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절 단상(10),
대림절의 사회적 영성

하향의 신학, 탐구의 철학, 관찰의 문학, 실천의 제자도

by 푸른킴


대림절의 사회적 영성-검은 안식의 철학

대림절은 단순히 기다리기만 하는 절기는 아닙니다. 이 절기를 네 개의 개념(대강, 대탐, 대시, 대관)으로 다시 바라보면, 하나의 흐름이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대림절은 ‘하향성’의 의 신학, 신이 나의 눈앞으로 내려오는 시간입니다. 또한 하나님에 대한 추상적 ‘말’이 어디에서 실현되는지 찾아 나서는 절기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이 바라보시는 세계를 다시 나의 눈으로 보게 되는 시간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시선으로 세계를 처음부터 다시 배우며 직접 실행에 옮기는 순례자, 제자도의 계절’입니다.


여기서 나는 나의 ‘검은 안식의 철학’을 다시 떠올립니다. 신학은 곧장 밝은 해답으로 우리를 끌고 가지 않습니다. 그전에, 먼저 어두운 방에 함께 앉아 살아가는 길을 보여줍니다. 아직 풀리지 않은 질문, 설명되지 않는 고통, 이름 붙일 수 없는 상실의 밤. 그 밤을 건너뛰지 않고, 검은 안식처럼 조용히 머물러 주는 신학입니다.

‘검은 안식’의 관점에서, 대강절은 하나님이 내려오신 곳이 바로 그 어두운 안식의 자리이며, 거기에 하나님의 시선이 머물러 있다는 사실을 천천히 더듬어 보는 시간이라는 데 있습니다.



대탐절은 대탐의 철학이 골목으로 내려오는 시간입니다. 고상한 개념과 이론이 아니라, 현실의 구조와 관계를 낱낱이 다시 묻고 해석하는 시간, 곧 ‘골목과 일상의 언어로 철학을 다시 쓰는 계절’입니다. 그 현장에 코헬렛의 “헤벨(hebel)”이 자리합니다. 헤벨은 단순한 허무나 무의미가 아닙니다. 불확정한 세계에서 이해 불가능하게 작동하는 어떤 질서, 다시 말해 카오스와 코스모스가 겹쳐진 ‘카오스모스(chaosmos)’라는 이중 구조를 가리키는 철학적 개념에 가깝습니다. 눈앞의 현실은 무질서하고 뒤엉켜 보이지만, 그 안에서 어떤 질서가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감지하게 만드는 세계. 예측할 수 없지만, 전혀 의미 없다고 말할 수 없는 질서의 세계입니다. 나는 이 카오스모스적 세계 구조를 지시하는 이름으로 헤벨을 이해합니다.


이처럼 대탐의 철학은 이 카오스모스를 외면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헛되다’라는 냉소로 주저앉는 것도 아니고, 아무 일 없다는 듯 덮어버리는 것도 아닙니다. 전통적 지혜를 유지하면서도, 그 경계를 비판적으로 밀어붙이며 저항의 언어를 끄집어내는 작업입니다. 따라서 대탐절은 질서이면서 동시에 무질서인 이 헤벨의 세계, 불확정성과 이해 불가한 질서가 겹쳐 있는 이 양자적(이중적) 현실을 정면으로 마주 보면서, 우리가 어떻게 책임을 질 것인지, 어디서부터 다시 질문을 시작할 것인지를 묻는 계절입니다. 이처럼 양자론적 이중성을 빌려 표현하자면, 결국, 나에게 대탐절은, 헤벨의 카오스모스를 통과한 사유가 골목으로 스며들어, 구체적인 삶과 사건들 앞에 서서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묻는 계절입니다. 결실은 아직 알 수 없습니다.



한편, 대시절은 대시의 문학이 시간을 증언하는 시간입니다. 한 사람의 생애, 한 장면의 무게 속에서 이 시대의 빛과 어둠이 응축되어 드러난 시간, 곧 ‘카이로스가 일어나는 시간을 이야기로 기록하는 절기’입니다.


앞서 본 대로, 헤벨의 시간은 금세 사라지는 순간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사라지는 것이라 해서 기록할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코헬렛은, 불확정한 세계 속에서 이해할 수 없는 질서를 더듬어 가듯, ‘먹고 마시고 수고하는 것’이라는 작은 기쁨을 붙들라고 말합니다. 카오스모스의 틈새에서 잠시 깜빡 켜졌다 꺼지는 조그만 등불 같은 기쁨. 나는 이 작은 기쁨을 ‘검은 안식의 한 조각’으로 이해하고 싶습니다.


푸코의 헤테로토피아는 이 대시(時間)의 절기에 우리가 머무는 시공간을 설명해 주는 개념일 것입니다. 이 시공간은 기존의 질서와 권력이 균열하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이 틈새의 시간을 기록하는 문학은, 단지 감성의 기록이 아니라 ‘신적 민주주의’가 어떤 모습으로 이 땅에 스며드는지에 대한 증언입니다. 낯설지만 동시에 새로운 세계, 기존의 질서와 다른 방식으로 시간이 겹쳐지는 자리입니다. 따라서 대시절은 문학의 절기입니다. 그 문학은 눈부신 승리의 서사가 아니라, 검은 안식 속에서 간신히 건져 올린 문장들, 겨울밤의 숨소리 같은 단상들입니다. 헤벨의 세계를 통과하면서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난제를 안고, 시편 23편처럼 ‘죽음의 계곡’을 지나가면서도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를 기억하는 문학, 자기 어둠의 기록을 멈추지 않는 문학, 그것이 이 대시절을 상징하는 문학입니다. 그 문학 기록은 ‘땅의 사람들(암-하아레츠)’의 호흡이며, 우리 시대가 향하고자 하는 신적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향한 증언이 됩니다.



끝으로 대관절은 하나님의 시선을 대행하는 세계관이자 삶의 방식입니다. 야훼의 사유를 실행에 옮기는 사람, 곧 제자의 존재론을 가리킵니다. 대관의 제자도가 실현되는 사건입니다. 그는 신학과 철학과 문학으로 깨어난 눈을 가지고, 하나님의 시선을 대신 살아내는 삶의 길로 한 걸음, 또 한 걸음 나아가는 존재입니다.

이 제자도 역시 ‘밝은 대낮의 결심’으로만 유지되지 않습니다. 길게 늘어진 겨울밤, 기도해도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구조, 아무리 발버둥 쳐도 허공을 치는 것 같은 사회적 모순들. 코헬렛이 ‘바람을 잡으려는 수고’라고 표현했던 바로 그 자리에서 제자도는 유효합니다. 우리는 그 제자도를 포기할 수도 있고, 아니면 더 깊은 차원의 제자도로 나아갈 수도 있습니다. 날마다 선택의 순간이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대관의 제자도는, 카오스모스적 헤벨을 뚫고 승리의 개가를 증명하는 서사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헤벨을 끌어안고 끝내 포기하지 않는 나와 너, 나와 세계의 연대 서사입니다. 불확정한 세계에서 이해 불가한 질서의 어둠을 함께 견디며, 함께 조금 더 낮은 곳을 선택하는 느린 발걸음입니다.




이제 이런 흐름을 토대로 나는 대림절의 ‘사회적 영성’을 정리하려 합니다. 사회적 영성이란 대림절이 기도와 묵상, 예배와 찬양이 사적인 내면의 울타리에만 머물지 않고, 사회와 세계의 구조를 향한 질문과 책임, 연대와 선택의 문제와 서로 얽혀 들어가는 '관계적 영성'이라는 의미입니다.


대강의 신학이 무엇을 향해야 하는지 발의 행로를 일러 주고,

대탐의 철학이 무엇을 물어야 하는지 말의 질문을 세우게 하며,

대시의 문학이 무엇을 보아야 하는지 눈의 언어를 빚어내고,

대관의 제자도가 어디에서 살아야 하는지 삶의 질서를 결정합니다.


여기에 더해, 사회적 영성은 검은 안식의 철학을 통해 내가 어떤 속도로 걸어야 하는지, 얼마나 천천히 멈추어 서야 하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코헬렛의 헤벨, 곧 카오스모스적 세계에 대한 통찰은 무엇을 절대화하지 말아야 하는지, 어떤 힘을 내려놓아야 하는지를 일깨워 줍니다.


하여, 올해의 대림절을 이 네 개의 단어와 함께, 검은 안식과 카오스모스적 헤벨이라는 두 개의 키워드로 다시 부른다면, 나는 자연히 대림절의 핵심 질문인 ‘왜 인간이 되셨는가?’를 외면할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의 성육신은 더는 개인 구원과 내면의 평안만을 말하는 배타적이고 사적인 종교에 머물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강의 신학은 하나님의 오심이 세계 전체를 향한 사건임을 일깨우고,
대탐의 철학은 그 오심 앞에서 우리가 서 있는 자리의 구조적 죄와 불의를 통찰하게 하며,
대시의 문학은 그사이를 통과하는 구체적인 얼굴들과 사연들을 증언하게 하고,
대관의 제자도는 마침내 그 증언을 실천과 선택으로 감당하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검은 안식과 카오스모스적 헤벨은, 그 모든 길이 언제나 밝지만은 않을 것임을, 오히려 불확정성과 이해 불가한 질서가 공존하는 어두운 계절을 통과하는 신앙이야말로 더 현실적인 믿음임을 말해 줍니다.


요컨대, 검은 안식의 철학은 사유의 속도를 조절하면서 멈춤과 머무름의 신학적 자세를 일깨워줍니다. 그리하여 공존하는 세계와 느린 연대의 속도를 가르쳐준다면, 한편, 카오스모스적 헤벨은 우리의 세계관을 야훼의 것으로 전환해 줍니다. 그리하여 세계의 불확정성을 직시하도록 돋습니다. 나아가 야훼 외에는 어떤 것도 절대화하지 않으며, 무엇이든 일어날 수 있는 모순적 현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도록 안내합니다.


돌이켜보면, 최근. 쏟아부은 열정에 낙망할만한 결실을 받아 든 나의 지인이나, 국가적 소용돌이에서 온몸으로 위기에 대처하는 이들, 개인사를 사회적으로 매장당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어둠의 계곡을 벗어나지 못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들과 우리가 좌절보다는 희망을 갖는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대림절의 영성은 필연적으로 ‘사회관계적 신앙’으로 확장되는 사회적 영성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과 나만의 은밀한 위안으로 닫히지 않고, 이웃과 도시, 시대와 피조 세계와 맺고 있는 관계의 결을 따라, 신학·철학·문학·제자도, 그리고 검은 안식과 카오스모스적 헤벨의 통찰이 서로를 밀어 올리는 영성입니다.


정리하면, 나의 대림절은 다시 이렇게 쓸 수 있습니다.

대강의 눈으로 이 도시를 바라보며,
대탐의 질문으로 이 시대를 더듬고,
대시의 언어로 이 겨울의 장면들을 적어 두며,
대관의 발걸음으로 조금 더 낮은 곳을 향해 걸어가되,
그 모든 길 위에서 검은 안식의 속도로 잠시 멈추고,
카오스모스적 헤벨의 이중적 현실을 기억하는 절기이다.

결국, 기다림이 시선이 되고,

시선이 삶이 되는 계절.

불확정한 세계에서 이해 불가한 질서를 통과하면서,

나는 오늘도 다시 확신합니다.

"봄은 이미 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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