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의 대림절을 위하여-
“이 글은 기독교의 성탄절을 기다리는 4주간, 대림절에 대한 사회인문학적 묵상 중 하나입니다. 나는 이 절기를 야훼의 침잠하는 마음으로 몸을 기울여 시대에 공감하고 응답하는 의식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이번에는 이 침잠과 공감의 대림절을 나는 한 편의 영화 〈동주〉에서 시작해 보려 합니다."
1. 윤동주와 송몽규: 침잠과 융기의 이중주와 공감의 모티브
영화 <동주>(2015, 이준익 감독)에는 자기 혁명 속으로 가라앉는 동주와 혁명의 세계로 뛰쳐나가 파고드는 몽규가 위태롭게 교차합니다. 표면을 주도하는 서사는 몽규의 몫 같지만, 영화의 내면을 이끄는 힘은 위기의 순간을 안전하게 매듭짓는 동주의 자기 성찰에 있는 것 같습니다. 달리 보면, 몽규가 몸과 행동으로 밀려오는 삶에 도전했다면, 동주는 불안한 내면을 붙잡고 끌어낸 성찰을 시로써 드러내며 그 위기를 보듬습니다. 특히 윤동주의 시는 마치 홀로 밥을 먹는 사람처럼 ‘혼글’ 같습니다. 군중이나 무리의 환호로부터 스스로 비켜나 자신에게 말하고 자기 스스로 답합니다. 홀로 부딪치고 버텨내는 고독한 사람의 글입니다.
2. 영화에서 <서시>의 배치: 생의 처음부터 죽음까지 실현한 최후고백
이 영화의 매력은 동주의 시를 배열한 편집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의 시를, 연대기적 순서보다 그가 직면한 삶의 맥락을 뒤따라가는 탐험가의 시선으로 배치했습니다. 무엇보다 <서시>를 맨 마지막에 두었습니다. 이는 아마도 동주가 죽음의 순간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실현했다는 최후고백으로 이 시를 고백했으리라 판단한 편집자의 의도를 적극적으로 반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동주는 암울한 자기 삶의 자리에서 처음부터 끝자락까지 이 자기 고백을 한순간도 방치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관점은 꽤 적확합니다. 어쨌든 영화는 이런 동주의 삶에 몸을 기울여 조용히 공감해 준 흔적이 역력합니다. ‘동주는 마지막 순간까지 죽어가는 자기 삶에 대해 순결하리만치 거룩한 집착을 간직하고 있었다’라는 해석을 곁들여서 말입니다. 이 영화는 해석적 공감에 집중한 ‘영화적 작품해설과 작가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흑백 속 붉은 불꽃과 침잠의 흔적
한편, 이 영화의 색조는 전체적으로 흑백입니다. 만약 누군가 이 영화에서 한 부분에 유채색을 입힐 기회를 준다면, 나는 동주가 자기 시집 제목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고 말해 주는 대목을 고르겠습니다. 그 장면은, 손은 떨리면서도 마치 떨어지면 깨질 그릇을 다루듯이 조심스럽게 자기 시집을 넘겨주는 대목입니다. 나는 이 흑백그림에 붉은색을 칠하고 싶습니다. 윤동주가 최초에 쓴 시 ‘'초 한 대’에서 피어오르는 불꽃처럼, ‘제물의 위대한 향내를 맛보’게 하는 색을 남겨두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 시로부터 그가 시대의 언어에 공감하고 그 내면으로 자기 몸을 기울이는 행보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4. 다른 삶, 그러나 하나의 길:인간에 대한 공감
생각해 보면, 젊은 동주와 몽규의 삶은 처음부터 다른 길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방향이 다르다고 길이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두 사람의 삶의 방식은 시간이 흐르며 생긴 자연스러운 융기와 침잠이었습니다. 동주가 자기 삶의 아래로 깊이, 깊이 맴돌며 춤추듯 내려가는 삶을 살았다면, 그의 시는 그런 안으로 파고드는 격동의 흔적, ‘혼글’입니다. 반면에 몽규가 시대를 향한 절규를 감추지 않고 높이 튀어 오르듯 융기한 삶을 살았다면, 그의 산문은 세계를 향해 투신하는 분노의 자기 번뇌입니다.
흑백으로 채색된 그들의 삶을 보고 있으면 점차 그들은 결국 하나였고, 하나의 길을 붉게 물들였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스며듭니다. 동주의 자기를 격동하는 ‘침잠’과 몽규의 대중을 소요하는 ‘융기’는 핍절한 삶을 살아내는 그 시대의 고통에 응답하며 누군가의 정서에 대한 깊은 공감을 실현하려는 붉은 문학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5. 야훼의 정서: 침묵 속의 절제와 공감의 기다림 “생각하셨다”
영화가 끝났습니다. 영화 <동주>는 윤동주 시인의 자기 내면 성찰로의 침잠과 송몽규의 세계 혁명으로의 융기가 선명합니다. 나는 이 두 개의 축을 성서 속 ‘야훼의 정서와 침묵’으로 연결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나의 새로운 영화가 이어집니다. 나는 눈 내리던 어느 해 출애굽기 2장에 기록된 글을 읽던 순간을 떠올립니다. 그 글은 어둠 가득한 시대에 ‘슬픈 말(語)을 춤으로 보여주며 인간의 삶에 공감하는 야훼의 정서’가 가득했습니다. 특히 아래 대목에서 그 감성은 정점에 도달합니다.
세월이 많이 흘러서, 이집트의 왕이 죽었다. 이스라엘 자손이 고된 일 때문에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고된 일 때문에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이르렀다. 하나님이 그들의 탄식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우신 언약을 기억하시고, 이스라엘 자손의 종살이를 보시고, 그들의 처지를 생각하셨다. (출 2:23-25)
이 대목에서 눈에 띄는 야훼의 감성은 ‘생각하셨다’는 말일 듯합니다. 이 대목에서 가장 큰 반전입니다. 야훼가 인간의 소리, 처지를 ‘고민하듯 되새기고 있’는 모습이 연상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야훼는 처음부터 인간의 온갖 신음과 탄원을 듣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 탄식이 깊어지는 순간에도 인간의 모든 말에 대해 어떤 정서적 반응을 곧바로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깊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어쩌면 그의 침묵을 무능력이나 무관심으로 오해한 이들도 있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사유의 행동은 자발적 자기 억제일지 모릅니다. 힘이 있어도 힘을 쓰고 싶지 않은 정서의 절제입니다. 그 절제는 야훼가 신의 권위로 인간의 삶에 함부로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공감을 은근히 기다리며 인간의 삶에 참여할 방식을 찾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는 자신의 의지를 강권하기보다, 먼저 자신의 감정부터 드러냅니다.
이런 행동은 인간도 야훼의 마음을 알아주기를 기다리시는 것 같습니다. 야훼의 '생각하는' 시간‘은 인간이 자기 손을 내밀어 야훼의 손을 붙잡아 주기를 기다리는 ‘사이’일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대림절은 먼 옛날 출애굽의 시대로 돌아가 그의 말에 담긴 감정에 몸을 기울여 공감해 보는 절기라 할 수 있습니다.
6. 대림절: 야훼의 정서에 몸을 기울이는 절기
대림절에 주목할 야훼의 또 다른 행동은 ‘내려옴’입니다. 이 행동은 야훼의 침묵에 대해 스스로 옳고 그름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의 마음과 그 속 깊은 감정이 무엇인지를 우리 언어로 되새겨 두게 하는 야훼의 조치입니다.
앞서 본 출애굽기 2장에 이어 3장 7절과 8절에 따르면, 이날의 상황에 대해 하나님 자신이 모세에게 한 가지 구체적인 행동을 덧붙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탄식하는 소리를 듣고 야훼가 ‘내려가겠다(3:8)’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삶에 직접 내려오겠다는 의지를 담았습니다. 생각해 보면, 이 광경이 오늘 우리가 기다리는 성탄절을 가장 잘 설명하는 원인론적 설명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야훼는 단순히 감정의 공유로만 상황에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아예 자기 몸을 하강해서 땅에 내려왔습니다. 이런 하강 현현은 다른 면에서 그의 말(語)과 직결된 것 같습니다. 야훼는 모세에게 자기 말을 부탁합니다. 이 말을 보내는 것이 곧 그가 이 세계에 내려왔다는 것을 함의합니다. 하지만 사람은 신에 대해서만큼은 그 하강을 직접 보고 싶어합니다. ‘그의 말’, 그 속에 ‘감정’을 주목하지 않습니다. 느닷없이 또는 당당하게 말이 눈 앞에서 펼쳐지는 상황에서도 ‘당신이 지금 어디 있는지?’를 캐묻습니다. 빨리 자신의 말에 직접 나타나 응답해주라고 윽박지르기도 합니다. 야훼의 정서는 어느 때도 존중받지 못했습니다. 그런 모습은 곳곳에서 비일비재합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온 우주의 통치자 야훼는 인간의 슬픔 가득한 말을 어떻게든 들어주려 애씁니다. 동시에 자신도 우리를 향해 숱한 마음의 감정을 그대로 담아 질문하듯 쏟아내기도 합니다. 슬픔을 기분 좋은 응답으로, 기쁨을 분노와 저주의 흔적으로 억지로 되돌릴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대림절은 이 출애굽기 2장과 3장의 임재 사건에서부터 추억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야훼가 생각하시고, 이스라엘에 직접 내려오셨다고 말하는 대목입니다. 이를 토대로 본다면, 오늘 우리도 야훼에 대해 어떤 새로운 기대를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야훼는 자기 몸을 자기 말에 담아 오늘도 자신의 정서를 고스란히 인간에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 한 예가 있습니다.
7. 이집트 왕의 죽음과 야훼의 응답 사이의 역설
대림절에 주목할 야훼의 현현의 의의는 바로 ‘시간/때’입니다. 야훼가 언제 우리 삶에 자기 몸으로 개입했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에 대한 기록을 떠올려보면, 출애굽기 2장의 짧은 한 구절에 잠시 멈춰 서게 됩니다. “여러 해 후에 이집트 왕이 죽었고(2:23).”입니다.
출애굽기 기자는 이 한 문장으로, 이스라엘에 악명이 높았던 이집트 왕의 시대가 끝났음을 알립니다. 그런데 일반적인 현상이라면 여기서 모든 고통의 시대가 함께 막을 내려야 합니다. 억압의 주체가 소멸한 것과 함께 고통도 함께 사라졌다고 말하는 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기대하는 바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 기대를 뒤엎습니다. 왕의 죽음을 알린 직후 곧바로 “이스라엘 자손이 고된 노동으로 탄식하매 부르짖으니”라는 구절을 이어 붙였습니다. 시대를 통치하던 왕은 사라졌지만, 그가 의존하던 구조와 습속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고통의 원인이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순간에, 오히려 고통의 목소리가 가장 크게 울리는 모순이 이어집니다. 권력자의 죽음과 고통의 종식이 단순히 일치하지 않는다는 시대의 상식을 야훼와 그의 기록자들은 간파하고 있었습니다. 불편한 역설입니다.
8. 고통의 근원과 야훼의 응답 방식: 침묵 속에서 준비되는 시간
그렇다면 왜 야훼는 그들을 괴롭힌 왕이 살아 있을 때는 침묵하셨을까요? 조금 달리 생각해 보면, 이집트 왕의 실 권력이 살아 있을 때 왜 야훼는 그를 대적하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왜 그가 죽은 뒤에야 야훼는 이스라엘의 탄원에 자기 몸을 기울였을까요? 어떤 답도 분명하지 않지만, 한 가지 고민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이집트 왕이 이스라엘이 겪는 고통의 근원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분명 이스라엘을 압박하고 통제하는 무력이 응축된 얼굴이었지만, 이스라엘의 고통이 그것으로부터만 발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 단락에서 주목할 것은 고통은 끝없이 시대를 이어 진화하고 증폭해 나간다는 사실입니다. 고통이 사라지지 않는 세계입니다. 돌이켜보면, 한 왕의 자연사는 그들이 꿈꾸던 '새로운 시대'의 신호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왕이 물러난 뒤에도 이스라엘의 신음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기대하던 ‘행복한 종말’은 드러나지 않았고, 오히려 새로운 고통이 다른 얼굴과 이름을 바꾸며 삶의 자리를 훼방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나는 두 가지를 생각합니다. 첫째, 폭력은 스스로 소멸한다는 점입니다. 무력을 행사하던 이집트 왕은 결국 시간 속에서 자연스럽게 퇴장했습니다. 이 일은 너무도 당연하지만 자주 잊히는 사실입니다. 둘째, 야훼의 응답은 자신의 때를 따라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어떤 권력의 교체가 야훼의 개입과 정확히 같은 리듬으로 움직이지 않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인간의 시간표로 보자면 야훼는 스스로 오래 침묵하고, 스스로 행동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스라엘의 탄식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야훼는 그 소리에 마음을 기울이려고 ‘의도’했음이 분명합니다. 야훼의 ‘자유’입니다.
기다림은 바로 이 틈에서 발생합니다. 자기 탄원에만 익숙했던 인간이, 이제는 자기 목소리 너머에서 울리는 야훼의 탄식이 언제 일어날지 모르기에, 몸을 기울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언젠가 그와 함께 추게 될 춤을 미리 연습하듯, 그의 응답이 도래할 자리를 삶 속에서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 춤은 야훼가 보여준 세계에 대한 공감과 정의의 리듬에 내 몸을 맞추려는 것입니다. 야훼의 침묵은 통치의 부재가 아니라, 어느 날 생의 리듬을 따라 우리와 보폭을 맞추기 위해 자유롭게, ‘의도적으로 지연된 배려’ 일지도 모릅니다.
이런 야훼의 행보가 실제로 인간의 몸으로 드러난 사건이 바로 대림절입니다. 중요한 점은 이 일련의 역사적 흐름은 신앙의 대상에만 그치지 않고 사유와 철학의 대상이라는 점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하강과 현현은 1세기 예수에게서 그대로 재현되었습니다. 그의 출현은 슬픈 세상의 위로를 넘어 이 왜곡된 질서, 인간의 슬픔을 끝없이 조장하는 폭력의 근원을 해체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단지 어느 왕의 서거와 깊이 관련되지 않는 일입니다. 대림절은 예수 혁명의 승리가 가져올 현미적(現未的) 의의를 되새기는 종말론적 전승절에 가깝습니다.
9. 폭력의 터전 위에서도 침잠하는 예수 혁명
대림절에 나는 조용한, 그러나 변혁가 예수를 생각합니다. 이 세계가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 숱한 아픔은 폭력적 왕의 존재와 몰락이 그 궁극적 원인은 아닙니다. 그가 사라지면 행복한 삶이 찾아오는 근거가 된다고도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중요한 것을 기억합니다. ‘폭력과 부정’이 지속하는 이 땅에서 야훼도 쉬지 않고 응답한다는 사실입니다. 혁명은 전복이 아니라 끝까지 인내하며 자기 성찰의 삶을 고수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나아가 야훼와 이 땅의 사람들과 공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를 기다려야 합니다. 세계 변혁을 위해 강림할 그를 찾아야 합니다. 이유는 하나입니다. 나도 그의 방식으로 이 세계에 공감하기 위함입니다.
대림절은 기독교인만의 절기는 아닙니다. 이 세계에서 ‘고통’을 조장하는 사람들 아래서 자기 생을 지켜내야 하는 고단한 생존자들 누구에게나 절실한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절기를 보내는 동안, 복음서의 이야기를 다시 들어볼 필요도 있습니다. 그 정황을 보면 출애굽기의 야훼처럼 여전히 고통 속에서 평화의 왕, 정의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는 거대한 힘을 가진 왕이 아닙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여전히 태어나면 손이 많이 가야 하는 그런 어린 아기에 불과합니다. 그 아기 예수는 헤롯의 통치 아래 임재 했고, 헤롯의 눈을 피해야만 하는 상황 속에 현현했습니다. 야훼가 택한 방식은 느릿한 변혁입니다. 아기 예수를 통해 차근차근히, 질서를 따라, 그러나 그 질서에 함몰되지 않고, 단계를 오르면서, 모든 것을 총체적으로 조명하는 삶의 정황을 따라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이 변혁의 가시적인 한 현상이 바로 주변화가 상쇄된 사회적 공감력입니다.
10. 진리에 순종하는 침잠: 동주와 아기 예수의 연관성
올해, 대림절이 다시 돌아왔습니다. 삶의 터전은 여전히 흔들리고, 시야는 더 답답해졌습니다. ‘법(法)’은 물처럼 흘러가지 못하고, 자기 영역에 갇혀 맴돌고 있습니다. 곳곳에 여울목만 튕겨 오르고 있습니다. 세계를 관찰하는 시각은 점점 무뎌지는 듯합니다. 평소대로 예수는 올해도 결코 융기하거나 힘을 도모하지 않을 기세입니다. 그의 혁명은 여전히 땅바닥으로부터 서서히 더 아래로 침잠해갈 모양입니다. 속절없이 나는 이 가라앉음의 끝이 언제쯤 도래할 것인지 여전히 되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물으면 물을수록, 돌아오는 답은 한결같습니다: “Obedire veritati!(진리에 순종하라!)”
돌이켜보면, 대림절에 혁명가 몽규를 넘어 시인 동주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자기 삶의 아래로 깊이 침잠했던 윤동주의 고독한 몸짓과 혁명으로 솟구치던 몽규의 치열한 운동은 인간의 공감을 기다리며 한편으로는 침묵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융기하는 야훼의 정서를 보듯 합니다. 이들은 야훼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응답한 그들의 공감을 문학화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요컨대, 몽규의 혁명과 동주의 성찰은 대림절에 우리 몸이 어디로 기울어져야 하는지를 새삼 일깨웁니다. 그것은 타인을 전복시키는 힘, 높이 오르려는 등정가의 세계가 아니라 자기 삶을 스스로 도려내는 아픔의 자리입니다. 세계의 슬픔은 절대 사라지지 않습니다. 슬픔의 원인은 욕망이기 때문입니다. 이 슬픔에 만들어내는 아픔은 사람마다 다르지만, 야훼는 어느 아픔도 공감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결국, 대림절은, 우리 몸이 어디로 기울어질지를 다시 묻는 절기입니다. 해체될 교회가 아니라, 고통의 현장으로, 야훼의 정서와 아기 예수의 침잠이 머무는 자리로, 우리의 몸과 시선을 기울이는 시간입니다. 그 자리에서 야훼의 공감 정서에 공명하며, 아기 예수의 마구간이 있는 곳을 찾아가야 합니다. 비틀거리더라도 도도하게 흘러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