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비 기도

–서평을 보내고

by 푸른킴

바람이 불고, 비가 흩어졌다.

하루를 꼬박 책상에 앉아 있던 사이,

남아 있던 잎들이 모두 사라졌다.

추워진 서재에 온풍기를 잠시 돌리고,

오래 묵혀두었던 만년필을 꺼낸다.

촉은 무뎌 있고, 잉크는 말라 있다.

흐르는 물에 펜촉을 씻어 잔묵을 털어내고,

새 잉크를 넣는다.


몇 번 끄적이면 글씨가 부드럽게 흘러나온다.

만년필을 손에 쥐는 순간,

마치 비처럼 스며 흐르는 듯하다.

창밖의 비는 방향 없이 흘러내리고,

낙수 소리는 가볍다.


창을 열면 비가 들이치고,

닫으면 잦아든다.

굵지도 가늘지도 않은,

듣기에 알맞고 흩어지기 좋은 빗소리.

비는 새벽부터 내려

늦은 오후까지 이어졌다.

아마 내일 해가 뜰 때까지

이 비의 향연이 계속되리라.

비 끝에 열릴 초겨울의 청명함을

나는 미리 그려본다.

그리고 다시 만년필을 만지작만지작하다

작은 절취 수첩을 꺼낸다.

무심히 몇 글자 적는다.


무엇을 써야 하는 것도 아닌,

그저 글을 흘려보내는 일이다.

비 오는 날의 글멍은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한 방울의 리듬에 기대어

아무 데로나 흘러간다.


오늘도 여러 사람의 글을 읽었다.

글은 난만하게 흩어지는 정신을

서재 한가운데 붙들어 놓는다.

비처럼, 글 속의 말도

저마다 다른 소리를 낸다.

어떤 이는 분노하고,

어떤 이는 울며,

또 어떤 이는 감사하고,

또 다른 이는 억울함을 토한다.

하늘의 뜻과 땅의 호소가

문장 속에서 서로 부딪히고 스민다.

나는 그 글을 읽으며

작게 기도한다.

여릿하게나마

그들의 하루에 닿기 위해.

비는 아직도 떨어지고,

바람은 사라지고,

어둠은 더 깊이 스며든다.

침묵의 서재 한편에선

시 한 줄도 작은 불빛이 된다.

“비가 내리는 밤이면
나는 지난 계절의 기억을
한 움큼 집어다 버려도 좋을 일이다.”

그 문장을 곁에 두고

오래된 책을 펼친다.


오늘 나는

서평 하나를 마무리했다.

나에게 서평은

단순한 독후감이 아니다.

그것은 책이 태어난 시대의 공기를

다시 읽는 일,

삶의 자리를 더듬는 일,

보이지 않는 문제의식을

새로 읊조리는 일이다.

“지금 이 책이 말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서평은 그 물음에서 시작된다.

여섯 번의 퇴고 끝에

다행히

오늘 글도 끝내 제 길을 찾았다.

아쉬움이 있겠지만

끝은 끝이다.


쓰기를 마치고

습관대로

원두를 갈아 커피를 내린다.

검붉은 커피가 조금 식어가길

기다리며

창밖을 바라본다.

비와 바람과 구름과 나뭇잎이

어디쯤 멀어졌는지 헤아린다.

떠나간 우풍운엽은

언젠가 새 모습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러나 떠나간 글은

제대로 돌아오지 못할 때가 많다.

대부분은

분투의 상처만 품고 돌아온다.

그런데,

그 상처의 자리에서

어김없이 새 씨앗이 돋아난다.

그래서 나의 서평은

책 너머의 세계를 여는 작은 문,

현실에서 누리는 가장 영적인 작업이다.


나는 오늘도 기도한다.

나의 서평이 살아 있기를.

분노와 슬픔, 억울함과 한숨으로

하루를 버틴 이들에게 닿기를.

비가 그치고 아침이 오면

초겨울의 여린 햇살이

누군가의 삶에 스며들어

영원으로 날아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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