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한 톨
당당하게
겨울 한 밤
단단하게
버텨낼,
생명의 양식ㅡ
까치 휴게소
영업 중
배경
서재 근처 작은 공원 옆 산책로에 가로수처럼 감나무가 하나 있다. 관리하는 사람도 없어 저절로 열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떨어진다. 밤나무와 함께 있는 이 나무는 유독 늦가을까지 감이 달린 채로 바람에 흔들리는 일이 자주 있다.
하늘은 맑고, 공기는 상쾌해서 아주 유쾌한 겨울 날씨에 이 산책로를 걸었다. 특히 이날 높이 솟은 가지 하나에 감 하나가 달려 유난히 눈에 띄었다. 까치밥은 분명한데, 까치들마저도 그냥 두고 간 것인가 싶었다. 분명 오가는 까치들에게 마지막 희망의 양식일 텐데, 오롯이 달린 것이 신박했다.
사진에 담아 잔가지를 정리하고 나니 깃발 같은 가지에 주황색 감 하나가 더욱 도드라진다. 그런데 사진에 담기진 않았지만, 멀리서 까치 한 마리가 기웃기웃하기도 했다. 감 하나와 한 마리 까치, 그리고 그것을 올려다보는 내가 묘하게 어울렸다. 무엇보다 겨우 감 하나 매달린 나뭇가지가 맑은 하늘에 꿋꿋이 서 있는 장면에서 나는 어떤 생존 의지를 강하게 느꼈다.
사진
최종 다듬은 사진에는 한겨울, 잎 하나 남지 않은 나무 기둥이 선명해졌다. 푸른 하늘을 향해 솟구치듯 찌르는 형상이다. 찬바람을 맞으며 그 끝에 감 한 알이 매달려 있다. 주변엔 잔가지뿐 열매라고는 더 없다. 화면 대부분은 맑은 파란색이 차지한다. 여기에 중앙을 가르는 연한 회색 기둥같이 쭉 뻗은 가지, 그리고 꼭대기의 접착된 듯 주황빛 감 하나만 덩그렇게 남아 있다. 이런 요소와 배경으로 나는 극단적으로 간결화된 미니멀리즘을 구현해보고 싶었다.
사실, 이 사진을 찍을 때 처음 느낀 감정은 위태롭다였다. 그러나 이내 아름답다는 생각이 뒤를 이었다. 간결한 구도가 불안했지만, 사진 프레임 밖에서 까치 한 마리가 날아오는 광경은 떠올릴수록 멋진 풍경이었다. 사진에 다 담기지 않는 것을 눈에 담는 것이 중요한 이유다.
어쨌든 사진에 저 높이 달린 감 한 알을 클로즈업했다. 사진의 구도는 아래에서 위로 올려 찍은 것이다.
내가 사진의 제목을 「까치 휴게소」라 붙인 것도 이 사진이 생명의 양식을 함의하기 때문이다. 나무와 감이 버티고 있는 순간, 보이지 않는 까치의 날아듦은 그저 단순한, 우연한 풍경이 아니라, 생명 보존을 위한 노력이자, 그것을 위한 하나의 쉼터와 식탁을 제공하는 숭고한 일이다.
시어
사진을 단순화한 했기에 시어는 좀 더 풍성해야 했다. 그렇다고 과밀하거나 과도해서는 안 된다. 언어의 절제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사진 속 색상도 차가운 파랑과 따뜻한 주황, 진갈색뿐이다. 하여, 시어도 이런 대조적인 장면과 그 사이를 이어주는 경계선의 언어가 필요했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이 사진을 필요와 채움이라는 대비되는 경계 구도와 표지판이라는 의미로 해석했다.
밥 한 톨: 누구나 알듯이 쌀 한 알은 기본 식량, 생존의 극 최소 단위다. 특히 ‘밥’은 한국 문화에서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삶 자체, ‘밥벌이’와 ‘밥상 공동체’를 떠올리게 하는 단어다. 나는 높이 매달린 감 하나를 감 한 알로 말하지 않고, ‘밥 한 톨’로 명명했다. 이것은 까치와 같은 새들을 위한 양식이며, 그들의 마지막 남은 한 끼 식사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겨울 한 밤 / 단단하게 / 버텨낼,: 이제 이 감을 먹고 나면 말 그대로 혹독한 계절, 길고 추운 밤 같은 겨울을 지내야 할 것이다. 새들이라고 해서 그 추위를 그냥 견디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굳은 의지와 견고한 체력이 몸 안팎으로 필요하다. 저 마지막 감 하나가 그런 힘을 제공한다. ‘단단하게’와 ‘버텨낼’이라는 시어에는 그런 현재의 의지와 미래의 각오가 동시에 담겨 있다. 이 두 의미가 겹쳐져, 한 마리 새가 물리적 추위뿐 아니라 존재적 시련을 버텨내는 성과를 얻길 기대했다. 또한, 끝 단어 ‘버텨낼’ 다음에 쉼표를 둠으로써, 그다음 줄 ‘생명의 양식―’으로 이어지는 여백과 숨을 의도했다. 아울러 겨울 한 밤은 앞선 ‘밥 한 톨’과 형식과 내용이 긴밀해지도록 고대 히브리인들의 시작법인 이른바 ‘평행법’을 구사한 것이다.
생명의 양식―: 이 말은 오래된 기독교의 찬송 제목이기도 하다. 이 제목에는 신학의 뉘앙스를 살려보려 했다. 감 하나는 까치에게는 실제 양식이다. 생명의 양식인 셈이다. 그것을 관찰하는 나에게는 모든 생명이 누군가의 버팀 위에서 산다는 것을 일깨우는 내적 생명의 양식이다. 앞 시어들과 한 줄 띄어 쓴 것은 양식의 질적 차이를 말하고 싶어서다. 어떤 경우이든 생명을 이어가는 양식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까치 휴게소 / 영업 중:이 시어는 앞의 묵상적 어휘를 현실로 끌어내리려는 전략을 반영한다. 특히 감이 높이 매달린 가지는 고속도로 휴게소의 입간판이라고 상상했다. 따라서 시제목을 간판처럼 매달았다. 가볍고 유머러스하지만, 이 시의 기본 정서에는 안성맞춤이다. 그리고 이 분위기를 이어 ‘영업 중’이라고 썼다. 비록 감은 하나밖에 없지만, 내년 가을에도 이 나무는 수많은 감을 제공할 것이다. 그러니 ‘지금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것이다. 나무와 감은 제 역할을 끝내버린 존재가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아니 내일과 그다음에도 생명을 위해 양식을 제공하는 자기 역할을 지속할 것이다.
결국, 이 시어의 핵심은 감 하나 속에 여전히 수많은 생명의 씨앗이 담겨 있다는 생명의 영속성이다. 감과 까치, 그리고 그 광경을 보는 사람들을 잇는 생명의 선이 견고하다.
의도
나는 이 디카시에서 생명은 홀로, 한순간만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버티게 하며 이어지는 것임을 말하고 싶었다. 감 하나가 열리기까지는 나무와 계절, 햇빛과 비, 바람이 함께 만든 긴 시간이 필요하다. 까치 한 마리가 겨울을 나기 위해서도 단지 날갯짓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인간의 삶 또한 이 둘과 무관하지 않다. 이렇게 세계는 보이지 않는 연결 속에서, 시간을 건너며 함께 공존한다.
겨울이 되면 감나무는 겉보기엔 자기 역할을 다한 것처럼 보인다. 잎은 모두 떨어지고, 마지막 열매마저 땅에 떨어지면 죽은 듯 서 있는 나무만 남는다. 많은 이가 그것을 생명의 순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그 이해가 정확하지 않다고 느낀다. 오히려 나무는 죽은 듯 보이는 겨울 동안 더 치열하게 생존을 위해 분투한다. 마지막 열매 하나가 떨어진다 해서 생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다음 생을 위한 준비가 조용히 계속된다.
특히 가지 끝의 마지막 열매를 다른 생명을 살리는 ‘밥 한 톨’로 남겨 주었다는 점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나는 그 감 한 알이 끝까지 ‘버틴다’는 것과 동시에 누군가를 위해 ‘내어준다’라는 것을 함께 생각했다. 주기 위해 버티고, 버텨냄으로써 누군가의 양식이 되는 원리. 한 알의 감이 추위를 버티고 나면, 새들은 그 열매로 최후의 한 끼 식사를 얻고, 또 다른 겨울이 올 때까지 살아간다. 누군가의 버팀이 누군가에게는 양식이 되는 이 구조를 기억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감 한 알을 ‘밥 한 톨’이라 부르고, 그 자리를 「까치 휴게소」라 명명했다. 이 명명 행위는 겨울 풍경을 단순한 계절의 배경이 아니라, 생태적·윤리적 공간, 곧 생명을 위한 작은 쉼터이자 식탁으로 다시 읽게 한다. 마지막 구절 ‘영업 중’은 이 장면을 과거의 한때가 아니라 지금도 진행 중인 은혜로 남기기 위한 장치다. 아직도, 지금도, 어딘가에서는 누군가가 생명을 위해 버티고, 또 누군가는 그 버팀 위에서 밥을 먹고 산다.
나는 나무 아래에서, 누군가를 위해 자기 마지막 생을 기꺼이 던져주는 일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직접 목격했다. 긴장감으로 가득한 장면이었지만, 동시에 하나의 생명이 다른 생명의 자기 비움으로 유지된다는 사실을 이 작은 감 하나를 통해 체험했다. 이 디카시는 그 깨달음을 한 편의 짧은 시와 한 장의 사진에 담아보려는 시도다.
정리
디카시는 철학을 함의할 때 좀 더 의의가 있는 것 같다. 나는 이 시에서 '작은 것들의 연대가 아름답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이 디카시의 사진과 시어, 그리고 그에 담긴 사유는 거대한 것을 말하기 위해 반드시 거대한 대상을 데려올 필요는 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 나는 거대한 나무 전체도, 무수한 가지들도 아니라, 그 끝에 매달린 감 하나에 집중했다. 밥 한 톨은 ‘생존을 위한 최소 단위’를 상징한다. 인간도, 까치도, 모든 생명은 각자에게 적합한 최소 생명 유지 단위가 이어질 때 살아간다. 그러나 이 최소 단위는 너무 작고 사소해 보여서 쉽게 버려지고, 지나쳐지기 쉽다.
나는 그 사소한 한 톨을 화면의 정중앙에 세우고, 시 속에 ‘당당하게’라는 형용사를 붙여 그 존재론적 위상을 재조명하고자 했다. 철학적으로 말하면, 존재는 크기나 힘이 아니라, 타자의 삶을 얼마나 지탱하느냐에 따라 평가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밥 한 톨은 ‘하찮음을 통해 드러난 거룩의 평범함’이다. 가장 작은 것이 실제로는 가장 큰 일을 하는 자리, 그 자리를 이 시는 응시한다.
또한 ‘겨울 한 밤’이라는 표현에는 버팀의 철학이 담겨 있다. 긴 어둠과 차가운 겨울을 버텨내는 힘은 감 한 알 같은 작고 연약한 것에서조차 뿜어져 나올 수 있다. 겨울은 생명이 움츠러드는 계절이지만 동시에 성장과 결실 이후에 맞는 침묵과 휴지의 시간, 새로운 변화를 준비하는 시간이다. 그 겨울의 한밤을 ‘버텨낸다’는 말은 시간을 수동적으로 견디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건너가는 능동적 태도를 드러낸다. 나무와 열매가 보여주는 버팀은 인간이 겪는 불확실성과 고통의 밤을 은유하며, 그 밤을 통과한 존재만이 결국 다른 생명을 먹이는 “양식”이 된다.
철학적으로 이 디카시는 시간을 소비하는 주체의 관점이 아니라, 시간을 견디고 통과하는 존재의 관점에서 삶의 의의를 다시 사유하려는 시도다. 그래서 결국 다음과 같은 물음을 남긴다.
“가장 작은 것은 정말 하찮은가?”
“우리가 매일같이 누리는 ‘밥 한 톨’은, 사실은 누군가의 버팀과 내어줌 위에 얹힌 선물은 아닌가?”
요컨대, 「까치 휴게소」는 단순한 겨울 풍경을 넘어서, 버팀과 나눔, 환대와 생태, 그리고 성탄의 의미를 하나의 사진과 몇 줄의 시어에 압축해 담아보려는 작은 철학시다. 이 작은 ‘까치 휴게소’라는 장면 안에, 서로를 살리는 생명의 우주가 숨어 있다는 것을 시적으로 표현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