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려가듯 흘러오듯
계절 스치는 길목
붉은 초병
흔들리지 않는 경계,
평안하다.
1. 사진: 순간의 포착과 구도
2025년 11월 17일 오후 3시경, 서재 근처 산책 길에서 촬영한 사진입니다. 이 사진의 핵심은 붉은 단풍잎과 그 배경의 명확한 대비에 있습니다. 산책길 바닥에 유난히 붉고 선명하게 떨어진 단풍잎 하나를 발견했을 때, 그 여린 잎이 마치 홀로 경계를 선 듯한 강렬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카메라를 최대한 낮추어 땅에 바짝 붙게 수평으로 두고 확대 촬영모드로 단풍잎과 먼 배경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주변의 마른 낙엽들과 앙상한 나무들은 흐릿하게 처리했습니다. 이 구도를 통해 ‘붉은 단풍잎’을 근접 관찰하는 듯한 효과를 극대화하고자 했습니다. 떨어진 잎 하나가 꼿꼿이 서 있는 모습을 부각하고 싶었습니다.
다행히, 11월 셋째 주 단풍색은 거의 절정이어서 색채의 대비가 선명했습니다. 그래서 붉은 단풍의 색을 더욱 살려주는 회색빛과 갈색빛을 전경의 강렬한 붉은색과 대비되도록 촬영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색의 대비는 소멸해 가는 뒤엣것들과 그들의 배경으로 나의 시선을 끌어들이기에 충분했습니다. 나름, 떨어져도 마지막까지 빛나는 붉은 잎의 생명력을 긴장감 있게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2. 시어: 흐름과 멈춤의 대화
사진을 찍은 뒤에 사진이 주는 시각적 인상을 시어로 다시 연결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가장 유의했던 것은 붉은 단풍잎을 그저 단순한 낙엽이 아니라 어떤 살아있는 생명처럼 표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우선 요즘 계절 변화의 추이를 읽었습니다. ‘밀려가듯 흘러오듯’이라는 첫 구절은 시간의 불가피한 요동을 표현합니다. 계절의 변화는 막을 수 없는 물결과 같으며, 우리 삶 역시 이 흐름 속에 놓여있음을 암시합니다. 다만 그 흐름이 하나는 밀려가고(가을), 다른 하나는 흘러오는 것(겨울)이어서 마치 한 공간 안에 소용돌이 치는 것 같았습니다. 이 시어는 그것을 묘사한 것입니다. 이 섞임이, 어느 한 계절뿐만 아니라 창조 세계 전체의 매력이기도 합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계절이 맴돌면 내 몸도 그것을 따라 변화한다는 것을 중의적으로 표현해 보려 했습니다.
다음 시어인 ‘계절 스치는 길목’은 이 사진 속 색의 대비를 두 계절, 두 존재가 교차하는 변화의 순간, 과도기적인 장소로 표현하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서로가 서로에게 스치듯 지나가고 소멸하는 그 순간, 일어나는 마찰로 길목의 스산함이 깊어진다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또한, ‘붉은 초병 / 흔들리지 않는 경계’는 이 시의 가장 중요한 은유입니다. 저는 이 떨어진 붉은 단풍잎이 길 위에 똑바로 서 있는 모습에서 고독한 초병/경계병의 이미지를 보았습니다. 가장 보통의 단풍나무 잎 하나가 모두 잎들이 스러진 순간에도 자기 붉은빛을 놓지 않고 길 끝을 내다보는 것 같은 모습에서 내면의 흔들리지 않는 어떤 중심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이 시에서 ‘경계’는 단순히 지킨다는 의미에 그치지 않습니다. 가을과 겨울, 생명과 소멸, 열정과 포기 사이를 구별하는 선과 같은 의미가 있습니다. 다만 그 선은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하지만, 보이지 않은 채로 섞여있고, 섞이는 듯하면서도 끝내 섞이지 않는 계절의 변화를 이 단풍 초병이 중용의 자세로 지켜보고 있습니다. 작은 잎이지만, 경계선을 굳건히 지키는 결연한 눈빛을 가진 초병입니다.
끝으로 ‘평안하다’입니다. 평안은 모든 변화와 소멸의 과정을 목격하면서도 한 존재가 그 경계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모습입니다. 모든 것을 조화롭게 하는 작은 힘입니다. 이 사진 속 경계에 선 단풍잎에서 내 삶의 궁극적인 안녕과 안정을 느꼈습니다. 계절은 요란하지 않고 소리 없이 고요한 상태에서 경계를 따라 자리바꿈을 하고 있습니다. 외부의 소란과 상관없이 내면의 고요함을 찾아가며 정서적 안녕을 유지하며 삶을 진득하게 종결합니다. 붉은 단풍은, 이 계절의 작은 종말이 순조롭게 마무리되도록 자기 자리를 흔들림없이 지키고 있습니다.
3. 의도
나는 이 디카시에서 흐름 속 멈춤, 전진 속 정지, 소멸 속 생성, 해체 속 구축을 노래하고자 했습니다. 디카시의 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사소한 것들을 세밀하게 관찰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삶에서 겪는 수많은 변화와 시련은 계절처럼 어떤 ‘길목’에서 나와 스쳐 지나갈 때가 많습니다. 그 지나침을 그저 흘려보내지 않기 위해 잠시 멈춰 서서 나 자신을 위한 초병을 세우고, ‘흔들리지 않는 경계’를 지키는 것이 참 중요한 듯합니다. 가을과 계절이 교차하는 이 계절, 떨어져도 꼿꼿이 서 있는 붉은 단풍 하나가 건네는 말을 나에게 스스로 묻고 싶었던 이유입니다. 전진하려는 욕구 앞에서 단호하게 멈출 수 있을지, 오르려는 욕망 앞에서 과감하게 내려설 수 있을지 말입니다. 저 붉은 단풍은 이 모든 일에 자신을 위한 초병을 세우라고 권하는 것 같습니다. 그 붉은 단풍 같은 초병은 다름 아닌 ‘한 편의 시’인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시를 포함한 모든 나의 시는 나의 삶에서 만들어진 세포 같은 이야기로 빚어진 나의 초병, 아바타입니다. 그 시를 내 삶에 세워두고 자신을 지속해서 성찰한다면, 이 요동치는 계절에도 내가 태풍의 눈에 머무는 것처럼 평안할 것입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