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관절의 의미-대행하는 사람
대관절은 대신(代) 바라보는(觀) 절기(節)라는 의미입니다. 국어에서 “대관절”은 “대체, 요점만 말하자면”이라는 뜻을 가진 부사입니다. 복잡한 이야기를 정리할 때 무심코 입 밖으로 나오는 그 한마디입니다. 대관절에 해당하는 우리 옛말 ‘도대체’ 역시, 결국 ‘요점만 말하자면’이라는 뉘앙스를 지니고 있습니다. ‘결국, 그리하여’와도 연관됩니다.
그렇다면 대림절의 네 번째 개념인 ‘대관절’은 앞서 다뤘던 세 개의 개념이 도대체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우리는 왜 기다리며, 무엇을 찾으며, 어디를 바라보는지를 토대로 결국, 어떤 결론에 이르려는 것인지를 되짚는 것입니다. 이른바 사유가 꺾이는 관절과 같은 결절점이 되는 셈입니다.
대관절의 질문
그 마지막 결절점은 분명합니다. 이 대림절은 우리가 바로 성육신한 야훼를 대신하여 그의 세계관을 실행하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제자도입니다. 요점만 말하자면, 대관절은 곧 “하나님의 시선을 이 땅에서 대신 따라보는 제자들의 절기”입니다. 이 의미는 야훼가 실현하듯 삶의 경계를 허물어 다시 짓는 것처럼 그 일을 자기 세계관으로 받아들여 재현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결국, 제자도라는 관점에서 이 말속에는 다음과 같은 질문이 들어 있습니다.
“대관절, 우리가 기다린다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대관절, 신의 하향과 탐구와 관조가 나의 삶과 사회에 무엇을 바꾸어 놓는가?”
“대관절, 지금-여기의 교회와 공동체, 나라는 개인은 어떻게 이 시간을 살 것인가?”
그뿐만이 아닙니다.
“도대체, 그 모든 신학·철학·문학이, 대관절, 지금 우리의 삶과 사회에 어떤 요구를 하는가?”
“대관절, 우리는 이 시간에 무엇을 외면하고 있는가?” 같은 것입니다.
이 질문들은 모두, 대림절의 네 번째 이름, 대관절에 담긴 우리를 향한 물음들입니다.
신의 의지를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
그런데, 이 질문들을 되새겨보면, ‘대관절’의 의미는 단지 절망의 탄식이 아니라 오히려 각성하는 영성으로 안내하는 호소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올바르게 ‘기다리고’ 있는지를 적극적으로 성찰하게 합니다. 기다림을 시간의 문제로 국한하지 않고, 신의 의지를 행동으로 적극적으로 구현하려는 제자의 선언으로 받아들이게 합니다. 그리하여 이러한 질문을 통해 내가 야훼의 의지를 뒤따라가며 나 자신과, 이 시대의 교회와, 사회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삶 속에서 신의 손길이 선명하게 느껴지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이처럼 대관절에 이르면, 기다림은 더는 “무엇을 기다리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어디에서 누구를 따라 그의 의지를 대행할 것인가”의 문제가 됩니다. 성경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하나님의 시선은 언제나 비슷한 곳으로 향합니다. 저는 세 가지 용어를 떠올립니다. 체데크(정의), 미슈파트(공의), 그리고 헤세드(친절과 환대)입니다. 하나님의 몸은 억울하게 목소리를 잃은 자, 가난하여 이름이 사라진 자, 전쟁과 폭력 속에서 삶의 터전을 빼앗긴 자, 함부로 대상화되고 소비되는 몸들 사이에 있습니다.
성서의 언어로 말하면 야훼가 머무는 자리에는 언제나 정의, 공의, 헤세드가 살아있습니다. 정의는 보이지 않던 이들을 배제하지 않고 다시 보이게 하는 시선입니다. 공의는 어긋난 균형을 바로잡는 질서의 감각입니다. 법 아래서도 차별받는 인간의 경계를 지우려는 공적 질서입니다. 헤세드는 배제를 배제하고 환대를 차별하지 않는 친절입니다. 누구도 주변화하지 않고 한 터울 안에 머물게 하려는 끈질긴 사랑과 신실함입니다.
대관절은 이런 야훼의 삶의 방식을 그저 ‘옳다고 믿는 사람’을 넘어서려는 사람의 절기입니다. 더 세밀하게 감응하고 자기 삶을 수행하는 생활방식을 가진 사람들의 계절입니다. 다시 말해, 대관절의 사람은 ‘경계를 해체하는 사람’입니다. 중심과 주변, 안과 밖, 우리와 그들, 이미와 아직, 성스러움과 속됨의 경계선에 서서 양쪽을 동시에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나아가 ‘양쪽을 동시에 보는 사람’을 넘어, ‘안과 밖, 좌우, 중심과 주변, 우리와 그들, 이미와 아직, 성과 속을 가르는 경계를 허물어 해체하는 사람’입니다.
대행의 개념-굳은 삶의 해체
이 해체는 단순한 파괴가 아니라, 기존의 구조를 분해하고 다시 구성하는 재구축을 함께 함의합니다. 교회 안에서만 모색한 ‘사랑’을 거리와 골목과 회사와 가정이라는 삶의 현장에서도 동일하게 드러냅니다. 이 땅에서 하늘의 하나님의 시선을 대신 살아내는 사람입니다. 경계에 선다는 것은 모호함 속에 머무는 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가장 예민하게 “어디가 어긋나 있는지”를 감지하며 같은 거리를 유지하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대관절의 사람은 자신의 안락함과 안전을 조금씩 경계 바깥으로 밀어냅니다. 정의·공의·헤세드의 시선을 조금이라도 더 멀리, 더 낮게, 더 깊게 보내려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대관절은 하향성의 신학과, 탐구의 철학과, 사건서술의 문학이 한 사람의 삶의 형식으로 총화 된 삶의 방식입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이 내려와 머물러 있는 곳을 찾아가 보고 그 일을 대신해내는 사람의 프락시스입니다. 덧붙이자면, 대관절의 사람은 더는 힘의 중심으로만 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변을 바라봅니다. 높은 곳이 아니라 낮은 곳에서 자신을 조망합니다. 정의가 무너진 자리, 공의가 어긋난 틈, 헤세드가 다시 이어져야 할 관계의 골짜기를 찾아가 야훼의 행동을 자기 몸으로 실현해 냅니다.
대관절, 교회해체라는 하향성을 살아내는 사람
이처럼 대관절의 개념에서 대림절은 더는 ‘기다림’만으로 끝나는 절기가 아닙니다. 기다림은 대신 살아가는 실천입니다. 그 대행자의 삶으로 구현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앞서 본 대로, 대강, 대탐, 대시 세 개념이 모두 ‘기다릴 待’였다면 이 마지막 개념은 필연적으로 “대신할 代‘일 수밖에 없습니다. 기다림은 어느 순간 그의 시선을 따르는 세계관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시선은 내가 보고 싶은 것을 보는 능동이 그의 시선에 '붙잡힌 바‘ 되는 피동적 시선입니다. 벗어나는 자유가 아니라 스스로 갇히는 자유를 의미합니다.
정리하면 대관절(代觀節)은 기다림을 넘어서, 대신 보고 뒤따르는 자의 절기를 의미합니다. 대관절은 기다림의 완성이 시간에 있지 않고, 변화를 몸으로 살아내는 사람의 절기라는 것을 함의합니다. 경계에 선 사람, 문턱에 선 사람, 이미와 아직 사이를 살아가는 사람으로 부름 받았다는 자기 정체성으로 삶 자체가 변화된 제자입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인간 먼지 속에 스스로 파묻힌 야훼의 시선이 내 시선을 대신 채우는 계절—그것이 바로 대관절의 개념입니다. 한 알의 씨앗처럼 죽음으로 사라질 자기 운명을 알고도 기꺼이 자기 삶을 내던진
야훼를 뒤따라가는 진리의 수행자,
호모 아겐스(homo agens), 행동하는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