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가을에 어린 겨울을 딛고 해맑은 봄을 마음 깊이 희구하다.
응석 부리며 다가오는 겨울
만추(晩秋)다. 주일 아침 차로 한 시간가량 떨어진 곳을 다녀오려고 길을 나섰다. 고속도로 건너편 둑방길에 가을이 짙게 물들고 있다. 나무는 하루가 다르게 속을 비워낸다. 나무들은 긴 겨울은 나기 위해 가지 사이로 흐르는 빛을 붙잡아 이슬처럼 머금으려고 애쓴다. 어쩔 수 없이 묵은 잎을 떨어내야 하는 아쉬운 심정이 멀리서도 눈에 띈다. 더 멀리 산도 겨울로 내달리는 모습을 감추지 못한다. 다행히 여태 곱고 아름다우며 부드러운 능선을 간직하는 산도 있지만, 탁해진 나뭇가지 사이로 감춰두었던 가파른 능선을 드러내고야 마는 산도 나란히 있다.
산의 속살은 겨울이어야 산대로 볼 수 있다. 이 사실을 알고 난 뒤에 나는 이 나이 들어가는 가을 산에 나도 모르게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만추여야 유동(幼冬)이기 때문이다. 응석 부리기 시작하며 다가오는 겨울이 이 가을이 끝나가야만 조금씩 싹을 낼 수 있다.
서재, 만추의 헤테로-토포스
만추(晩秋)다. 코로나 직후 서재를 옮겨야 해서 힘겹게 새로 장만한 서재는 도시의 외곽 공원 아래 있다. 감사한 것은 이 허름한 건물이 항상 고즈넉하다는 점이다. 머무는 이가 단출하니 건물 주위로 드나드는 이도 거의 없다. 가끔 물건이 배달되어 문 한쪽에 놓이는 소리가 바람에 실려 밀려들어 오는 것 말고는 그저 고요하다.
주변에 거주하는 분들도 대체로 연로하셔서 정해진 산책 시간이 아니면 문밖으로 나서지 않는다. 격동하며 살았던 날들이 지나고 맞이하는 이 정중고(靜中孤, 고요한 중에 고독함)는 어쩌면 가벼운 축복일지도 모르겠다. 거침없이 움직이던 몸을 제 발로 묶어두고, 문 열면 자신도 어쩔 수 없이 역동적이어야만 했던 세계를 미련 없이 밀쳐둘 수 있으니 말이다. 어쩌면 헐거운 행복일지도 모르겠다.
이 서재는 이 고요함과 함께 창밖 아까시나무가 보여주는 계절의 변화가 특별한 장점이다. 특히 만추에 어울린다. 글을 읽고, 쓰며 생성하고 소멸하는 글자 하나하나에 마음과 생각을 담으며 스스로 고즈넉해지는 즐거운 놀이를 즐길 수 있어 좋다. 나이 들어가는 이 계절에 어울리는 헤테로-토포스(hetero-topos)다. 이 서재에서 찬 바람에 아랑곳하지 않고 느릿한 걸음으로 자기 길로 내딛는 만추를, 멀리서 바라보는 유동 幼冬의 눈길이 다사롭다.
지난여름 걸었던 들판
만추(晩秋)다. 동네로 들어서는 오르막길 옆으로 좁은 개울이 있다. 그 개울길 옆으로 굳게 닫힌 빌라들이 늘어서 있다. 한 분이 집 밖으로 나와 그 길에 조금 남아있던 가을의 흔적들을 싹 쓸어 담아내고 있다. 이제 사람 손길이 더 필요 없이 깨끗해진 길은 겨울로 들어설 준비를 마쳤다. 이 가을이 이 개울로 흘러오기 전, 어느 들판에서는 새싹 같은 어린 벼가 심어지고, 자라고, 벼 줄기가 피어올라 마침내 이삭을 맺고, 곡식을 쏟아냈을 것이다. 도시는 가을을 서둘러 거둬내지만, 어느 시골은 가을의 끝을 절실한 마음으로 붙잡고 있으리라. 바람을 견디며, 햇살과 열기를 버텨내는 중이리라.
지난여름 걸었던 군산의 한 들판이 떠오른다. 얼마 전 다시 찾아가 보니 겉으로 보기에도 생명의 싸움터 같았다. 거친 비에 쓰러진 볏단 사이에서 자기 줄기를 견고하게 붙잡고 살아낸 흔적이 오히려 처참하기도 했다. 황금빛 뒤에 묻어있는 진흙탕 범벅을 잊을 수가 있을까. 무엇이든 삶은 누군가의 죽음에 빚지지 않을 수 없을 테다. 길을 걸으며 생각해 보니 나의 삶은 알 수 없는 것들의 어떤 죽음이 베풀어준 은총이리라. 이 엄연한 사실을, 저 비어있는 들판이 지나온 시간을 거슬러 기억하게 한다. 그렇다. 만추는 견고한 생이 스스로 아름답게 저물어간다는 계절표지다. 생기 탱천한 유동 幼冬이라도 저 만추 뒤에서 만추가 흘러온 앞길을 겸허히 되짚는다. 가을바람이 그 사이를 잇는다.
정치는 모든 것을 정치(定置)하는 인간의 미덕
만추(晩秋)다. 지난 12월 3일, 순식간에 모든 것이 뒤죽박죽 되어버렸던 그날 이후로, 우리는 다시 ‘세월’을 마음 깊은 곳에 묻어두고, 남은 시간을 짐처럼 온몸에 새긴 채 살아가고 있다. 그 오래된 탄원은 여전히 광장을 맴돌고 있지만, 세계는 여전히 무정하고 부동하다. 정치(政治)란 본디 ‘바르게 놓음’, 곧 정치(定置)여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으나, 그 자리 맡김은 아직도 멀기만 하다. ‘세월’의 아픈 기억이 하루빨리 다독여지기를 바랄 뿐이다.
그런데도 흔들리는 세계는 어느새 발전이라는 연륜을 더해가고 있다. 세월도 함께 나이 들어가지만, 그 시간을 관조하는 지혜는 여전히 유동 幼冬 같다. 마치 한 노래처럼,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이 미약하게나마 되살아나고 있다. 만추처럼 늙어버린 것들은 떠나보내고, 유동처럼 삶을 경각시키는 추위를 견디어내야 저 들판처럼 봄의 환희를 다시 맞을 수 있을 것이다.
찬 거리에서 밥을 먹어야 하는 삶은 더는 있어서는 안 된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한 끼 밥상, 입맛을 돋우는 국, 정갈하게 버무린 반찬이 놓인 평범한 상을 마음껏 받아들일 수 있는 시간—그것이야말로 정치가 보장해야 할 최소한의 자존이다. 찬 겨울 같은 삶에서 밥을 끓고 마음으로 탄원하게 만드는 일은 결코 정치가 만들어서는 안 되는 고통이다.
만추에는, 유동 幼冬 앞에서 한 끼 양식을 마주한 얼굴들이 꽃처럼 피어나는 풍경을 보고 싶다. 그것이 정치의 본질이며, 인간이 서로에게 부여할 수 있는 가장 단정한 미덕일 것이다.
路得記(로득기)의 계절
만추(晩秋)다. 이 계절이 오면, 나는 어김없이 그 책을 읽는다. 히브리인들의 타나크. 열다섯 번째 책, 룻기(룻記)다. 언젠가 중국을 여행할 때, 이 책의 제목을 그곳에서 다시 읽은 적이 있다. 새로울 것은 없을지 모르나 늘 인상적이었다. 나는 그 어느 길에서 한참 머물러 그 제목과 내용을 되새겼다. 路得記(로득기). 아마도 우연일 것이다. 우연이라지만, 그 이름이 책을 오롯이 담아내 주었다. ‘길을 얻음, 그 이야기’. 히브리인들의 이야기 룻(Ruth) 기는 ‘길을 떠나고 길에서 얻고, 길에서 삶과 죽음을 겪고, 길에서 희망을 읽었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으니 적격이다.
‘룻기’는 이 계절에 잘 어울린다. 아침 안개가 아직 삶을 가리고 있다지만, 그 희뿌연 들판 어디선가 어김없이 새로운 싹이 나고 희망이 움튼다. 유동 幼冬이 밀려오는 들판에 봄이 바짝 다가오고 있는 소리를 들려준다. ‘룻’을 ‘친구’라는 뜻으로 읽을 수 있던 히브리인들은 빈 들에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그 벌판을 햇살 가득한 너른 들판(曠野)으로 볼 수 있었다. 만추유동을 넘어 상춘(常春)이 넘실대고 있다는 것을 체감한 것이다. 나는 해마다 만추에는 룻이야기를 마음에 담는다.
잃어버린 단어를 찾아가는 글 찾기의 여정
만추(晩秋)다. 히브리인들이 남긴 그 책에는 사라진 단어 하나가 있다. 49열 여섯 번째 단어. 자음은 지워지고 발음만 남아 있는, 매우 드문 경우다. 누가 그 단어를 잃어버렸는지, 혹은 일부러 지워버렸는지는 알 길이 없다. 애초에 그런 일은 일어나서도, 허락되어서도 안 되는 일이다. 비어 있는 자리에는 어쩌면 두려움이 깃들어 있었을지 모른다.
학자들은 오래된 추정 끝에 그럴듯한 복원을 제시해 두었다. 의미로 따지면 특별할 것도, 대단할 것도 없는 단어다. 그러나 나는 만추가 깊어질 즈음이면 어김없이 그 빈칸을 찾아 남은 발음을 되뇌어본다.
그런데 그 빈칸의 단어를 읊조리다 보니 마치 만추 들판이나 숲길에서 마주치는 빈 가지와도 닮았다. 잎이 모두 떨어져 나가 더는 그 나무의 정체를 알 수 없는, 하지만 분명 지난여름에는 어떤 생의 흔적을 지녔을 가지였을 것이다. 길을 걷다 우연히 어느 가지에서 떨어진 잎사귀 하나를 주워 들여다보면, 문득 잊힌 계절의 단어가 기적처럼 떠오를 때가 있다.
흘러가 버릴 기억은 그렇게 몸 어딘가에 저장된다. 단어가 사라져도 흔적을 읽어주면 다시 의미가 들려오는 것처럼, 만추에 떨어진 잎도 가만히 읊조리다 보면 잊힌 이야기를 다시 떠올리게 한다. 만추의 공백은 결국 ‘사라짐’이 아니라, 되새김과 회복을 위한 여백임을 조용히 알려준다.
가을과 봄 사이, 겨울이라는 선물
만추(晩秋)다. 가벼워지는 계절이고, 비워지는 절기다. 묵직한 것 없이 가벼워지기만 하려 하고, 채운 것 없이 비워내기만 상념 하는 늙은 버릇도 여전하다. 한시라도 서둘러, 찬바람 밀려오기 전에 결실하나 더 채워두어야 한다는 것을 입버릇처럼 내 몸에 새겨야 한다지만, 그저 길 하나 제대로 걸어내는 것 정도로도 충분한 삶이 되어버렸다. 살아갈수록 손(損)이 익(益)을 더 크고 강하게 지배하는 걸 감수한다.
이것이 처음부터 부여받은 사명이었다면, 이제야 그것을 제대로 감당해내고 있는 셈이다. 나이 들어가는 것 속에 지혜가 담겨 있다면 그 지혜란 오히려 단출한 것이다. 자기 존재 이유를 스스로 밝혀내는 정도로 충분할 테니. 가을이 가는 길목에 봄이 다가오고 있다. 그 봄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겨울’을 지나야 한다는 것을 아는 정도면 지혜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만추유동 상춘희원’
나의 평화를 위한 너의 미미(微美)한 기도
만추(晩秋)다. 하루하루 삶을 파고드는 바이러스 같은 일들과 공생하며 사느라 힘겨웠던 날들을 아직도 버텨내야 한다. 하지만, 나는 나를 공감해 주고 지탱해 준 이들 덕분에 이 무서운 시간의 급류에 휩쓸리지 않고 올해도 살아낼 수 있었다. 나는 그저 평화로운 일상을 누릴 날이 언젠가 밀려오길 기다리진 않는다. 세계는 거칠고, 숨 가쁜 시간으로 기약 없이 더 격하게 흘러갈 것이다.
그러니 지금이 충분히 평화다. 비록 고단한 평화라지만, 계절 끝까지 잘 걸어왔다. 그 평화가 아직 삶에 견고하게 자리를 지키며 남아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나를 위해 자기 삶을 기꺼이 내어준 이들을 위한 미미(微美)한 기도가 있다. 희망 가득한 탄원이다.
‘누구든 만추유동을 넘어 상춘 常春에 닿도록 꿋꿋하게 걸어가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