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도현, 『외롭고 높고 쓸쓸한』, 문학동네. 1994.
누군가를 기다려 본 적 있는 사람은
자신을 오래 기다리던 이를
바람에 실어 차버린 적이
있을까
기다리다 끝내 누군가와 어긋난 사람은
끝내 만나지 못한 그 사람을
가을 낙엽 차듯 날려 보낸 적이
있을까
바람 온기 잃고
낙엽 색 바래져
화장하듯 떠나는 계절,
기다림이란
그저 기다림일 뿐이라며
골목 연탄재
발로 차버리고 싶을 일
있을까
기다려도 그 끝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성북동 심우장 아래
옛 시인의 조형물 벤치
봄가을 그리고 여름,
마냥 그 자리,
찾아오는 이 없는 모든 순간,
— 인내
다시
가을 밀어내는 냉정한 겨울바람
북정마을 골목을 휘돌아 나오면
어김없이
그 말 없는 시인의 목
정성껏 감아주는
털목도리
다정하고 낮고, 따뜻한
십 구공탄 같은 너,
인간다운 불결,
불의 결
차버릴 수 있을까
사람 하나 건너 하나 외운다는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말아 달라’는
안도현의 장엄한 단가
발끝에 매달린 연탄재 함께
골목에 스며들면
“그래, 난 아직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 되지 못했다”
차가운 하늘에 하소연하는
검은 연탄의
풀 죽은 심정,
—기다림
밤 지나고
어느새
흰 연탄재
꽃처럼 하나둘 피어나는,
몸 하나 지나갈 골목의 아침
그 화려한 잿밭
발에 걸리지 않게
사뭇 조심하며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디면
“뭘 그리 조심하나
이제 내 삶 다했으니
발에 부서져
골목길 수놓는
재꽃으로 다시 살고 있으니—
불역쾌재행”
덩그러니 차곡차곡
그 숭고한 가루
보다 차일 일 없던
내 삶이
가볍게 부끄러운
어린 겨울
연탄재 화원
희거나 검거나,
이 골목 지나는
누구든 아픈 마음
한 번쯤 내려놓을 수 있도록
기꺼이
그 발끝에 힘차게 차이길
밤새 기다리는
차가운 한밤의 골목길
멀리
가난한 이들을 위한
찹쌀떡 메밀묵 소리
발밑에서 듣는
歎辭,
그 백의의 공탄,
추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