문이다.
솔직한 이유는, 이제 ‘무엇’을 이룰 능력이 내게 넉넉하지 않다는 것이 가장 크다. 물론 무능력은 비능력은 아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이제 그 힘이 생각보다 미미하다는 것이다. 그걸 갈수록 알아가고 있다. 부족함을 인정하는 일은 슬픈 일이다. 하지만, 오히려 그것이 마음 홀가분하다. 그날 이후 삶에 여백이 생겼다. 자연스럽게 그 아쉬움 가득한 자리에 ‘왜’라는 질문이 대신 찾아들었다. 걷기가 나를 새로운, 질서 있는 ‘이유’의 세계, 코스모스 길로 이끌어간 것이다. ‘무엇’과 작별하고 내 속의 ‘왜’를 찾아간다.
무엇 1. 젊은 날의 사명적 삶
지금보다 훨씬 어렸을 적에, 봄, 여름 같은 시간을 지날 때마다, 나는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 사람인지 자주 물었다. 내 삶에 주어진 빛깔 좋은 사명을 어떻게 완성할 것인지를 스스로 캐묻곤 했었다. ‘무엇’은 여전히 내 인생이 어떤 가치가 있는지 가늠하는 좋은 지표였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사명’이란 ‘무엇’에 다다를 때 마침내 성취되는 것에 당연히 이의가 없었다. ‘버킷 리스트’같이 죽기 전에 해야 할 ‘몇 가지 일들’을 성취하는 즐거움은 생각보다 크다는 것도 잘 안다. 그런데 해마다 그 ‘무엇’에 아직 도달하지 못한 탓에 마음 호흡만 거칠어지는 순간이 늘어났다. 잘 견디지 못할 때도 있었다. 나보다 먼저 그 ‘무엇’을 멋지게 이뤄가는 이들에게 눈길이 가는 날도 적지 않았다. 나의 걸음이 더딘 것에 의기소침한 것도 부인할 수 없었다. 지금보다 젊은 시절 나는 ‘무엇을 위한 삶’에 나를 가둬두는 경계를 견고하게 세웠다. 사명에 함몰된 것이었다.
‘왜’ 1:창조주를 체감하는 삶
사실, 사명은 무엇이 아니라 ‘왜’이다. 그것을 받아들이고 나니, ‘왜’를 위해 내 삶의 가을을 보내는 것이 자연스럽다. ‘왜 살아가는가?’, ‘왜 죽어가는가?’를 묻고 답하는 과정이 마음을 편하게 이끈다. 그 끝은 어떨까 궁금하기도 하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내가 이룰 결실이 무엇인지 나는 이미 안다. ‘피조물로서 체감하는 창조주의 가치’에 얼마나 부합하는 지다. 또한, 그것이 나의 능력 밖의 일이라는 것도 깨닫는다. 그보다 나는 왜 지금, 여기에서 나의 삶을 살아내야 하는지를 묻는 것이 내 몸에 맞는다는 것을 알아가고 있다. 그 이유를 질문하는 것은 곧 내 삶에서 창조주의 의의를 체감하는 데 적절하기 때문이다. 이유를 물을 때, 창조주의 가치가 선명해진다. 왜 그는 이 어긋난 세계에 여전히 지극한 ‘헤세드’를 베푸는가? 무한한 환대와 거침없는 수용을 멈추지 않는가? 왜 나는 그의 삶을 따라가야 하는가?
무엇 2: 삶의 가치를 일깨우는 사명
솔직히, ‘무엇’을 폐기한 삶은 하루하루가 어둠 같다. 어둠이어야 제 삶을 피워내는 코스모스 같다고 생각한 적도 많았다. 하지만, ‘무엇’을 이루지 못한 인생 가을은 단풍보다 스산한 낙엽처럼 흔들리며 떨어진다는 것을 먼저 알았다. 양손에 가득 쥐어도 모자랄 양식을 한 손에 겨우 조금 움켜쥐고 겨울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 자존심을 건드렸다. ‘무엇’을 위한 분투를 상실한 삶은 스스로 비참해진다.
그런 상황에서는 ‘왜’를 위해 쟁투할 용기가 생각보다 버겁다. 아예 생각조차 할 수 없다. 비난도 감내해야 한다. ‘무엇에 관심을 두지 않으려 한다’라는 것은 주어진 삶에 대한 책임회피라는 냉정한 평가도 감수해야 한다. 주어진 삶에 대한 의무 불이행이라는 비판도 비켜날 수 없다. ‘무엇’을 쟁취하는 일이 인간 존재의 의의이며, 자기 삶의 가치를 고귀하게 높이는 첩경이자, 묘약이라는 시대의 충고도 있다.
왜 2:나를 새롭게 하는 삶
그러나 나는 ‘무엇’을 버리고 ‘왜’를 붙잡기로 했다. 독고집일 수도 있었다. 사명을 버리고 미로를 찾아가겠다는 의지였다. 인생의 의미를 성취에서 성찰로 바꾸려는 소신이었다. 과도한 세계의 소명에서 과소해도 나의 작은 소망에 천착해보기로 했다. ‘나’를 묻고, ‘나라는 너를 탐색하는’ 일에 몰두하기로 했다. 그만큼 가치 있는 일이라는 확신으로 스스로 다독였다. 세계는 ‘개인’의 자기 성찰이 아니면 전진하지 못한다는 세계관도 다듬었다. 그리하여 날마다 잡초처럼 일어나는 ‘무엇’에 대한 욕구를 ‘버린다.’ ‘무엇’을 이루기 위한 무능력을 부끄러워하지 않기로 했다. 무엇은 알 수 없는 결론이지만, ‘왜’는 알 수 있는 출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부유하고 싶은 경제적 위협에 맞서야 한다. 오르고 싶은 사회적 위상을 견제해야 한다. 넉넉하고 싶은 자연적 욕구를 경계해야 한다. 인구에 회자할 만한 ‘무엇’ 하나 제대로 남기지 못한 채 삶을 마감할 수도 있다. 그 불안감이나 두려움도 기꺼이 감수해내야 한다.
누구나 알듯이, ‘왜’를 위한 삶은 가치 있지만 ‘무엇’을 위한 삶에 비하면 턱없이 흐릿하다. 빠른 세계와 함께 가기에는 더디다. 날아가는 시대에 걸음으로만 움직이려는 것과 같다. 그런데도 나는 ‘왜’를 위한 삶으로 나의 노년을 보내려는 마음을 굽히지 않는다. 그것을 삶의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이유는 단 하나다. 그것이 날마다 나를 새롭게 하기 때문이다. 늘 새로운 길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왜’를 함양하는 방법으로서 ‘걷기’와 ‘관찰’
내가 ‘왜’를 탐구하는 방식은 걷기다. ‘왜’라는 삶을 더욱 공고히 다지기 위해 '길을 걷는' 삶의 방식을 택했다. 길에 서면 ‘왜’를 경험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더욱 커지기 때문이다. 길 위에서 나는 홀로 창조주의 거룩한 손짓 앞에 선다. ‘왜’는 곧 관찰이다. 당연히 그 길에 서면 나는 끝없이 관찰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그가 섭리하는 세계 질서를 조금 체득한다. 창조주는 왜 인간을 자기 형상으로 만들었는지, 왜 꽃이 피어나게 하는지, 왜 하늘을 열고, 왜 인간의 아픔에까지 기꺼이 공감하시는지, 왜 인간을 마음에 품어두는지, 왜 환대하고 긍휼히 여기는지, 그것도 모자라 직접 땅에 내려와 길을 걸었는지, 그가 왜 인간에게 아픔을, 기쁨을 자기 손으로 직접 보여주는지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다. 오감이 깨어나 신의 통치 이유를 조각조각 모아둘 수 있다. 걷기는 관찰의 보고다.
그 관찰을 통해 나는 인간의 모든 정의가 왜 창조주의 정의, 즉 체테크에 어긋나는지, 땅의 공의가 왜 창조주의 질서, 곧 미쉬파트로부터 멀리 있는지, 세계의 모든 ‘올바름’이 왜 창조주의 의로움, 다시 말해 야사르에 근접하지 못하는지 천천히 목격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왜 나는 여전히 나도 모르게 ‘혐오와 배제’에 익숙하고, ‘환대’에 인색한지를 스스로 물을 수 있다. 세계가 이토록 어그러진 모습, 그것이 창조주가 스스로 겪는 아픔이라는 것을 공감할 수 있다. 인간이 무모하게나마 이 '어그러짐'을 곧게 하려 자기 힘을 쓰고 자신을 버리는 일이 얼마나 창조주를 위로하는 것인지 길 위에서 배운다. 그러니 노년이 다가올수록 더욱 조용히, 홀로, 가끔은 함께 창조주가 걸었을 그 길을 걷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왜’와 ‘관찰’은 무작정 목표를 향해 전진하려는 삶을 시작점으로 되돌리는 데 유익할 때가 많다. 그중 자신 안에 있는 또 다른 너(汝)와 교제하는 것도 좋은 예이다.
왜의 의의:안식의 실현
이런 생각을 다듬는 사이 세탁기는 비행기 엔진 소리처럼 빨래를 털어내는 마지막 소리를 내고 있다. 나도 그 소리를 타고 마지막 질문을 향해 전진한다. 여행(汝行)의 끝을 향해 움직인다. ‘나라는 너를 향해 간다’(汝行). 생각보다 즐거운 여행이다. 모든 여행은 나를 향해 질문하는 놀이다. ‘피조물로서 나는 왜 살아가는가?’ ‘창조주 당신은 왜 나를 위해 존재하는지?’ 그 질문에 언제 제대로 답할 수 있을지 나는 모른다. 또 그 질문과 답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 ‘무엇’ 하나 없이 ‘왜’만 잔뜩 짊어지고 창조주 앞에 되돌아갈 가능성이 클 것이다. 하지만, ‘가을우체국 앞을 지나다 우연히 생각에 잠겼던’(윤도현 곡, 가을우체국 앞에서) 어떤 사람처럼 나도 이 가을, 코스모스의 계절이 다시 오면, 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빨래를 하다가도 우연히 나의 여행을 성찰하게 될 것이다. 엄청난 '무엇'을 이룬 이들 덕분에 내가 가볍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면서 말이다.
당신에게도 좋은 안식을 위해
오늘도 나는 ‘왜’를 쉼 없이 질문한다. 특히 ‘무엇’을 향해 달려가느라 정작 그 속에 담긴 ‘왜’를 살피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서다. 그들이 놓친 이유의 색깔을 하나둘 모아 저장해 두고 싶다. 레오 리오니의 동화 속 생쥐 프레드릭이 햇살과 색을 수집하던 것처럼 말이다. 지난여름 ‘무엇’을 위해 열심히 살아온 다른 쥐들이 한겨울 무료하고 적막한 시간을 보낼 때, 프레드릭은 사계절 동안 모아둔 빛과 색의 이야기를 꺼내 그들에게 따뜻함을 건네었다. 나 역시 그들에게, 아니 나의 너에게 묻고 싶다. 왜 ‘무엇’을 향해 땀 흘려야 했는지를, 그 이유를 잠시 멈춰 들여다보는 시간이 얼마나 귀한 안식이 될 수 있는지를.
안식은 멈춤이다. ‘무엇’의 자리에 ‘왜’를 조용히 대입하는 의식이다. 한 방에 둘러앉아 나와 너의 ‘왜’를 하나씩 꺼내 들려주는 일—그것은 즐거운 상상이다.
어느 사이 빨래가 끝났다. 이제 널어야 한다. 물기를 털며 나는 생각의 매듭을 지어 나의 너에게 고요히 말해둔다.
“‘왜’는 지극히 현실에서 출발해
일상의 고유한 흔적을 남긴다.
지금, 당신의 세탁기 안에서
당신의 지난 삶처럼 돌아가던 옷들이 멈추는 그 순간,
오직 ‘무엇’으로 얼룩졌던 옷이 말끔히 씻겨
햇살 아래 널릴 때,
비로소 ‘무엇’을 빛나게 하는
깨끗한 당신의 ‘왜’를
조용히, 그리고 흐뭇하게 바라보길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