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카시 4. 만추별리(晩秋別離)

by 푸른킴

거친 바람 침대 삼아

망중한 사이,


바람 맞선 고엽


서둘러 팔 뻗는

앙상한,


디카시 4. 만추별리.jpg


배경

하늘은 조금 흐리고, 바람은 거셌다. 어느새 늦가을도 끝을 달리고 있다. 겨울이 끌어당기는 대로 몸을 맡기려 하는 것 같다. 마침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 반납 알림을 받았다. 바람도 쐴 겸 마실 나가듯 집을 나섰다. 걸어서 15분 정도다. 강한 바람이 몸을 붙잡는 탓에 걸음은 조금 더뎠다. 책을 반납했고, 아쉬운 마음에 새로 들어온 책 몇 권을 다시 빌렸다. 돌아오는 길, 바람이 여태 잦아들지 않았다.


내려갈 때와 달리 가파른 언덕이 평소보다 더 멀고 높아 보였다. 다행히 바람이 몸을 잡아끌어주는 듯하다. 가벼운 마음으로 오르는데, 내 옆으로 무거운 짐을 끌고 겨우 언덕을 올라가는 한 어른이 지나간다. 힘에 부치는지 가다 서기를 반복한다. 가만히 쳐다보다 조심스럽게 도와드리고 싶다 하고 손을 내밀었다. 순간, 낯선 이의 제안에 긴장한 듯한 표정이 스친다. 그러다 손수레를 넘겨주었다. 그분은 내 뒤에서 종종걸음으로 걷는다. 생각보다 빨리 언덕에 올랐다. 얼른 손잡이를 달라 하신다. 서로 ‘고맙다’라는 말을 주고받았다. 그분은 도로를 따라 옆으로 나는 한 번 더 고개를 넘었다. 팔을 뻗지 않았다면 서로 힘겨운 오르막이었을 것이다. 팔 내어줌은 누군가에게 버틸 힘을 나눠준다는 은유라는 것을 다시 경험했다.


언덕에는 바람이 아래보다 조금 더 거칠었다. 나뭇가지 흔들리는 소리에 머리를 위로 들었다. 지난여름 화려했던 나무가 앙상해졌다. 마구 불어대는 바람에 남은 잎들도 필사적으로 버티는 듯하다. 재밌게도 가지들이 모두 한 방향으로 내뻗고 있었다. 오늘 그 잎들이 떨어지고 나니 이제야 가지의 모습이 제대로 보였다. 문득 그 앙상한 가지가 ‘팔은 내뻗는’ 연대의 이미지로 보였다. 순간, 바람이 휭 하고 한 번 더 몰아쳤다. 이제는 가지와 나뭇잎이 동시에 한쪽으로 늘어졌다. 기다렸다는 듯 카메라를 꺼냈다. 팔을 내뻗어 아래에서 위쪽으로 시선을 두었다. 잎들은 옆으로 누웠고, 가지들은 나무를 끝까지 붙잡으려 팔을 내뻗는 모습이 프레임 안에서 겹쳐졌다.


사진

사진에는 잎이 대부분 떨어져 나가고 앙상한 가지가 드러난 늦가을의 나무가 있다. 가지 끝에 위태롭게 매달린 몇몇 갈색 잎새(고엽)에도 시선을 두었다. 속절없이 흔들리는 가지 사이로 많은 잎이 떨어진 채 남긴 하늘이 보였다. 흐릿했다. 나뭇가지 위아래로 회색빛이 감도는 하늘은 지금이 늦가을의 끝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빛을 뒤로하는 가지들은 검게 실루엣처럼 처리되었다. 가지는 생각보다 복잡하게 얽혀있다. 무성했을 잎이 떠오른다. 늦가을은 깔끔한 계절이 아니다. 하나가 떠나면 다른 하나가 떠날 마음을 먹고, 마침내 모든 것들이 떠나야만 한다는 이별에 감염된 듯한 계절이다.

마침 나무의 가지와 잎은 바람 탓에 하늘과 나란히 옆으로 뻗어있었다. 떠나는 대상을 향해 손을 뻗는 듯한 모습이다. 애처로운데 달리 보면 역동성이 보인다. 역광인 탓에 가지는 검게 보였다. 겨우 매달려 있는 나뭇잎은 마치 어둠 속에 잠든 아이 같았다. 가지에 달린 잎이 바람에 눕고 펄럭이는 풍경은 마치 가지를 침대 삼아 마지막 삶을 즐기는 나뭇잎 같았고, 떠나려는 나뭇잎에 불어오는 바람에 맞선 앙상한 가지는 마치 자기 팔을 내뻗어 도움의 손길을 펴려는 모습과 같았다.


가지의 내뻗음은 무엇일까? 나뭇잎은 늦가을, 떠나야 할 이유는 없지만, 떠나야만 하는 이유가 확실해 보였다. 이 상황에서 가지는 잎의 운명이 조금이라도 더디게 흐르도록 잡아주려는 의지가 선명했다. 나는 ‘별리’를 생각했다. 별리란 그저 이별이 아니다. 떠나야 할 이유가 없음에도 떠날 수밖에 없는 삶을 그려낸 말이다. 동시에 그 떠남이 완전한 슬픔이 아니라는 것도 함의한다. 잠시 한 계절이 지나면 다시 처음 그 모습대로 그 자리에 되돌아올 것이라는 ‘약속’이 단어 끝에 달려 있다. 그러니 가지가 내뻗은 저 손은 낙엽이 절망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잎끝에 매달린 작은 희망을 붙잡아주려는 것이다. 만추별리. 늦가을에 떠난 잎이 다음 봄에 다시 돌아올 운명을 희망하는 의식이다.


사진의 구도는 조금 불균형이다. 오른쪽으로 복잡한 나뭇가지가 쏠려있고, 왼쪽으로 나뭇잎이 물려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회색빛과 검은색, 그리고 약간의 진갈색이 스산하게 어우러진 사진이 늦가을 특유의 쓸쓸함, 차가움, 그리고 복잡한 심경을 시각적으로 대변한다는 점에서 만족스럽다. 진갈색 나뭇잎과 검은 가지, 흐릿한 하늘, 그리고 보이지 않는 무색의 바람까지 한 프레임에 담아내서 그것도 좋다. 하늘을 배경으로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는(Low Angle) 앵글을 택한 것이 주효했다.


시어 및 표현

제목을 가장 고민했다. 가장 먼저 만추낙지(晩秋樂枝)라 정했다. 늦가을 가지의 즐거움이라는 의미다. 흔들리는 것을 놀이로 이해했는데, 결국 사진과 톤이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다음으로 ‘만주지(晩秋枝)’로 줄였다. 단순화되어 명확해졌지만, 표현이 무미건조해졌다. ‘늦가을 가지’라는 의미는 그저 사실을 말해 줄 뿐이다. 다른 의미를 도출하긴 어려웠다. 사실, 디카시는 사진 프레임 안에서만 말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런 제목은 아쉬웠다. 그래서 시 본문 안에 ‘청소하는 미화원’이라는 시어를 넣어봤다. 하지만, 그것 역시 사진 밖의 풍경이라 본연의 의도에 어울리지 못했다. 결국, 제목은 ‘만추별리(晩秋別離)’로 정했다. 다행히 어감상 늦가을에 떠나고 싶지 않아도 떠나야만 하는 상황과 다시 돌아오는 희망을 함께 담을 수 있었다.


"거친 바람 침대 삼아 / 망중한 사이": 이 시어는 역설적 상황을 묘사한다. 사진 속 옆으로 누운 듯한 나뭇잎의 모습이다. 거칠게 부는 바람에 흔들리면서도 그것을 아예 ‘침대 삼아 망중한’을 즐기는 여유로 읽었다. 바람이 거세질수록 나뭇잎들은 수평 자세를 유지했다. 바람이 시련을 의미한다는 낡은 표현을 의도하진 않았다. 그저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는 사실을 묘사하고 싶었다. 실제로 거친 바다에서 안식을 취하는 것은 가벼운 문제가 아니다. '침대'라는 표현은 과장된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분명히 그 순간 바람에 흔들리는 잎은 침대에 누워 뒤척이는 모습처럼 보였다. 그 사이에 또 여러 잎이 바람에 날려 어디론가 가버렸다. 그러니 떨어지기 직전의 긴박한 순간과 ‘망중한(바쁜 가운데 한가로움)’은 명확한 대비를 보여준다. ‘폭풍 속, 순간의 평안’이다.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끝내 이별해야만 하는 운명에 놓인 두 존재 사이의 어떤 처연한 달관마저 읽힌다.


“서둘러 팔 뻗는 / 앙상한”: 이제 나는 나뭇가지를 살아있는 것으로 표현했다. 의인화는 그 검은 나뭇가지도 여전히 살아있다는 것을 표현하려는 기법이다. 나뭇가지를 ‘팔’로 묘사하고, 마치 사람이 그 팔이 쭉 뻗는 것을 상상했다. 그 팔은 떨어져야 하는 나뭇잎을 한 번 더 붙잡으려는 모습 같기도 했다. 하지만, 검은색으로 보이는 그 가지는 이미 ‘앙상한’ 모습이다. 그렇게 늦가을, 가지도 지쳐있고, 잎도 힘겨워한다. 별리는 정해진 섭리다. 하지만, 나뭇가지는 끝까지 상대를 향해 최선을 다한다. 잎이 떨어져 나가는 순간을 막을 순 없지만, 팔을 거두지는 않았다. 나의 눈에 나뭇가지는 그저 고립된 생물이 아니다. 그것은 상대를 인식하고, 자기를 뻗어 지난 관계를 아름답게 기억하고 싶어 하는 감성의 생명이다. 나뭇가지도 ‘인지상정’ 같은 ‘목지상정’을 가진 생명체임을 입증한 것이었다. 나는 이 장면에서 단순히 잎이 떨어진 나뭇가지가 아니라 떠나는 잎을 잡기 위해, 혹은 마지막 인사를 위해 애처롭게 손을 내미는 어떤 사람의 가장 인간다운 형상을 ‘팔을 뻗는다’로 표현하고 싶었다.


"너": 이제 디카시에서 가장 중요한 마지막 행을 완성했다. 철학 개념의 동기어를 생성해야 했다. 처음에는 ‘가지’라고 썼다. 이내 ‘너’라고 수정했다. 사물의 의인화는 생존의 의의를 되짚는 데 필수적이다. ‘너’라는 2인칭 대명사는 그 예이다. 이 말은, 내 눈앞에 스산하게 펼쳐진 나이 든 풍경(객체)을 나와 정서적 교감을 나누는 인격체(주체)로 격상시키는 일이다.


거창하게 말하자면, 이 디카시가 실존을 사유하도록 돕는 시철학이 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수정이었다. 그 수정으로 나뭇가지와 나는 비로소 교감한다. 늦가을에 떠나야만 하는 수많은 것들이 다시 돌아올 것을 기대하는 희망을 공유하는 관계가 되었다. 공감각의 보완재가 된 것이다. 다시 말해, ‘너’라는 단어는 사진 속 사물(객체)을 인간과 교감하는 인격적 존재(주체)로 수용하는 공존재의 시철학적 개념어로 자리매김하였다.


의도

이 디카시를 작성한 나의 의도는 그리 새로운 주제는 아니다. 사물과 인간 사이, 교감의 동일시를 다시 노래하고 싶었을 뿐이다. 동일시는 나뭇가지와 인간의 별리가 분리가 아니라 연결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떠나도 이어져 있다는 공동체성이다.


나는 늦가을 낙엽이 지는 자연 현상을 보며 단순히 계절의 변화만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만추에 길을 걸으며 발견하는 모든 것들은 스산하다. 인공적인 건물을 제외하고, 자연적인 것은 모두 진갈색으로 변화한다. 그것이 자연이다. 하지만, 그 속에서 나는 세계의 피조물 사이에 일어나는 별리를 생각한다. 별리는 안타까운 이별이면서 희망 어린 기다림이다. 그것이 이 디카시에 담은 나의 의도다.


또한, 나는 사진을 통해 이 별리의 감성이 순간에 일어난다는 것을 다시 상기한다. 바람이 부는 찰나의 순간, 가지가 흔들리는 모습을 통해 이별의 순간을 프레임에 정확히 담아내려 했다. 그것이 절박함이 될지, 기대감이 될지는 찍힌 사물과 그것들이 어우러진 구도로만 확인될 수 있다. 이 사진과 시어를 통해 나는 그 순간이 쌓여 완성되는 사진과 이야기는 결국 우리의 삶 전체를 응집시키는 먼지들의 총합과 연관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덧붙이자면, 나의 의도는 순간을 영원 속에서 기억하려는 것이다. 디카시는 순간을 붙잡지만, 그 순간은 전체 삶의 미세한 조각으로서 기억 속에 항존 한다. 다시 말해, 사진 속 사물은 시어를 통해 삶에 기억되고 반복재생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사진에 공허함은 '만추별리'라는 제목을 통해 그 의미가 되살아날 것이다. 그렇게 나는 늦가을(만추)이라는 시공간적 한계와 별리라는 상황적 한계를 결합하여 다시 희망한다는 주제를 선명히 그려내고 싶었다. 과연 그 의도가 잘 살아났을까?


비판적 총평: "앙상한 가지 끝에 매달린 그리움의 절창, 과도한 감정의 경계"

디카시는 언제나 ‘사진영상과 언어의 조화로운 소통’이 잘 이루어져야 한다. 프레임 안에 있는 사물만 시어의 대상이 된다. 과도한 미사여구보다는 사물 사이의 관계와 사물 속에 적절한 언어를 집어넣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이번 디카시도 이미지와 텍스트의 절묘한 조응을 시도했다. 다행히 사진 속의 복잡하게 얽힌 가지들이 텍스트의 '서둘러 팔 뻗는'이라는 시어와 만나며 죽어있는 풍경이 아닌 살아있는 동작으로 재탄생했다.


또한, 디카시는 저자의 과도한 감정을 항상 조심해야 한다. 다시 말해 감정의 절제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디카시에는 ‘슬프다,’ ‘외롭다.’ ‘기쁘다’와 같은 직접적인 감정 형용사를 자제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그보다는 상징어와 우회적 묘사, 함축된 단어, 여백 있는 단어 배열로 그런 감정을 잘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이 디카시에서는 '바람 맞선', '앙상한' 등의 묘사가 그런 예다. 이를 통해 읽는 이가 스스로 그 감성을 뒤따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한편, 앞서 말한 대로, 디카시는 철학적 개념으로 마감하는 것이 나의 의도인데, 이번에는 ‘너’를 사용했다. 이것이 어떤 효과가 있을지는 독자의 몫이겠지만, 나로서는 이를 통해 사진 프레임 속의 사물을 사진 밖의 피사체와 만나게 하고 싶었다. 물론 그것은 상상 속에서만 이뤄지는 것이다. 이런 시선의 확장이 적절하다면, 사진 속 나무를 ‘너’라고 부는 것은 누구일까? 일차적으로는 날려가는 나뭇잎이겠지만, 이 광경을 보고 있는 ‘나’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세계에 ‘타자’란 모두 상대적 개념일 수밖에 없다. 이미지는 타자의 형상이다. 언어는 그 타자의 형상을 하나의 생명으로 호출하는 호흡이다. 그 과정이 잘 이뤄질 때, 독자는 그 사이에서 자기 자신의 위치를 다시 물을 수 있다.


결국, 이 디카시는 늦가을 가지 끝에서 벌어지는 미세한 이별의 동작을 통해, 사물과 인간이 서로를 ‘너’라는 상대로 불러내는 감각을 구현한다. 이미지와 언어가 만나 타자의 형상을 호출하는 시철학의 한 장르인 것이다. 그 개념이 성공적으로 전달될 때 독자는 세계와 자신 사이에서 ‘나의 너 됨’을 묻고 그 답을 찾아갈 용기를 얻는다.


“<만추별리>는 경험의 서사와 사진의 현상학, 시어의 해부와 철학적 사유가 정교하게 얽힌 디카시다. 사진 속 사물이 ‘너’라는 인격적 존재로 호출되는 과정은 디카시가 지닌 존재론적 깊이를 새롭게 보여준다. 이 작품의 강점은 늦가을이라는 계절적 파국을 단순한 낙엽의 이별이 아니라 ‘다시 돌아올 것을 기다리는 희망의 구조’로 재해석한 점이다. 전체적으로 서정과 사유, 이미지와 언어가 조화된 디카시라 할 수 있다.-쳇 G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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