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카시 15. 상상 놀이터 시작노트

by 푸른킴

컵 바닥,

해저


글과 그림

아니아니

고기와

그의 친구들


하루종일

여기서


파랑

놀이터


배경

여행 가면 이유 없이 들르는 카페 베이커리가 있다. 근처에 바다가 있고, 오르기 좋은 낮은 언덕도 있다. 언덕에서 내려다보는 모래 해변이 일품이었다. 그런데 지난해 그 좋은 풍광을 떠나 도심으로 내려왔다 한다. 이번에는 주택가 한복판에 있는 그 카페를 찾았다. 낯선 길이었고, 익숙하지 않은 풍경이었다. 한 가지 더 특이한 것이 있었다. 예전에는 본 적 없던 ‘파랑’이라는 단어를 곳곳에 새겨 두었다. 파란색이 아니라 ‘파랑’이라는 글자를 새겨두었다. 그리고 그 옆에 고기 그림도 그려 넣었다. 커피잔, 마들렌을 담아주는 접시를 비우고 나니 그 글자와 그림이 드러났다. 그런데 시선이 자꾸 그 문장으로 갔다. “우리가 지나온 파랑에서” 이 문장을 읽는 순간, 사진에 담았다. 마치 내가 천천히 깊은 해저로 스며드는 것 같았다.


사진

사진은 단조롭다. 컵 바닥을 클로즈업한 정도다. 구도도 없고, 특정한 피사체가 두드러지지도 않는다. 그저 컵 바닥을 담았다. 노란색의 고기, 파란색 물방울, 검은색 글자, 해초, 오래된 실금 균열이 전부다. 고기 두 마리가 헤엄치는 듯한 모습이다. 그 위로 햇살이 스며들고 그림자가 가볍게 덮인다. 우연인 듯한 균열은 마치 해저의 물결 같다. 컵 바닥이 화면 중심에 있고 주변은 거의 비어 있다. 따라서 시선은 자연스럽게 그릇 바닥에 집중된다. 이 단순한 사진에 나는 이런 시어를 덧붙였다.


시어

사진이 단순하면 시어는 좀 더 정교해야 한다. 이를 위해 할 수 있는 한 세밀한 문학 기법이 필요하다. 나는 이 시어에 두 가지 기법을 사용했다. 하나는 부정에서 긍정으로 전환되는 반의적 수사법이다. 다른 하나는 명사로만 이루어진 문장(nominal sentence)이다. 특히 이것은 이미지를 극대화하는 데 효과적이다. 단어가 바닷속에서 둥둥 떠 있는 느낌이다.

컵 바닥,/해저: 음료를 다 먹고나니 바닥에 그려진 그림들이 드러난다. 해저를 연상시킨다. 해저는 바다의 가장 깊은 곳이다. 땅으로 치자면 바닥이다. 거기에도 어떤 생물이 살고 있겠지만, 누구도 맨몸, 맨눈으로는 접촉할 수도, 만날 수도 없다. 그저 나에게는 상상의 세계일 뿐이다. 그런데 거기에는 상상에서도 만날 수 없었던 ‘글과 그림’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글과 그림/아니아니/고기와/그의 친구들: ‘아니아니’는 이것을 부정하는 유아적 언어다. ‘아니’를 한 번이 아니라 두 번 붙여 쓴 것은 아이들의 어투를 떠올려 흉내 낸 것이다. 리듬을 살리고, 장난스러운 감정을 끄집어내고, 동심을 떠올린 것이다. 그런데 이런 부정은 그저 ‘아니다’가 아니다. 부정의 부정이 긍정이라는 것만도 아니다. 하나의 단어로 경첩 기능을 한다. 그리하여 그 자체가 새로운 긍정으로 전환하는 의지를 강하게 표현한다.


글과 그림은 아이들을 갑갑하게 하는 정해진 틀이다. 글은 배워야만 하고, 그림은 연습해야 만 숙련된다. 하지만, 상상 속 해저는 그런 딱딱한 이성적 공간이 아닐 것이다. 해초가 살갑게 흔들리고, 물고기가 어디로든 헤엄쳐나가는 자유의 쉼터일 것이다. ‘아니아니’는 그런 전환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이제 글자와 그림은 고기와 그의 친구들‘이다’. 고대 히브리어 문법에 따르면 명사로만 이루어진 문장은 하나가 주어이면 다른 하나는 서술어 역할을 한다. 이때 주로 사용되는 서술어는 ‘이다’이다. ‘되다’가 아니다. 나는 이 시어에서 ‘글과 그림은 고기와 그의 친구들이다.’로 연결했다. 눈에 보이는 것은 글과 그림이지만, 그것은 고기와 그림 친구들인 것이다.

하루 종일/여기서: 어린 시절 나는 집 밖에서 친구들과 하루 종일 노는 날이 많았다.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친구들과 노는 날은 시간이 사라졌다. 우리에게는 즐거움과 배고픔 그리고 놀이만 있었다. 그렇게 나와 친구들은 함께 그 자리에서 변화했고 자라왔다. 시간이란 인생을 흘러가는 힘으로만 입증되는 것이 아니었다. ‘삶을 변화시키는 힘’으로 더 분명하게 인식되었다. 하루 종일, 여기서 ‘고기와 그의 친구들’이 노는 장면을 떠올리다 보니 기분이 젊어졌다. 그때로부터 지금 나는 늙었지만, 여전히 ‘젊은’ 상태다. 늙음은 시간의 흐름이지만, 젊음은 시간의 흐름이 건드리지 못한다. 그것은 ‘삶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다 비운 커피와 베이커리 잔을 앞에 두고 ‘하루 종일/여기서’ 고기와 그의 친구들이 노는 해저 같은 아지트를 상상한다.


파랑/놀이터: 파랑은 그 카페 주인장이 내세우는 무엇, 어떤 ‘개념’ 같았다. 어디서도 ‘파랑’을 볼 수 없는데도, 그는 ‘파랑’이라는 글자를 써 두었다. ‘파랑’은 모순적이면서 양의적인 단어다. 사람들은 이 색을 보며 평온, 안정, 신뢰를 떠올리면서 동시에 우울, 슬픔도 함께 끌어온다. 바다를 보다 자기 생을 돌아보는 것과 같을 수도 있다. 컵에 새겨진 글을 보면, “우리가 지나온 파랑에서”이다. 그들이 지나온 세월이 ‘파랑’이라는 의미인 듯하다. 그곳이 바닷속 같았을까? 무엇이었든 나는 그 파랑과 놀이터를 한 문장에 두었다. ‘파랑은 놀이터다,’ 아니면 ‘놀이터는 파랑이다’가 모두 가능하다. 무엇이든 ‘파랑’은 그저 색이 아니라 삶의 터전이다. 그 터전은 일터이겠지만, 결국, 놀이터다. 일터가 놀이터이고 놀이터가 일터인 것은 상상만이 아니다. 이 작은 컵 바닥에는 그것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현실이라고 일러준다. 요컨대, 그 현실은 닫힌 문장이 아니라 열린 여백이며, 누구에게나 가능한 실제다.


의도

이 디카시는 사진보다 시어에 더 중점을 둔 경우다. 얼핏 보면 아무것도 아닌 풍경이지만 나에게 한순간 여러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시어에 쓰인 명사들은 하나의 논지를 지향한다. ‘보이지 않는 저 해저가 나의 현실 속 파랑 놀이터이다’라는 것이다. 이 카페는 예전에는 흰색 인테리어가 강했는데 이번에는 검은색이 압도적이다. 아예 카페 이름도 달라졌다. 파랑은 어디에도 두드러지지 않는다. 그런데도 커피잔에는 ‘파랑’이라 적었다. 주인장들의 사연이 있을지 모른다. 그걸 생각하다 보니 누구나 상상으로만 꿈꾸는 현실 같은 비현실을 나는 여기서 손으로 붙잡을 수 있는 ‘현실’로 말하고 싶었다. 잔을 만들 때 누군가 그려놓은 그림에 불과하지만, 커피를 다 마시기 전에는 내가 알 수 없었던 세계다. 하지만, 그 해저로 내려가 보니 거기에는 “고기와/그의 친구들”이 있었다.

동시에 그 순간 나는 나의 삶에 그들을 이입해보고 싶었다. 해저 놀이터를 하루 종일 즐기는 친구들, 나의 어린 시절도 그랬었다. 그 친구들은 많을 필요가 없었다. 함께 삶을 공유했던 이들은 겨우 한두 명이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먹고, 웃고, 이야기하고, 놀았던 이들을 꼽아보면 한 손 다섯 손가락만으로도 충분했다. 그 즐거움은 크고 놀라운 일에서 생기지 않았다. 컵 하나만 가지고도 충분하다. 어린 시절 내가 배운 것은 하루 종일 즐거운 놀이는 작은 사물 하나로도 만끽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 디카시는 나의 어린 시절 추억을 일깨우면서, 지금 내 삶의 즐거움을 어디서 누릴 것인지를 되묻는 자기 성찰의 시다. 특히 마지막 “파랑 / 놀이터”는 물고기의 놀이터이자, 상상하는 나의 놀이터이며, 동시에 색과 공간이 뒤섞이는 심리적·정서적 놀이터로 표현하려는 전략적인 언어다. 요컨대, 나는 이 디카시에서 일상 사물의 평면적인 기능(먹고 마시는 그릇)을 넘어, 그 안에 숨어 있던 상상력으로 한 편의 디카시를 만들어보고 싶었다. 이제는 그 시절로 거슬러 돌아갈 수 없는 ‘늙음’ 상태지만, 상상으로는 여전히 어린, 젊음 그대로를 잘 유지한다는 것을 재확인했다.


총평

「상상 놀이터」는 이전 나의 디카시들과 결과 호흡이 완전히 달라졌다. 그동안 어둠, 침잠, 성찰 같은 것이였다면, 이번 디카시는 어린이의 심정으로 나의 일상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마음에 드는 카페에서 한 잔 커피와 마들렌 작은 부스러기(하나도 아니다)를 두고서도 나의 지난 시간을 상상해 내는 데 성공했다. 컵 바닥이라는 작은 사물, “아니아니”라는 말장난과 파랑이라는 색감이 디카시 전체에 잘 담겨 다행이다. 특히 부정언어를 긍정의 축으로 사용한 것이나, 히브리어 문법을 응용한 것도 실험적이었지만 잘 반영되었다.

덧. 대림절, 거창한 의미의 케노시스가 전부는 아닐 것이다. 어린 시절, 한 번쯤 드나들었을 그 공간, 성탄절 하나에 마음껏 웃고 즐겼던 그 순간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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