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카시 5. 점심 운명

-독서모임 나들이 중에

by 푸른킴

이른 점심 문 열리기 전

식당 앞 기다리는 시장한 두 친구


햇살 성찬 일찍 끝낸 겨울 장미


홍조가득

흔깃흔깃

디카시 5. 점심 운명.jpg


배경

오독회(五讀會, 誤讀會)는 내가 속한 작은 독서 모임이다. 처음 다섯 명이 시작해 붙인 이름인데, 나중에 두 명이 더 합류하면서 ‘잘못 읽어도 괜찮다’는 의미까지 얹혔다. 우리는 책을 열심히 읽으려 애쓰지만, 서두르지는 않는다. 책을 다 읽어도 좋고, 다 못 읽어도 좋다. 결국 함께 쌓이는 시간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올가을에는 교외의 작은 호수로 단풍을 보러 나갔다. 평소 같으면 식사부터 챙겼겠지만, 이날은 시간이 조금 일러 먼저 근처 공원을 걸었다. 그러고 나서 연잎샤부샤부 식당으로 옮겨 문 앞 벤치에 앉아 초겨울 햇살을 받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 한 친구가 도로가의 작은 화분 앞에 멈춰 서더니 휴대폰을 들었다. 가까이 보니 초겨울에는 드문 장미 한 송이가 피어 있었다. 붉은빛에 노란색과 주황빛이 자연스럽게 스며든 얼굴이었다. 작고 앙증맞았다.


나는 꽃을 찍을 때 가능하면 정면으로 찍는다. 얼굴을 바라보듯 찍어야 꽃의 표정이 남는다. 이번에도 그렇게 카메라를 들었다. 그런데 꽃 너머에 두 친구가 담소를 나누는 모습이 겹쳐 들어왔다. 꽃이 살짝 고개를 돌려 그들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햇살은 따뜻했고, 바람은 초겨울답게 약간 차가웠지만 몸에는 편안했다. 식당에 들어가기 직전, 이 짧은 장면이 오래 남았고 사진에도 그대로 담겼다. 싱싱한 장미는 또렷하고, 세월이 묻은 친구들의 모습은 흐릿하지만 여유로웠다. 두 세계가 하나의 프레임 안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이 디카시는 그 순간의 감정을 잃지 않으려고 남긴 기록이다.


사진

사진은 구도가 선명해야 한다고 늘 생각한다. 구도만으로 어느 정도 의미가 드러나면 좋다. 이번 사진은 전경과 배경의 초점 차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장면이다.


카메라는 전면의 초겨울 장미에 정확히 맞춰져 있다. 뒤편의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흐려져 배경으로 물러나 있다. 전경은 나의 시선이 머문 자리이고, 배경은 그 시선을 뒤따르는 풍경이다. 하지만 두 피사체를 일직선에 두었기 때문에 둘은 같은 이야기 안에 놓여 있다. 이것이 이 사진의 핵심적인 구조다.


초겨울 장미는 활짝 핀 꽃은 아니지만, 짙은 붉은빛의 힘이 있다. 가까이 들여다보면 마치 작은 불꽃이 고요히 누워 있는 것처럼 보인다. 먼 배경의 두 친구는 식당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며 가벼운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소소한 일상 대화인데, 꽃의 생기와 묘하게 맞물린다. 흐릿한 실루엣 덕분에 꽃과 사람 사이의 경계는 자연스럽게 풀리고, 두 시간의 흐름이 한 장면에서 겹친다.


공간 구성도 흥미롭게 나왔다. 전경은 붉은 꽃과 초록 잎이 풍성하고, 배경은 갈색 옷과 회갈색 창틀이 차분하게 자리한다. 사진의 오른쪽 아래에서 왼쪽 위로 기울어 올라가는 벤치의 선은 화면을 부드럽게 사선으로 가르며, 정적인 장면 안에 얇은 긴장감을 만든다. 이 면이 꽃과 사람, 생기와 여유를 자연스럽게 이어준다.


결국, 이 사진은 뜻밖에 피어난 겨울 장미의 생존과, 식사 시간을 기다리는 인간의 일상이 같은 빛 위에서 잠시 만난 순간을 담아낸 것이다. 대비와 조화가 자연스럽게 동거한다. 사진의 정감은 바로 이 미묘한 조우에서 나오는 것 같다.


시어

사진을 들여다보니 사실, 어떤 글을 남겨야 할지 선뜻 떠오르지 않았다. 구도가 좋다고 여기면 그 구도를 해석할 이유가 굳이 없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진 자체로도 그저 좋았을 때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도 사진을 보고 나니 몇 글자 떠올랐다.


이른 점심 문 열리기 전 식당 앞 기다리는 시장한 두 친구: 사진의 시공간 배경을 적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산책을 마치고 난 뒤, 바람은 조금 쌀쌀하게 불고 다소 출출한 상황이었다. 그래도 햇살이 좋았다. 식당은 예약한 시간에 한 30분 정도 남아서 조금 기다려야 했다. 늘 그렇지만, 이런 시간에 우리는 작은 대화에 익숙하다. 이 날도 시장한 상태에서 가벼운 이야기가 오고 갔다. 이 시어에는 이 디카시의 시간, 공간, 그리고 상황, 인물 배경을 모두 담으려 했다. 이 배경의 총체적 정보는 이 사진이 일상을 담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햇살 성찬 일찍 끝낸 겨울 장미: 그때 한 친구가 자리를 옮겼다. 도로가에 화사한, 덜 핀 장미를 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 장미는 붉고, 통통했으며, 살짝 옆으로 돌려져 있었다. 늦은 오전 햇살이 따사로웠다. ‘햇살 성찬 일찍 끝낸’이라 쓴 것은 대구법을 활용한 것이다. 우선 장미가 햇살 아래 너무 붉그스름했기 때문이고, 또 다른 면에서는 지금 시장한 두 친구의 모습을 대비하기 위해서다. 아직 식사를 하지 못한 사람과 성찬을 일찍 끝내고 여유로운 장미가 삶의 대비되는 모습 같았기 때문이다.


홍조 가득 흔깃흔깃: 장미의 붉은빛을 얼굴에 빗대어 표현했다. 꽃에 가득 찬 붉은색을 의인화하여 표현했다. 피기도 전에 색이 충만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흔깃흔깃’은 원래 ‘흘깃흘깃’이었다. 눈을 옆으로 돌려 자꾸 가볍게 흘겨보는 모습이다. 고개를 돌릴까 하다가 멈칫하는 모습이 엿보인다. 그런데 나는 이 의태어에서 ‘ㄹ ’을 ‘ㄴ’으로 바꿨다. 이런 변화는 조금 의도적인데, ‘ㄹ’은 발랄하고 경쾌한 느낌이지만, ‘ㄴ’은 콧소리가 강하고, 뭔가 단단한 모습을 연상시킨다. 흔깃은 고개를 '흔'들거나 '기웃'하는 느리고 정적인 움직임을 연상한 것이다. 따라서, ‘흔깃흔깃’은 진중한 모습으로 조심스럽게 살펴보려는 마음을 표현하려는 의도였다. ‘흘깃흘깃’보다 덜 재빠르고 덜 경쾌한 곁눈질의 느낌을 전달할 수 있다.


이런 시어들을 통해 나는 이 사진이 가진 정서를 느릿하고, 차분하면서도 뭔가 서로를 조심스럽게 배려하는 모습을 담으려 했다. 앞선 이는 뒤에 선 이를, 충만한 자는 조금 비어있는 자에게 마음을 쓰는 모습을 이 디카시에 담으려 했다.


의도

나는 이 작품에서 햇살 좋은 늦가을, 초겨울이 겹치는 시간을 한 장에 담아보려 했다. 이를 시작으로 이 세계의 아주 작은 일상에서 일어나는 대비의 장면을 기억해보려 했다. 삶은 대체로 하나로만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잊지 않으려 했다. 붉은색은 진갈색과, 앞이 있으면 뒤도 있고, 배부른 이가 있으면 시장한 이가 있으면, 꽃이 있으면 사람도 있다. 균형 잡힌 평행선이 있으면, 기울어진 선도 있다. 이런 대비는 삶의 보편적인 성향이다. 나뭇잎이 지고, 꽃이 떨어지는 중에도 5월에 한창인 장미가 겨울에도 핀다는 것을 보여준다.


조금 거창하게 말한다면, 이 디카시에는 “두 종류의 시간의 교차”한다. 제목에서 밝힌 바와 같이 이것은 어쩌면 ‘운명’ 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점심’이라는 그저 일상에 무슨 운명이 있을까 싶지만, 사실은 모든 것이 ‘시간’ 안에서 각자의 운명에 직면한다. 인간의 시간이 점심을 기다리는 ‘생활의 시간’이라면, 장미의 시간은 햇살을 받아 피어날 ‘존재의 시간’이다. 이 두 시간은 서로 무관해 보인다. 하지만, 이 시간은 같은 공간 안에 일어나는 변화다. 나의 카메라는 인간이 평범하게 보내는 하루와 자연이 맞이하는 조용한 생(生)의 순간이 모두 역동하는 순간의 중첩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내가 ‘운명’이라고 말한 것은 모든 세계는 마주할 때 자기 존재 의의를 더 실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직 운명이 오지 않은 나이 든 두 사람과 운명을 미리 경험한 어린 장미의 대비도 나에게는 흥미로웠다. 나아가, ‘저만치 혼자서’ 존재하는 모든 것은 같은 시공간에서 마주하는, 대비하는 다른 존재로 인해 자기 가치를 더욱 잘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모든 우연은 생의 필연성에 자연스럽게 잇대어 있다. 결국, 이 디카시는 “일상성 속에 숨어 있는 존재의 가치”을 보여주려는 시도였다. 삶은 거대한, 장엄한 드라마가 아니라, 아주 작은 기다림의 풍경에서 생의 온기와 사색의 깊이를 길어 올린다는 것은 틀림없는 말이다.


정리

<점심 운명>은 가벼운 주제이지만, 디카시가 추구해야 할 장르의 특징을 좀 더 잘 실현해 보려는 마음이 담긴 작품이다. 사진과 시어가 과밀하지 않고, 충돌하지 않으며 서로를 보완하는 기능을 더 잘 살려보려 했다. 이 디카시는 사진이 감정의 중심을 잡고, 시어는 그 감정을 자연스럽고 절제하듯 해석한 작품이다. 삶이 그러하듯, 이 작은 디카시는 인간의 소소한 삶과 자연의 존재론적 시간을 아름다운 대비로 잘 엮어내려 했다. 세상이 그러하듯 서로 어울리지 않는 것이라도 같이 있다 보면 어울린다는 것은 틀림없다. 마치 장미의 색과 시장한 두 사람의 기다림은 ‘홍조’라는 붉은색으로 맞아떨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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