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 예정된 글은 4-3 논지에 따른 논거의 정리; 4-4 당대담론과 책 너머의 시선 등입니다. 초고 단계여서 글은 계속 수정됩니다. 부족한 글을 우선 공유해둡니다.
<왼쪽은 샤갈의 '창조',1960 판석화
출처 https://m.blog.naver.com
/오른쪽은 책의 표지. >
II. 서평 쓰기의 실제
여기 한 권의 책이 있다. 가로 120*세로 205 정도다. 문고판보다 조금 큰 크기다. 한 손에 딱 잡힌다. 두께도 적절하다. 240여 쪽 정도여서 겉으로 보기엔 읽기에 부담은 없어 보인다.
1. 읽기
읽기 1-0. 책 훑어 읽기
첫 책장을 넘기기 전 잠시 표지를 훑어본다. 표지는 해처럼 빛나는 희끄무리한색을 2/5, 그 밑으로 검은 회색을 2/5, 나머지 아랫부분 1/5과 뒤표지 전체에 노란색을 배치했다. 표지 한 가운데 위의 빛 부분에는 해와 하늘의 존재(천사)가 나팔을 불며 날고 있고, 어둠 파트에는 두 사람과 새, 물고기, 풀 등이 함께 있다. 노란색 부분에는 흐릿한 형체로 한 사람이 눈을 뜬 채 무엇인가를 응시하는 그림이 들어있다. 그리고 맨 오른쪽에 세로 쓰기로 책의 저자와 제목이 그리 크지 않게 배열되어 있다. 자연스럽게 샤갈의 <창조>(1960, 판석화)가 떠오른다.
원본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인쇄의 차이일 수도 있지만) 그림의 색조다. 하나는 피조물의 세계가 파란색 바탕에서 검은 회색으로, 다른 하나는 하늘의 세계가 완전히 흰색에서 노란색이 깃든 백색으로 보정되었다. 파란색과 백색이 중심 색이었던 것에서 그 색을 빼버리고 남은 색이 표지를 장식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표지를 얼핏 보면, 이 책은 ‘탈색’의 뉘앙스를 짙게 풍긴다. 특히 인간이 오른쪽 위 사선으로 치켜 올라가면서도 똑 부러지게 뜨고 있는 눈은 이 탈색에 대한 당연한 동의가 엿보인다. 그 시선에서 원색이 빠진 자리에 당대의 차가운 이성의 온도가 내려앉아 스며있는 차가운 느낌이 뿜어져 나온다. 당신의 눈에는 이 표지에서 무엇이 보이는가?
이제 훑어 읽기 첫 단계인 제목을 확인해 보자. 서평의 대상으로 선정하는 책은 그 제목이 나를 불러 세우는 경우가 많다. 다시 말해, 제목에서 무엇인가가 포착하라는 책 자체의 신호음이 분명히 들린다. 이 경우, 제목에 대한 언어적 분석이 불가피하다. 책의 내용과 무관한 제목일 수도 있고, 책을 압축한 의미 있는 제목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실, ‘신의 일식:종교와 철학 사이의 관계에 대한 연구’(Gottesfinsternis. Betrachtungen zur Beziehung zwischen Religion und Philosophie, 1953)는 그리 간단한 제목은 아니다. 종교와 철학의 관계를 다루겠다는 의지가 제목에 분명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제 이 제목의 사전적 의미를 확인해보자. Finsternis는 독일어로 ‘어둠, 암흑, 칠흑, 깊은 밤’을 뜻한다. 의미적으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완전한 어둠’이나 ‘암흑 상태’다. 여기서 천문학적 의미인 ‘일식/월식( eclipse)’으로 이어졌다.
따라서 이 용어는 단순한 어둠(Dunkelheit)을 넘어 더 찰진 어둠, 때로는 초자연적인 느낌의 어둠을 나타낼 때 자주 사용된다. 뚫을 수 없을 것 같은 완전한 어둠(undurchdringlich-Dunkel)이다. 그렇다면 제목에서 자연스럽게 드는 질문이 있다.
“번역본의 ‘일식(日蝕)’은 어떤 의미인가?”
일식은 천문적 현상이다. 상식적으로만 보더라도, 태양과 지구 사이에 ‘달’이 끼어들어 태양-달-지구가 나란히 서있는 현상이다. 일식은 달에 의해 ‘지구를 향하는 해가 가려졌다.’라는 의미다. 일식의 주체는 ‘달’이다. 그렇다면, ‘신의 일식’이라는 의미는 무엇인가? 다음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첫째, 신이 ‘일식처럼 행동한다’라는 의미다. 마치 달의 기능처럼 신이 행동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신은 무엇을 가리고 있는가? 둘째, 신이 ‘일식의 대상’이다. 다시 말해, 신과 피조물 사이에 무엇인가가 끼어들어 신이 가려진 상태다. 의미적으로는 두 번째 경우가 더 적합해 보인다. 하지만, 첫 번째 의미도 배제할 수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나는 이 책의 표지와 제목에서 무엇을 확인할 수 있을까? 일식은 짙은 어둠을 의미하기에 '신의 일식'은 신이 짙은 어둠에 머무르게 된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둘째, 서문과 목차 읽기다. 이제 책장을 열어보자. 가장 먼저 서문이 있다(추천인들의 글은 선입견을 줄 수 있어 건너뛴다.). 한 페이지 정도에 담긴 이 서문의 주요 내용은 본문에 실린 글들의 출처다. 본문의 구성은 강연과 저작이 섞여 있다. 책의 전반적인 기조는 강연에 기반한다. 1951년 미국의 네 개 대학에서 행한 강의 원고가 중심인 듯하다(아마 각 대학에서 하나의 주제씩, 모두 네 주제를 다룬 것으로 보인다). 즉 종교를 축으로 현실, 철학, 윤리, 마지막으로 신과 인간의 정신이 배열된다. 여기에 더해 과거의 저술을 그대로 반영한 글이 본문 세 번째 ‘신을 향한 사랑’과 네 번째 ‘종교와 현대 사상’(1943)이다. 이 글은 부록에 실린 ‘융의 반론에 대한 응답’과도 이어진다. 또한, 머리말은 1932년의 경험담이며, 마지막 글 ‘신과 인간의 정신’에는 1929년의 학술 강연 일부가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이를 토대로 목차를 다시 검토해 보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단어가 있다. 바로 ‘종교’다. 이 말을 중심으로 대화, 현실, 철학, 관념, 사상, 윤리, 정신 등이 나란히 배열되어 있다. 따라서 이 책은 제목이 암시하듯 ‘종교’를 중심에 세우고, 그 주변에서 다양한 사상적 관념들을 서로 연관 지어 말하려는 시도를 수행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 사이사이에 ‘사랑’, ‘윤리적인 것의 중지’, ‘신과 인간의 정신’ 같은 표현들이 박혀 있다. 그러나 조금 더 정확하게 보면, 이 책의 축은 오히려 두 글에서 더 선명하게 드러난 듯하다. 하나는 “신을 향한 사랑, 그리고 신에 대한 관념”이고, 다른 하나는 “신, 그리고 인간의 정신”이다. 두 글은 같은 결을 유지한다. 다만 앞글에서는 ‘사랑’이, 뒷글에서는 ‘정신’의 문제 틀(frame)이 더 두드러질 뿐이다.
목차를 따라가면, 이 주제를 강연하고 글로 남긴 부버는 1929년부터 1952년에 이르는 시간 동안 자신의 사유를 한 권에 묶어 제시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그 사이에 융의 반론이 있었고, 그에 대한 자신의 응답이 있었다는 사실을 책 속에 분명히 적시해 두었다. 다만 융의 반론이 좀 더 구체적으로 책 안에 담기지 않은 점은 아쉽다. 그런데도 이 구성만 보아도, 이 책이 부버 자신이 이해한 ‘종교’에 대한 하나의 변증법적 성격을 유지하고 있다고 추론할 수 있다. 변증의 문장은 대개 차갑고 단호하다. 상대의 말을 받아 적되 칼끝처럼 정리한다. 논박의 정서가 아니라, 정리의 결기다. 상대의 말을 이성적으로 파악하고, 그것에 대해 자신의 사유(때로는 신념까지)를 토대로 서술해 나가는 방식이다.
따라서 목차에 근거하면, 이 책은 당대 종교와 관련하여 일어난 다양한 철학과 사상에 대한 부버의 비평이 집약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책은 따뜻하게 시작해 차가운 바다를 지나, 다시 어떤 항구로 향하는 듯하다. 그래서 이 책을 읽을 때 서두르지 않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느린 독서를 통해 한 가지 질문을 새롭게 가져보는 것이다. “부버는 이런 태도로 무엇을 변증 하려고 했을까?” 여기서 ‘무엇을’은 두 가지를 함의한다. 하나는 부버가 ‘종교에 대하여 무엇을 변증 하려 했는가’라는 물음이고, 다른 하나는 ‘그 변증이 궁극적으로 어떤 근거와 방향을 향하는가’라는 물음이다.
셋째, 기본 단락 읽기
훑어 읽기에서 세 번째는 표지와 제목과 목차를 통해 추론한 기본 단락을 설정하고 읽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첫 장인 머리말과 마지막 장인 융의 반론에 대한 부버의 재반론 장이다.
이를 정리하면, 훑어 읽기 첫 단계에서 나는 크게 두 가지를 주목했다. 앞에서 말했듯, 첫째, 내가 서평의 첫 과정에서 항상 확인하는 표지와 목차, 그리고 머리말이다. 둘째는 목차를 책의 기본 정서가 확인된 장이다. 이를 통해 저자의 정동을 확인한다. 이 책의 경우에는 다음과 같다.
첫째, 제목이다. 제목에 근거하면, 이 책에서 부버의 변증은 ‘신의 일식’, 곧 신이 어둠에 가려져 있는 상태와 관련되어 있다.
둘째, 융의 반론과 관련된 내용을 확인하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이 책에서 먼저 읽어야 할 것은 머리말과 부록이다. 머리말에서 책의 전반적 방향을 확인하고, 부록의 ‘융의 반론에 대한 응답’에서 부버가 말하고자 하는 변증의 핵심을 어느 정도 짚어보는 것이다. 이 핵심 독서가 끝나고 이어서 책 전체를 훑어 읽은 것을 정리하는 것이다.
여기서 유의할 것은 이런 읽기가 독자 반응에 근거한 주관적인 주장이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특히 앞으로 다룰 논지는 책의 내용, 주요 개념으로만 정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에 대한 근거 역시 책 안에서, 책과 밀접한 책의 배경으로만 검증되어야 한다. 그것은 ‘신의 은닉의 원인을 인간의 사유에서 찾으려는 부버의 의도’를 뒤따라가는 독법으로 이 책을 이해하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제 훑어 읽기의 두 번째 단계로 가보자
읽기 1-1. 훑어 읽기와 상상
2~3시간 정도로 읽은 뒤에 나는 가만히 눈을 감고 책의 흐름을 되새겼다. 자연스럽게 내 속에서 부각하는 단어나 개념에 머물렀다. 나에게 떠오른 상상은 이렇다. (이 이미지는 앞으로 다룰 이 책의 논지를 이해하는 데 긴밀하다.)
검푸른 넓은 바다가 있다. 그 바다 이곳저곳에 작은 섬들이 떠 있다. 무인도 같고, 가끔 작은 배들이 드나드는 것 같다. 그중 한 섬에 등대가 있다.
그 등대의 불빛은 느슨한 간격으로 켜졌다 꺼졌다 한다.
그런데 그 불빛은 이상하리만치, 빛이 꺼진 바다를 오히려 더 검게 드러내 보이게 한다. 빛이 어둠을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빛이 어둠의 윤곽을 선명하게 만든다. 그 사이 저 멀리, 건너편에 육지 같은 것도 어렴풋하게 보인다.
멀리서 보더라도 노란색이 누릇누릇하다. 땅의 색치고는 밝다.
거기에서 작은 배들이 수없이 바다로 나온다. 그런데 출항한 배들이 곳곳에 솟은 섬에 당도하지는 못하는 것 같다. 겨우 한두 척에서 사람이 내린다. 내린 사람이 다시 돌아갔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 이미지는 책에 대한 나의 잔상이다. 풍경 묘사가 아니다. 그런데 이 상상과 부버가 이 책을 서술하게 된 배경을 연결하면 이 책의 색조가 떠오른다. 바로 표지의 색상이다. 샤갈의 원조에서 유채색이 탈색된 무채색이다. 이 탈색은 이 책의 기본 논조와 맞닿아 있다.
목차에 따르면, 부버의 책은 1930년 즈음부터 50년에 이르는 유럽 사상사에 대한 종교적 비판이 집약되어 있다. 책을 훑어 읽기만 해도, 부버가 주목한 것은 당대 사상이 ‘세계/현실’이라는 거대한 바다에 떠 있는 섬과 같다는 현실이다. 내가 은유한 바다를 부버의 관점에 접목하면 바로 신이 창조한 인간세계다. 19세기 초 세계 전쟁을 거쳐 온 이후 당대 사람들은 각자 자기 섬에 닿기 위해 자신의 항구, 곧 익숙한 삶의 자리에서 사유의 배를 띄웠다. 어떤 이는 자기 확신을 더 단단히 움켜쥔 채 자기 항해를 시작했고, 어떤 이는 자기 경계를 풀어놓지 못한 채 다른 사람의 배에 올라타 출항했다. 목적지는 자기가 닿고 싶은 각자의 섬이다.
그런데 항해하는 동안 등대의 도움이 점점 더 필요해졌다. 항해하는 바다에는 언제나 어둠이 밀려왔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등대는 대낮에도 필요했다. 바다 위에서는 한순간도 등대의 도움 없이는 목적지에 닿을 수 없었다. 이 사실을, 항해하는 배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용기 있게 출항한 뒤에도, 안전하게 섬에 도착할 수 있을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겨우 어느 섬에 닿아 하선한 이들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안심할 수 없었다. 돌아갈 배가 물결에 휩쓸려 사라진 탓에, 그들은 되돌아갈 도구를 잃어버리는 일도 비일비재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부버의 시대, 사유를 통한 생존의 방식은 그 섬에 머물며, 새로운 배가 오기를 기다리는 모습과 같았다. 사유는 바다 위에서 부유했다. 떠나온 항구로 되돌아가는 일도 생각보다 요원했다. 이처럼 부버의 책을 덮고 난 뒤, 나의 인상은 시대를 횡행하는 다양한 사유들이 희망보다는 무채색으로 탈색되었다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이 훑어 읽기에서 나에게 가장 인상적으로 남은 구절이 있다. 바로 마지막 부분이다. “내일이라도 그사이에 끼어든 것이 옆으로 물러설 수 있다.”(210쪽) 특히 ‘그사이에 끼어든 것’이라는 말이 유난히 오래 남아있다.
일단, 여기서 내가 훑어 읽기에서 다뤘던 은유의 좌표를 잠시 정돈해 두는 것이 좋겠다.: 바다는 세계/현실(삶의 장)이다. 육지/항구는 각자의 익숙한 삶(일상, 공동체, 전통, 학문적 거처)이다. 섬은 각자가 설정한 사상/이념/체계다. 그리고 부버의 관점에서 등대는 종교이다. 철학은 그 등대가 비추는 바다 위에서 각기 다른 섬으로 떠오르는 인간의 관념들—곧 사상과 체계들—로 나타난다. 요컨대 이 은유는 “현실의 바다 위에서, 종교라는 방향 감각을 의지하며, 인간의 관념들이 섬처럼 부상하고 충돌하는 장면”을 가리킨다.
이를 통해 훑어 읽기의 성과는 분명하다. 이 책에서 부버가 겨누는 변증의 대상은 ‘신 자체’라기보다, 신의 통치 아래 놓여 있으면서도 그 통치를 스스로 벗어나려는 인간 현실, 다시 말해 신의 빛을 가리게 만드는 인간 현실의 왜곡이라는 점이다. 나아가 부버는 이 굽어진 시선을 곧게 펴는 책임은 인간에게 있다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그것이 부버가 재정의하는 ‘종교’다. 간명하게 다뤄진 느낌이지만, 부버는 인간이 올바른 종교적 태도(철학적 태도가 아니다) 신의 시선을 따라가며, 신을 가린 자리에서 비켜서는 것을 요청한다. 그것이 인간의 겸손한 사유의 눈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 은유를 하나의 과정으로 구체화하려 한다
읽기 1-2. 훑어 읽기에 따른 논지 추론 근거들
훑어 읽기는 불완전한 독서다. 정독하지 않아서 저자의 의도를 면밀하게 살피지 않았다는 비판이 불가피하다. 그러나 모든 독자는 저자의 의도를 완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따라서 독서에는 ‘저자 의도 파악’에서 ‘독자 반응 옹호’라는 비평의 전환이 허락되었다. 훑어 읽기는 독자 반응에 우선권을 부여한다. 이에 따르면, 이해가 충분하지 않아도, 일단 책의 의도를 따라가는 데 부족하지 않다. 나아가 이런 과정에서 책의 잔상과 주요 개념들, 핵심 문장을 일별 하면 하나의 서평 논지가 추론될 수 있다. 부버는 ‘신의 일식’ 원인을 바다 자체가 아니라 바다 위에 떠 있는 섬들—사상과 관념의 체계—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기 섬을 찾아 항해하는 항구의 배들은 결국 자기 배 위에서만 섬을 바라보았다. 그 시야는 섬의 전모가 아니라 섬의 ‘보이는 면’에 갇혔다. 이것이 곧 자기 관념을 벗어나지 못하는 상태다. 더욱 문제는 그 사유가 곧 ‘신을 가려버린’ 원인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부버의 주장을 (조금 거칠지만) 이렇게 추론할 수 있다. 즉, 1950년대 즈음, 강력하게 제기된 ‘신은 죽었다’라는 실존주의 관념, 또는 ‘신은 인간의 내면이다.’라는 융 심리학 사상과 같은 이런 사고는 신을 ‘너’가 아니라 ‘그것’으로 환원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원인을 제공한다. 따라서 신을 가린 원인, 신이 어둠에 가둔 것은 이런 인간의 자기 사유에서 발원한다. 문제는 이런 사유가 인간의 관계성을 상실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 상실은 인간과 그것의 관계로 환원시켰고, 결과적으로 신과 인간 사이에 놓인 ‘나와 너’라는 인격적 연결고리가 끊어진 결과가 되었다. 결국, 이런 고리의 끊어짐을 다시 연결하는 것은 ‘지금 여기”에서 다시 그 관계성을 복원되는 것이다. 그 복원은 인간이 자기 소리로 장벽을 세워 스스로 신을 가두지 말고 장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신의 미세한 소리를 경청하며, 자기 사유가 다져놓은 굳은 길에서 한 걸음 물러서는 일이다.
이 논지 설정을 위한 근거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요소를 검토했다. 첫째, 이 책의 서문과 목차에서 추론한 책의 시대적 배경이다. 둘째, 목차와 훑어 읽기에서 포착한 주요 개념 등이다. 셋째, 책의 제목 분석이다.
첫째, 부버의 책은 바다 같은 유럽의 삶의 터전을 배경으로 한다. 특히 시대적으로 1950년대는 두 차례의 세계 대전 이후 냉전 시대로 들어서면서 불안한 실존이 득세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철학, 실존주의 같은 사상이 우후죽순처럼 자라났다. 그런데 부버는 이 주요 내용을 1950년대 초에 미국의 네 개 대학에서 설명한다.
둘째, 훑어 읽기의 결과 잔상으로 남은 주요 개념과 여러 내용은 흐름이 명확하다는 것이다. 특히 그의 ‘대화 철학’에 기반한다는 것이 분명했다. 부버는 이 책에서 ‘관계’라는 말을 반복한다. 표면적으로는 ‘종교’를 말하지만, 내적 흐름에는 그의 ‘나와 너(Ich und Du)’라는 관계 철학이 주조음을 이룬다는 것이다. 이를 토대로 그는 시대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재해석한다. 즉 등대의 불빛을 의존하면서도 자기 길로 떠내려간 철학, 윤리, 사상을 비평적으로 관조한다. 그 결과, 그의 대전제가 드러난다. 이 흔들리는 세계, 불안한 실존은 그 모든 것이 신의 관점 아래 놓여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역설적으로, 인간의 철학과 사상은 겸손한 눈길의 방향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시대를 관통하는 여러 사상은 ‘현실(reality)’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절대화하며, 오늘도 신에게서 빛을 가리는 인간의 왜곡된 관념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부버가 말하는 신는 집요하게 일깨운다.
셋째, 책의 제목 ‘신의 일식(Gottesfinsternis)이다. 번역 제목은 신의 어둠 또는 어둠의 신’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신이 어둠에 갇혔다’라는 의미다. 고대 히브리 전통에 의하면 ‘신의 갇힘’은 신 스스로가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부버의 관점은 신이 타율적으로 어둠에 가려졌다는 것에 집중된다. 따라서, 신이 ‘은닉되었다’라는 주장은 그렇게 만든 원인을 추적하는 데 방점이 찍혔다. 결국, 이 제목에 따르면, ‘신의 일식’은 신의 자기 은닉보다 ‘신의 가려짐’이다. 마치 달이 해를 가리며 지구를 어둠에 가두는 것처럼, 신의 현존이 어떤 중간 요인에 의해 가려졌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제목 역시 은유적이다. 달의 일식에 빗댄다면, ‘해-달-지구’가 나란히 선 장면을 떠올릴 수 있다.
이런 추론들은 결국 이 책에서 ‘신의 현존이 왜 이 현실에서 탈색되었는지’를 가늠하는 데 이바지한다. 말하자면, 이 세계에서 신의 은닉은 신의 부재가 아니라 인간의 사유가 신의 색조를 묽게 만든 결과를 함의한다. 신은 부재하지 않다. 스스로 먼저 숨지 않았다. 부버가 보기에, 인간은 자기 철학으로 신을 가렸다. 그렇다면 신의 색조를 다시 복원하는 일 또한 인간에게 달려있다는 것이 부버의 주장이다.
서평을 쓴다는 것은 이 잠정적 추론이 단지 내 잔상에 그치지 않도록, 책의 문장들 속에서 그 논거를 하나씩 맞대어 확인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확인된 논거를, 나의 문체로 다시 써내는 일이다. 따라서 다음에서는 『신의 일식』이 실제로 어떤 개념들을 어떤 순서로 배열하고, 어떤 논증의 흐름으로 이 논지에 이르는지—핵심 대목을 중심으로 정리해 보려 한다.
읽기 1-3. 논지와 그 논거들에서 추론하는 부버의 관점
『신의 일식』을 훑어 읽고 앞선 모든 글을 관통해 정리하면, 이 책의 기저에 흐르는 주제어는 “모순의 위험”이다. 모순의 위험이란, 인간이 신을 성찰하기 위해 내세운 철학과 사상이 결국 도리어 신을 가리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말이다. 신을 향한 지향을 초월로 열어두지 못하고 인간 내부로만 환원한 결과를 낳았다는 역설이다. 부버가 처음 내민 문제의식은 단순하다. 신을 갉아 먹은 것은 무신론이 아니라, 실재에 투영되지 않은 종교였다.
부버는 이 책의 첫 부분에서 현실의 바닥에 닿지 못한 말들이 공중에서 서로를 증명하느라 소란스러울 때, 정작 노동자들의 침묵은 더 두껍게 남아있는 경험을 진지하게 소환한다. 그리하여 부버는 “하나님(신이 아니다)”을 교리의 결론이 아니라 가설로 세우는 한 노동자의 말에 공감한다. 세계는 가설이라는 뼈대 위에서 간신히 유지되고, 그러나 그 가설을 존재로—실재로—끌어들이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다는 것이다. 부버는 그 가설이라는 말이 한 인간의 깊은 심정에서 올라는 것임을 간파한다. 하지만, 그것에 무조건 동의하진 않는다. 이제 그 말에 대해 자신의 신학과 철학을 토대로 대답한다.
부버가 ‘가설’이라는 말에 대해 변증하는 것을 들어보면(13-15쪽), 신을 성찰하려는 인간의 철학과 사상이 신을 더 가까이 데려오기보다, 올히려 가려버린다는 것을 일깨운다. 물론 부버는 철학의 존재를 폐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철학이 자기 운동을 멈추고, ‘너’를 향한 창을 닫은 채 ‘나’의 내부에서만 자기 확신을 증식할 때—그 환원이 종교적 현실에서 신을 ‘너’가 아니라 ‘그것’으로 바꾸어 버릴 때—그 지성은 신을 밝히는 등불이 아니라 신을 가리는 벽이 될 수 있음을 경고한다.
따라서 이 책에서 부버의 논지는 더 확장된다. 부버는 그 노동자와의 대화 속에서, 그리고 당대 사상과의 대결 속에서 자기 사유를 한번 더 되묻는다. 신이 정말 사라졌는가. 아니면 신 앞에 무엇인가가 끼어들었는가. 어느 노동자와의 대화에서는 “하나님이라는 가설”이 삶의 결에서 어떻게 정당성을 얻는지 보여주고, 어느 노학자와의 대화는 초월의 실재성이 사유의 지평에서 어떻게 버티는지 점검하게 하며, 융과의 논쟁에서는 인간의 사상이 초래한 ‘모순의 위험’을 과격한 어조로 경고한다. 융의 사상에 대한 부버의 반론은 명확하다. 즉, 신의 일식은 인간에게서 초래한다. 인간은 초월적인 신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냥 차단할 뿐이다. “알 수 없는 신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을 믿는 믿음으로 신의 의의를 밀쳐내”며, 그 자기-믿음이 신을 가린다. 따라서 ‘일식’은 신이 주체가 아니라 인간이 주체인 사건이 된다. 부버가 말하는 일식, 다시 말해 은닉은 신의 자기 은둔이 아니라, 인간의 사유가 끼어들어 만들어낸 인간의 가림이다.
결정적인 문장이 뒤에서 칼날처럼 드러난다. “하나님과 우리의 믿음 사이를 끼어드는 것은 바로 인간 자신이다.” 이 한 문장이 당신의 도식과 맞물린다. 해-달-지구처럼, 신-나와 그것-나와 너가 나란히 서는 순간, 신은 객관적 대상이 아니라 관계의 현존이 되기에 오히려 더 쉽게 가려진다. “우리가 신과 마주하는 것은 오로지 ‘나-너’ 관계 안에서만 가능하다. 왜냐하면, 다른 모든 존재자와는 철저히 달리 신에게는 어떤 객관적인 측면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책 자체도 ‘나와 그것’이 될 수 있고 ‘나와 너’가 될 수 있다. 내가 이 책을 설명 가능한 대상으로만 다루면, 나는 독서의 자리에서도 ‘그것’을 세우고 신의 소리를 막는다. 반대로 내가 한 걸음 비켜서면—내 사유의 굳은 길에서 스스로 물러서면—그 가느다란 소리가 들릴 가능성이 열린다.
그래서 이 책에서 신의 존재는 인간에 의해 그 의의가 ‘탈색’되었다. 이 탈색은 시대에 대한 일반적인 우울감을 은유한 것은 아니다. 신의 일식, 즉 신이 은닉된 상태, 신의 현존이 현실에서 왜 희미해지고 묽어졌는지를 가리키는 고유한 징후를 함의한다. 신은 부재하지 않다. 스스로 먼저 숨지도 않았다. 다만 인간이 만든 중간 벽—관념, 체계, 자기 확신—이 신의 색조를 희미하게 했다.
그러므로 그 색의 복원은 “신을 다시 증명하는 일”이기 전에, 신과 나 사이에 끼어든 것을 옆으로 물러서게 하는 일이다. 부버가 말하는 ‘비켜섬’은 바로 그 자리의 이동이며, 그 이동은 후퇴가 아니라 윤리다. 신의 소리를 내 사유로 가로막는 자리에서 한 걸음 물러서는 일, 그리고 그 침묵에 가까운 가느다란 음을 끝까지 듣는 일—그 경청의 윤리가 ‘탈색’된 현존을 다시 ‘복원’의 자리로 되돌려 놓는다. 이를 위해 이 책 전반에 걸쳐 전개되는 부버의 종교관은 관계론에 단단히 묶여있다. 철학과 종교의 차이는 정보의 양이 아니라 만남의 양태다. 종교는 “하나님의 얼굴을 마주한 삶”이고, 신인식의 본질적 영역은 사유의 광장이 아니라 관계의 자리다.
정리하면, 그의 주장에서 해법으로 제시되는 비켜섬은 후퇴가 아니다. 신과 관계한 인간의 마땅한 실천 윤리다. 윤리는 선명한 명령을 붙잡는 것만이 아니라, 불확실한 영역에서 “윤리적인 것의 일시적인 중지”는 불가피하다. 이런 시대에 침묵과 굉음의 구분이 흐려진다. 그렇다면 이 시대를 관통하는 방식은 다시 듣는 훈련이다. “침묵과 굉음,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는 이 둘의 구분이 어려워”졌을 때, 인간의 새로운 양심이 되살아나기까지 다른 길은 없다. “절대 사라지지 않는 나타남, 절대자의 나타남을 간파해 낼 수 있는 시력”을 다시 일깨워 그 소리를 듣는 길을 되찾는 것이다. 그것이 부버가 말하는 관계적·윤리적 전환이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