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카시 3. <너의 이름>
시작노트

by 푸른킴

1. 배경

오랫동안 가르치는 일을 해온 J가 이번 주, 제주에서 타국의 어린 교사들을 가르치기 위해 내려갔습니다. 가르칠 내용은 산더미이고 시간은 고작 닷새뿐이어서 “하루가 25시간이어도 부족하다”는 말이 허투루 들리지 않을 만큼 벅찬 일정이었다 합니다. 그래도 내년 여름 피어날 결실을 기대하며 묵묵히 애쓰고 있습니다.


바쁜 시간 속에서 오늘 아침 숙소 근처에서 찍은 감귤밭 사진 한 장을 보내왔습니다. 그 사진을 보자마자 문득, 가르치는 일에 온몸을 다 바치는 이들의 수고, 배우려는 학생들의 마음, 그리고 이 모든 교육 노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열정이 떠올랐습니다. 이 디카시는 바로 그런 작은 감동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나는 그들의 수고를 사진 뒷면에서 보게 되었습니다. 오랜 세월 귤밭을 지켜온 농부의 손길은 저 결실보다 훨씬 큰 것이었습니다.


이 시에는 두 개의 상징이 사용되었습니다. 노란 귤, 그리고 소행성JJ25입니다. 여기서 ‘25’라는 숫자는 오래도록 이어져 온 귤 농사에 쏟아부은 수고의 상징이며, 동시에 올해도 묵묵히 가르치는 일을 지켜온 이들의 지속된 열정을 응축한 표시입니다. 이 디카시는 그들의 결실에 바치는 작은 헌사입니다.


2. 사진

사진에는 제주의 푸른 가을 하늘 아래, 초록 잎마다 주렁주렁 매달린 노란 감귤이 가득했습니다. 그 풍경은 마치 밤하늘의 은하수가 땅 위로 내려와 자리 잡은 듯했습니다. 별이 만들어낸 노란 별밭인 듯했습니다. 이 사진에 담긴 초록–노랑–파랑의 대비는 강렬했습니다. 그 색들의 조화는 한 장의 작은 사진을 거대한 우주의 한 장면처럼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이 사진은 단지 보이는 것만을 담고 있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진 속 뒤로 거센 비바람을 견디며 긴 세월 한 자리를 지켜온 농부의 땀방울이 고요히 흐르고 있었습니다. 또한, 지금 제주에서 온 힘을 다해 타국의 선생들을 가르치는 이들의 노력이 차곡차곡 스며 있었습니다.


이처럼, 이 사진은 구도와 색상, 그리고 사물의 배치가 인상적이었습니다. 노란 감귤 한 알 한 알은 우주를 떠도는 작은 별, 소행성처럼 신비롭게 사진을 채우고 있었습니다. 사진에는 마치 누군가의 생존과 인내가 빚어낸 작은 세계가 담겨 있는 듯했습니다.


디카시 3.jpg

3. 시어

디카시는 짧은 문장으로 사진을 하나의 사유와 최대한 긴밀하게 연대해야 합니다. 이번 사진에 담긴 시어에는 다음과 같은 의도를 담았습니다.


1) 은하수 – 노란 별밭 – 지상의 감귤밭

노란 귤을 하늘의 별과 연결했습니다. 삶의 굴곡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는 수고의 결실을 드러내려 했습니다.


2) 소행성JJ25

이 명명에 “제주(Jeju)의 누군가가 긴 세월 동안 일군 결실”이라는 의미를 담았습니다. 신조어입니다. 이는 노동의 역사, 한 사람의 수고에 이름을 붙임으로써 그것이 하나의 실체를 갖게 하는 수사적 장치입니다. 나아가 그것을 좀 더 명확하게 기념하고자 하는 시적 명명입니다.


3) 감미로운

달콤함을 의미하는 말에 그치지 않습니다. 긴 세월의 인내·고단함·좌절·재기의 경험으로 고농축 된 삶의 밀도(蜜度)를 뜻합니다. 하지만, ‘성취의 단맛’이 아니라, 무너지고도 다시 서는 재기의 맛농도입니다.


4) 생존감귤

디카시의 마지막에는 반드시 시철학적 개념을 넣습니다. 이 시에서는 ‘생존’입니다. 풍파와 시간의 무게를 견뎌 끝내 살아남아 결실을 맺은 생명력, 농부와 교사가 공유하는 의지와 인내를 압축한 개념입니다. 이 사진 속 노란 감귤들은 단순한 농산물이 아닙니다. 치열한 생존 끝에 얻어진 별빛 같은 열매이며, 마땅히 하늘의 훈장으로 불려야 할 노동의 기념물입니다.


4. 의도

내가 이 디카시에서 말하고 싶었던 바는 단순합니다. 결실보다 더 귀한 것은 과정이며, 바로 그 과정이 생존을 함의한다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 자연과 인간, 노고와 열매가 서로 엮여 ‘생의 과정’을 이뤄가는 자리에서 비로소 노동의 신성함이 빛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한편, 소행성JJ25는 오늘도 자기 자리에서 긴 세월 한 길을 걸어가는 무명의 장인(Master)들을 상징하는 이름입니다. 이들이 묵묵히 흘리는 땀은 이름을 가지고 감귤처럼, 하늘의 별처럼 빛나야 합니다. 그들의 성실한 삶이 지상의 은하수로 흘러내려 뭇사람의 삶에 스며들었으면 좋겠습니다.


5. 맺음말

디카시 <너의 이름>은 한 장의 사진에서 솟아난 우주적 상상으로 출발해, 결국 당신의 노동이 지닌 숭고함으로 조용히 착륙합니다. ‘소행성 ○○25’는 당신의 삶이 채워진 빈칸입니다. 새롭게 붙여진 이름은 긴 세월 쏟아부은 당신의 수고에 기억하는 별명(別名)이며,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당신만의 이름표입니다. 하늘의 별과 땅의 땀이 만져 만든, 땅 위의 은하수처럼 빛날 무형의 결실입니다.


생각해 보면, 당신의 삶은 수많은 수식어로 치장할 수 있을 만큼 견실합니다. 그러나 어쩌면 ‘생존’ 해 온 삶의 길이 그 어떤 찬사보다 더 큰 울림을 줄지도 모릅니다.


“올해도 잘 살아냈다.”


더군다나, 가을이 오면, 누구나 삶의 결실을 책 한 권에 담아 세상에 내어놓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누구도 대신 써줄 수 없는 책—‘나의 삶’이라는 살아 있는 책(living book, 산책)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나도, 25년 가을, 다시 주어진 길을 산책하듯 걸으며 내 삶의 ‘생존감귤’ 같은 조각들을 모으려 합니다. 그 조각들을 모아, 결국 나의 생을 알록달록한 조각보처럼 수놓게 되기를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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