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시(待視/時)절에 대하여:인간의 삶을 주시하는 절기
대시절 의미
이제 대시절입니다. 이 명명은 기다림을 나의 시선과 관련지어 해석하는 개념입니다. 다시 말해, ‘카이로스(kairos)’를 나의 시선으로 포착한다는 의미입니다. 앞서 살펴본, 대강절이 하늘의 하나님이 ‘낮은 곳으로 내려오셨다.’라는 것을 생각하는 절기이고, 대탐절은 지금 그분이 어디에 머물고 계신지를 ‘찾아 나서는’ 절기라면, 대시(待視/時)절은 그분이 나의 현실에 반드시 틈입한다는 것을 알고 주시한다는 개념을 함의합니다. 이 ‘카이로스’는 단지 시간의 흐름이 아닙니다. 이것은 삶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변화의 척도,’ 사건의 축적입니다.
대시절과 문학-'때'를 분별하는 지혜
그런 점에서 대시절은 문학과 밀접합니다. 문학은 단지 흘러가는 시간에 편승하지 않습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절묘하게 섞여 있는 사건으로 받아들입니다. 또한, 문학은 한 사람의 생애에서 일어나는 카이로스를 세계와 타인과 관계 속에서 전지적 시점으로 조망하려 합니다. 이처럼 대시절은 달력과 시계에 숫자로 기록된 시간이 아니라 문학으로 전환된 사건의 시간입니다.
이런 관점은 이미 과학에서 오랫동안 천착된 주제와 조응합니다. 까를로 로벨리의 물리학적 견해에 따르면 더욱 명확해집니다. 즉, 대시절의 의미를 ‘때를 본다, 주시한다’라고 이해하는 겁니다. 이는 삶의 미세한 변화를 감지하고, 그것이 무엇과 관계를 맺으며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는지를 추적하는 일입니다.
또한,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미분하고 동시에 적분하면서 그 변화의 추이를 이해하려는 과학적 태도이기도 합니다. 분해와 축적의 변화에 모두 감응하는 것입니다. 이런 견해는 이미 고대 히브리 지혜자 코헬렛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글 전도서 3장에서 ‘시간’을 인간에게 감춰진 변화, 인간의 인식으로는 이해 불가능한 사건들의 대구로 설명했습니다. 시간을 ‘질적 변화로’ 분별했던 것입니다. ‘때’와 관련된 삶의 변화는 곧 신의 적극적인 의지가 반영된 결과라고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처럼 대림절의 개념을 구성하는 대시절의 의미는 문학의 눈을 통해 사건의 시간을 주시합니다. 문학을 통해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거대한 변화는 물론이고 미미한 변화를 관찰하는 눈이 어제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질문도 세밀해지고, 때로는 집요해집니다. 아예 거칠어질 수도 있습니다. 질문이 그렇게 되면, 그 응답을 찾으려는 분투 또한 더욱 치밀해집니다.
앞서 말한 대로, 대시절에 시계와 달력으로 쪼개지는 시간, 스케줄러에 기록된 시간, 마감과 회의와 모임으로 채워지는 시간은 더는 주된 관심이 아닙니다. 오히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은데 문득 가슴이 먹먹해지는 저녁, 지극히 사소한 장면이 이상할 만큼 선명하게 남는 하루,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얼굴이 불쑥 떠올라 마음을 붙잡는 새벽과 긴밀합니다. 대시는 이런 사건들을 자기화하는 순간입니다. 또한, 자신의 힘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웠던 상황에서 자기 힘을 능가하는 누군가의 도움으로 극복했던 순간도 아우릅니다.
대시절과 메시아의 사건
이런 의미에서 대시절은 벤야민이 말한 메시아적 시간과 직접 관련 있습니다.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직선으로만 이어지지 않고,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상호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역사를 앞으로 나아가는 진보만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어제, 오늘, 다가올 미래가 어우러진, 영원토록 동일한 신의 개입’을 주시합니다. 그 개입의 찰나를 놓치지 않습니다. 광야의 목자들처럼 하늘의 별이 반짝이는 순간을 포착합니다. 카이로스를 잡아챕니다. 세계의 틈새로 순식간에 뚫고 들어오는 하늘의 시간을 지나치지 않습니다.
대시절은 밤이 끝나고 아침이 오는 경계의 순간을 감찰하여, 달려가 선포하는 순찰자의 태도를 일깨웁니다. 결국, 대시절은 흐르는 시간이 어느 순간 깊어지며 ‘응축되는’ 지점에 좌표를 찍는 일입니다. 우리의 지나온 시간과 다가올 시간에 겹쳐지게 하여 새로운 사건으로 전진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오늘날 시인은 한 줄의 시로 카이로스를 포착합니다. 어떤 시대의 사건을 한 단어에 응축합니다. 소설가는 다양한 인물을 창출하며 사람과 사람, 사람과 세계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삶의 무한한 변주를 상상해 냅니다. 이를 통해 한 사회의 구조와 모순, 긍정의 역사를 서사로 드러냅니다. 이처럼 대시절은 문학이 대림절의 언어가 되는 계절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절기에 성경 본문을 읽는 것과 함께, 당대와 옛 시대의 시와 소설을 함께 읽는 일은 결코 가볍게 여길 수 없습니다. 문학은 자주 “하늘의 언어가 어떤 꼴로 이 땅의 사건으로 변화하는지”를 가장 치밀하고 섬세하게 보여 주는 증언이기 때문입니다.
알다시피, 문학이 대상으로 삼는 삶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다양합니다. 인간에게 보이는 세계는 물론이고 보이지 않는 세계까지 아우릅니다. 어느 시골 버스 정류장에서 새벽 첫차를 기다리며 척박한 휴게소대기석에서 컵라면을 먹는 청년들, 전세 대출이 막혀 끝내 도시의 끝으로 밀려나는 가족들, 전쟁 뉴스의 작은 사진 한 장 앞에서 더는 카메라를 움직일 수 없는 어느 기자의 인지부조화의 마음, 상상과 판타지가 아니면 인간의 고루한 현실을 벗어날 수 없어 좌절하는 나약한 사람들의 기막힌 장면들을 문학의 언어로 현실화해 줍니다.
대시절과 문학과 시간-신이 허락한 인간의 삶을 관조하는 절기
문학 안에서 이들의 서술은 그저 “현실의 일부”를 묘사하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응당 “해석되어야 할 사건, 누군가는 응답해야 할 삶”으로 재해석됩니다. 그러므로 대시절의 사회적 영성이 문학으로 구현된다는 것은 하늘의 사건이 시와 서사로 기록되어 이 세계 안에 스며들었다는 것을 방증합니다. 이들은 모두 대시의 관점을 문학으로 구현해 내는 사회적, 철학적 소재입니다. 달력의 시간으로는 포착되지 않는 카이로스의 장면들입니다.
결국, 대시절(待視/時節)은 변화가 충만해졌다는 것을 눈으로 목격하는 시간입니다. 기다림은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한 순간에 겹쳐지는 사건과 긴밀합니다. 대림절에 인간의 몸을 입고 현현한 온 우주의 창조자가 ‘지금-여기’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두 눈으로 주시하는 것입니다. 이 사건의 도래는 나의 의지로는 불가능합니다. 내가 무엇을 일으키는 것 같지만, 정작 아무것도 ‘내가 정한 시간’에 구속되지 않습니다. 대시절은 이 사건이 전적으로 하늘에 속한 ‘영원’의 범주라는 것을 경험하여 서술하는 문학의 계절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 절기에 영원의 어딘가에 신의 틈입으로 일어나는 미세한 변화, 미분’과 ‘적분’의 순간들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나와 너, 우리의 숨을 고르는 일만 필요합니다. 이처럼 대강절이 신학을, 대탐절이 철학을 함의한다면, 대시절은 문학의 의미가 농축된 절기입니다. 시와 소설, 삶의 관조하는 에세이 같은 문학이 특별한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