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는 기도 시> 시작 노트(3) 메타산문시

-나는 쓰는 이가 아니라, 듣는 이다.

by 푸른킴

나는 시를 쓴다기보다, 듣는다.

아주 작은 떨림 하나가 내 몸을 스쳐 지나갈 때, 문장은 그 뒤에 온다.

바람의 속삭임이 숲길을 휘돌아 스칠 때,

나뭇잎이 떨어지는 순간, 그 비틀림이 발목에 걸릴 때,

지하철 문이 닫히는 금속성이 심장에 닿을 때,

겨울 호수 위로 내려앉는 고니의 그림자가 물 위로 길게, '느려질 때,'

나는 이미 한 편의 시를 들은 셈이다.


초고는 언제나 의미보다 앞서 몸에서 일어난다.

흩어진 파편, 균열, 부서진 부사 하나.

그러나 그 파편들은 사물과 나 사이에 걸려 있는 다리이며,

흔들리며 건너야만 보이는 첫 이미지다.

그러나 나는 시를 홀로 만들지 못한다.

기형도의 흑백 한 줄, 전남진의 낮은 숨결, 신동엽의 들판 바람,

고정희의 유고에서 새어 나온 슬픔 한 알갱이.

그들의 문장이 오래된 유물처럼 내 안에서 되살아,

소리와 소리 사이의 충돌로 나를 깨운다.

그 충돌이 감각을 깨우고,

감각이 이성을 되살리고,

되살아난 이성이 마침내 내 안의 낱말을 끌어올린다.

이 일련의 움직임을 나는 메타시라 부른다.


듣고, 반응하고, 다시 배열하는 조립.


그렇다.

시는 혼자 쓰는 것이 아니라

시인들의 오래된 숨결, 사물의 작은 신호들 속에서

나의 언어가 다시 태어나는 일.

그래서 나는 문장을 완결하지 않는다.


세계의 소리는 언제나 마침 전에 사라지기 때문이다.

닫히지 않은 문장의 틈새에는

아직 죽지 않은 미성(微聲)이 머문다.

행은 길 위의 걸음처럼 끊기고 이어지며,

침묵은 호흡처럼 새로이 리듬을 만든다.


이미지는 우회하며 번진다.

메아리가 산을 돌아 돌아 돌아오는 것처럼,

죽음과 기억, 이별과 부활이

서로의 등 뒤에서 파동처럼 흔들린다.


그렇게

나는 길에서 시를 듣는다.

플랫폼의 싸늘한 바람,

조문을 마치고 돌아오는 밤길의 소음,

캠핑장 새벽의 알람,

호수 둘레길의 푸른 냄새,

사랑초 옆을 스치는 빛의 사선.

이 모든 장소는 나에게 작은 헤테로토피아,

일상의 문이 비틀리며 열리는 틈이다.


출발과 도착 사이, 낮과 밤 사이,

삶과 죽음 사이.

세계는 그 틈에서 가장 선명하게 들린다.

그 틈의 어둠을 나는

검은 안식이라 부른다.

빛과 어둠이 서로를 몰아내지 않고 포개지는 자리,

고통의 언어가 차갑게 식지 않고 아직 살아 있는 자리.

나는 그 어둠 속에서 들으며,

판단하기보다 먼저 머물며,

완성보다 여백을 남기며,

타자의 말에 응답한다.


그래서 나는 온전한 시를 쓸 수 없다.

다만 들린 것을 옮길 뿐이다.

시를 쓰는 일은 질문을 쓰는 일과 같아서,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질문으로 질문을 더 깊게 하는 일이다.

“나는 듣는 사람인가?”

“어떻게 듣는 사람인가?”

“왜 듣는 사람인가?”

이 질문들이 이어지지 않으면

시도 이어지지 않는다.

질문 없는 시는 결국

‘헤벨의 시,’

존재하는, 존재할 수 없는 사물이다.

내가 듣는 소리는

거의 사라지기 직전의 신호다.

흐물흐물해진 사물의 경계에서

마지막으로 튀어나오는 떨림.

그 미세한 소리가 열어 주는 문은

나니아의 눈 덮인 숲처럼,

설국열차 밖의 새 세계처럼

내 눈을 열어준다.


나는 그 문을 지나 설국으로 들어가,

그 눈의 세계를 거닐다 다시 내 언어를 찾아들고

설국 밖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온다.

이 언어의 순환 속에서 시는 생존한다.

<듣는 기도 시>는 아직 어린아이의 걸음 같다.

다만, 내가 들은 세계의 미성 하나가

다음 사람에게 건네질 수 있다면,

그것이면 충분하다.


내가 오늘도

미메시스 같은 시를 쓴다는 것은

내 몸에,

위로 솟아오르려는 날개를 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아래로 파고들려는 뿌리를

접붙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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