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는 기도 시〉0~10 시작 노트(2)

-나의 지극히 사적인 시작후기:미시적 소리, 고요한 청취

by 푸른킴
시는 세계를 읽는 일을 넘어 듣는 일이다. 세계의 침묵을 들어 올리는 행위이며
그 침묵의 숨결을 온몸으로 들어주는 투쟁의 기록이다.


시인들이 남긴 ‘소리’의 소리를 듣는다

시는 일반적으로 이미지 기반의 문학이라 한다. 나는 여기서 방향을 바꿔, 청각에 집중한 시학을 구축해보고 싶었다. 이런 감각의 변화는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이 <듣는 기도 시>는 이 청각에 기반하여 구성한 것이다. 이를 위해 나는 오래전 내가 읽었던 시들을 소환했다. 나는 그 시 안에 당대 시인들이 그 시대를 관통하며 들었던 소리가 들어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시인들은 같은 소리라도 다른 관점에서 표현하고 해석했다.


이제 세월이 지나 그들의 시도 내 삶에 하나의 소리로만 남아있다. 나는 그들이 남겨둔 소리를 찾아 다시 듣는다. 그리하여 이 시대에 내가 들어야 할 소리를 찾아가는 표지판으로, 내가 만나는 세계의 의미를 안내하는 이정표로 삼으려 했다. 이것은 이른바 <메타시>의 실험이다. 하지만, 이 <듣는 기도 시>에는 시인들의 소리만 있는 것이 아니다.


미물의 작은 소리를 듣는다

내가 <듣는 기도 시>에 담은 소리에는 사물의 미성도 있다. 바람 소리, 낙엽 소리, 짐의 침묵, 집중호우 전후의 진동, 차가운 골목의 공명 등 ‘소리 없는 소리’까지 포착하는 감각 확장을 보여준다. 이 소리는 누구에게나 들리는 굉음이 아니다. 그저 가벼운 울림, 미세한 떨림, 잔향 등에 불과하다. 그러나 나는 이 미미한 소리에 몸을 기울이는 훈련을 통해 이 소리를 눈으로 보는 듯 시각화하고 이어 그 본 것의 소리를 찾아 들으려 했다. 이 <듣는 기도 시>에서 감각의 흐름은 보는 것에서 듣는 것으로 그리고 사유하는 과정을 지나 그 소리를 다시 듣는 것이다.


한편, 내가 들으려 하는 소리는 명확한 발성과 정확한 음색이 아니다. 들릴 듯 말 듯한 소리다. 소리의 뼈, 밭의 조용한 화장, 연탄재가 남긴 결, 짐들이 떠나며 남긴 숨결, 플랫폼에 남겨진 자기 자신의 기척 등이 내가 들은 소리다. 이것들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 존재의 진동, 파동으로만 포착된다. 이 기법은 고대 히브리인들이 시편에서 활용했던 ‘침묵의 경청’에 기반한다. 침묵은 소리 없음이 아니라 소리의 수면이다. 이 잠든 소리의 숨 내쉼을 듣는 것은 그 존재를 눈에 보이는 것 같이 만나는 일과 같다.


미미한 소리를 듣는 한 방식은 그 소리를 촉각으로 치환해 보는 것이다. 나의 〈듣는 기도 시〉에는 이런 예가 있다. “차가운 하늘이 수축하는 소리,” “발밑에서 부서지는 재 꽃의 감촉,” “호수에 쌓인 철새의 흔적이 쌓이는 소리” 등이다. 듣는 것은 만지는 것으로 더 강화된다. 일종의 감각 전이(Trans-sensory)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는 ‘감각의 상호번역, 일종의 '공감각(synesthesia)’의 훈련이기도 하다.


언어와 문장 구조

나는 <듣는 기도 시>에서 ‘듣는다.’라는 행위를 극대화하기 위해 수사적 질문 등을 자주 사용했다.

첫째, 질문으로 시작하거나 질문을 주축으로 움직인다.


“그럴 수 있을까?” “왜 여기 있나?” “기다림은 무엇인가?” “차버릴 일 있을까?” 이런 질문들은 답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확신의 수사법으로 세계의 말 없는 소리에 내가 귀를 기울이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절차다. 다시 말해, 들어야 존재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에게 내가 몸을 기울이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절차다.

둘째, 반복-변주 기법 (Motif Variation)
이 시는 다음과 같은 모티프를 변주(variation)한다:기다림, 잔향, 침묵, 낙엽, 재와 가루, 골목, 계절의 이행, 타인의 잔해와 흔적 등이다. 각 시에서는 이 모티프가 미세하게 변형되며 개별 시의 독립성과 전체 시의 구조적 통일성을 이루게 되었다. 사실, 나는 이 연작을 의도적으로 구성한 것은 아니다. 독립적으로 쓰인 시이지만, 결과적으로 음악의 구성처럼 구조화되었다.


셋째, 단문, 절단문, 나열문의 활용– ‘듣는 리듬’

나의 <듣는 기도 시>는 “짧고 느린 호흡”으로 리듬을 유지한다. 결과적으로 단문은 주저하는 호흡처럼, 절단문은 끊어진 소리처럼, 나열문은 들리는 것들을 목록화하는 보고문처럼 구성되었다. 예를 들어, 밤이 지나고, 어느새, 흰 연탄재, 꽃처럼 하나둘 피어나는, 몸 하나 지나간 골목의 아침 등이다. 이 리듬은 듣는 소리를 호흡하는 것처럼 다시 옮겨 쓴 결과다.


이미지 구성

나는 〈듣는 기도 시〉에서 사물들의 상호작용을 주목했다. 관찰 대상은 독립적 존재가 아니다. 어느 경우나 타자, 환경, 시간과 공간의 ‘관계 속에서’ 자리한다. 예를 들어, 사랑초 두 송이가 서로를 ‘하늘거리게’ 하는 관계, 지하철 플랫폼에서 만난 두 시간의 관계, 짐과 카페가 서로에게 남기는 흔적, 연탄재와 발끝의 대화 등이다. 시 안에서 모든 사물은 고정된 형태일 수 없다. 그들은 국소성의 원칙을 따라 어디서든 그 의미가 파동처럼 번진다. 첫 단어는 마지막 단어와 공멸할 수 있다.


또한, 나는 시어들의 하이브리드 이미지를 선호한다. 시는 자연, 사회. 인간의 감각을 언어로 통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자연 이미지(낙엽·바람·철새·호수)와 사회 이미지(노동·짐·연탄·골목)가 연속적으로 이어지고 겹쳐져 새로운 감각이 층위를 형성한다. 즉, 자연과 사회는 분리되지 않고 인간과 사물은 구분되지 않는다. “소리”의 영역에서 모든 것은 생존의 흔적을 소리로 표현한다. 따라서 이 소리 안에서 세계는 하나의 공동체처럼 삶의 장(場)을 함께 형성한다. 공존하는 것이다.


시간 구성

나의 〈듣는 기도 시〉는 시간을 자연적인 시간(chronos)이 아니라 의미 있는 사건의 시간(kairos)으로 이해한다. 우선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비선형적이다. 시 안에서 시간은 과거→현재→미래의 순서를 따르지 않는다. 오히려 시간은 수직으로 깊어지거나 파고든다, 사건 안에서 맴돈다.


시 안에서 시간은 인간의 변화로 흔적을 남길 뿐이다. 예를 들어, ‘기다림’이라는 시간은 단지 미래 지향이 아니라 현재의 두께를 상징한다. ‘기다림’은 머무는 삶의 두께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또한, ‘사라짐’은 없어짐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을 함의한다. 연탄재’는 연탄이 다 소진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검은 연탄의 죽음이 아니다. 재가 꽃으로 부활하는 것이다.

또한, 계절 역시 시간의 흐름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존재의 변화다. 이 시에서 묘사하는 계절 변화는 단순히 시의 배경이 아니다. 존재의 질적 변화를 상징한다. 예를 들어, 가을은 이주를, 겨울은 멈춤을, 초겨울은 생의 끝을, 새벽은 부활을 함의한다. 고대 히브리인들의 시작법에서도 계절은 존재의 변화다.


구성 및 연작 방식

이 <듣는 기도 시〉는 기획하거나 의도하진 않았지만, 열한 편의 시가 연작을 구성하게 되었다. 각 시는 독립적이면서도 구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1~4편은 청취의 시작을, 5~8편은 세계와 사물의 소리를, 9~10편은 사라짐과 소멸의 숭고함을 담는다. 이렇게 이 시들은 흩어져 있지만, 느리게 흘러가는 하나의 극적 서사처럼 되었다.


이런 점에서 나의 시들은 메타시의 구성을 따른다. 다시 말해 ‘시를 듣는 시’다. 앞서 말한 것처럼 〈듣는 기도 시〉의 중요한 창작 기법은 다른 시인들의 시를 ‘읽는 것이 아니라 듣는 방식으로 재해석’하는 것이다. 기형도, 신동엽, 안도현, 고정희, 김광규, 신경림 등의 시를 들으며 나의 시를 작성한다. 나의 시는 이들의 시에 화답하는 메타-청취 시를 따른다.


또한, 나의 시는 철학과 신학에 기반한다. 각 시는 일련의 철학의 개념이 담겨 있다. 특히 ‘존재론’이 나의 관심이다. 모든 사물은 존재의 평등을 누릴 수 있다. 그러니 그 평등을 구현하는 방식은 그것들의 ‘소리’에 몸을 기울이는 것이다. 청취는 존재를 말없이 논증한다. 존재는 말하는 것이 아니라 들리는 것이다. 다른 점에서 ‘낮아짐의 숭고함’도 내가 지향하는 바다. 예를 들어 연탄재는 더러움(不潔) 일 수 있지만, 그 불결은 달리 보면, 불이 남긴 무늬(불·결) 일 수 있다. 다시 말해 연탄재 → 죽음 → 잔향 → 흔적 → 부활의 구조가 담겨 있다. 끝으로 나의 시는 ‘침묵’의 가치를 다시 생각한다. 나의 기도는 ‘부르거나 요구하는 기도’ 일 수 없다. 그저 듣는 기도이다. 침묵은 공백이 아니라 가장 선명한 기도다.


결론-검은 안식의 철학, 詩의 정의(正意)

나의 〈듣는 기도 시〉에 반영된 여러 기법은 나의 작위적일 수 있지만, 그런데도 다음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나는 세계를 보지 않고 들었다. 들리는 것과 들리지 않는 것 사이의 틈에서 시를 썼다. 존재의 소리, 사라짐의 잔향, 낮아짐의 결(結)을 기록했다.”


이런 시학은 내가 탐색하는 ‘검은 안식(Black Sabbath)의 철학, 미학’에 기반한다. 이 철학은 침묵을 경청하는 능력이다. 따라서 이 시들을 하나로 묶는 검은 안식이란 어둠을 회피하지 않고 침묵의 한가운데서 세계의 죽어가는 것들을 다시 듣고 그 들림 속에서 재창조의 징후를 발견하는 방식이다. <듣는 기도 시》의 각 편은 이 안식의 깊은 호흡으로 채워져 있다. 밤길을 달리는 차 안에서, 플랫폼 끝에서, 캠핑장의 새벽에, 골목의 바람 한 줄기에서, 호수의 철새 한 마리에서— 나는 침묵과 소리 사이의 경계에 몸을 기울인다. 바로 그 경계에서 세계는 소멸하고 다시 태어나며 사방으로 전진한다.


이 시들은 나의 영성 기록이면서, 동시에 이 시대의 억눌린 소리를 듣는 사회적·문학적·철학적 사유에 기반한 글쓰기이다. 따라서 이 시들은 작은 기도이며, 세계의 틈에 귀 기울이려는 몸의 기록이며, 사라지는 존재들의 소리를 다시 살려 환대하는 작은 인간의 미미한 발성이다. 시는 세계를 읽는 일을 넘어 듣는 일이다. 세계의 침묵을 들어 올리는 행위이며 그 침묵의 숨결을 온몸으로 들어주는 투쟁의 기록이다.


나는 여전히, 시인이 아니어야만 ‘詩’를 쓴다는 나의 명제를 확실히 믿는다. “homo poētic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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