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나의 서평 쓰기 과정을 풀어서 적어둔 것입니다. 글은 최종본이 아닙니다. 의견을 참고하여 계속 수정될 수 있습니다. <다음 글 4-4는 담론의 확장과 책 너머의 시선 그리고 서평 요약본 샘플 (원고지12매)>입니다.
2. 논지를 입증하는 논거들의 구체적인 설명
이제 훑어 읽기로 추론해 둔 부버의 논지를, 내가 세운 서평의 논지에 비추어 본문 속 구체적 논거로 다시 검증해보려 한다. 여기서 다시 상기할 점이 있다. 부버는 철학이나 사상을 폐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철학이 세계와 타자를 ‘대상’으로 고정시키며 만남을 가리는 순간을 경계하고, 사유를 관계의 자리로 되돌려 세우려 한다..
부버의 논증은 당대의 삶의 방식이 어떤 방식으로 ‘절대화된 현실’을 만들어 내는지를 보여주는 방향에서 시작한다(“종교와 현실”). 불확실성이 높아질수록 인간은 확실성을 발명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 발명된 확실성의 이름이 철학자들의 ‘현실’이고, 그 현실은 신과 무관한 중립적 사실을 지나쳐 인간이 스스로 세운 해석의 질서로 전이된다. 그러므로 현실은 더 이상 ‘있는 그대로의 바다’가 아니라, 인간이 항해를 위해 고정하고 싶은 섬이다. 좌표계다. 그 좌표계가 분명히 보일수록 인간은 안심하며 바다를 항해한다. 그 틈에 신은 그 좌표계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로 밀려난다. 신이 침묵하지 않지만, 인간이 스스로 들을 수 있는 범위를 좁히는 것이다. 부버는 이 좁아짐을 시대의 증상으로 읽어낸다. 그리고 그 증상 속에서 Gottesfinsternis(신의 깊은 어둠, 일식)라는 주제를 캐낸다. 이 말은 신의 ‘현존’이 바다의 칠흑 같은 어둠에 갇혔다는 의미다.
하지만, 부버는 철학의 존재 자체를 버리자고 하지 않는다. 다만 철학이 ‘너’를 향한 초월의 방향을 잃고 ‘나’의 내면으로만 환원될 때, 그 철학이 신의 현존을 밝히는 등불이 아니라 신을 가리는 “달”이 될 수 있음을 적극 비판한다. “신과 마주하는 것은 오로지 나와 너의 관계에서만 가능하다.”(207쪽)는 주장이 책 전반을 주도한다.
요컨대, 여기서 나는 ‘탈색’이라는 말을 떠올렸다. 이것은 시대의 우울을 묘사하는 말이 아니다. 오직 하나의 사건을 가리킨다. 곧 신의 가리움이다. ‘신의 현존이 현실에서 희미해진 사건’—일식—을 사용한 표지를 해석하는 말이다. 사회가 어둡다는 말이 아니다. 신이 어둡게 느껴지도록 만드는 인간의 사유가 중간에 두꺼워졌다는 뜻이다. 또한 탈색은 인간 심리의 회색빛이 아니다. 신의 빛이 현실에서 약화한 것처럼 보이는 현상이다.
논거 2-1. ‘신을 가리움’의 원인
부버는 “신의 일식”을 천문학적 의미로 시작한다. “태양과 우리 눈 사이에 일어난 일”(45쪽)이라는 의미는 이 일식의 구조를 시사한다. 일식은 신이 사라지는 사건이 아니다. 무엇인가가 “사이에 끼어드는” 사건이다. 부버의 핵심 문제설정은 바로 이 점에 착근한다. 즉, 신이 스스로 숨었는가, 아니면 신과 인간 사이에 무엇인가가 끼어들어 신이 가려졌는가. 부버는 후자를 겨눈다. 그는 “신의 일식”을 신의 가리움이라는 구조로 설명하면서 궁극적으로 그 원인을 추적하려는 것이다.
이 논거는 부버가 “우리가 신과 우리의 믿음 사이에 끼어드는 것이 무엇인가”를 묻는 것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또한, 그 답을 놀랍도록 단호하게 제시한다는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그는 시종일관 신을 가리움의 원인을 “바로 인간 자신”이라고 지목한다. 이런 말에는 신의 부재나 무능이 감지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의 책임을 호출한다. 신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가려졌다면, 어둠은 태양의 결핍이 아니라 통로의 차단이 된다. 그래서 이 책에서 인간은 신학의 입장에서도 피조물의 권리를 가진 존재가 아니라 책임을 감당해야 할 존재 언어로 변환된다.
그런데 이 가리움의 구조는 머리말부터 예고된다. “두 번의 대화에 대한 보고서”는 서로 상반된 ‘하나님과 그 개념을 말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하지만 부버에게 있어서 이 두 가지 관점은 모두 하나의 결론에 수렴한다. 바로 현실과 분리된 종교—실재에 투영되지 못한 종교—그 빈껍데기처럼 되어버린 ‘신 이해’다. 종교가 달이 태양에게 하듯 신의 영역을 갉아먹는다. 그러니 부버에게 가장 먼저 다가온 문제는 신에 대한 교리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현실에서 어떻게 접속되어 있는가?’하는 것이다. ‘한 노동자들의 침묵” 같은 장면이 머리말에 배치되는 것도 결국 그 침묵이 단지 사회적 풍경이 아니라 “현실의 바닥”에서 신을 다시 묻는 압력으로 작동한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압력 속에서 부버는 “하나님은 하나의 가설”이라는 주장과 정면으로 맞선다(13–15쪽). 그는 그것을 얄팍한 가정으로 치워버리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은 가설일 수 없다”라는 논증을 더 깊이 밀어붙인다. 그때 그가 붙드는 핵심은 ‘만남’이다. 세계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공존하는 자리이며, 그 공존이 현실 속에서 ‘만남’이라는 사건을 일으킨다. 그래서 어떤 이가 “세계는 하나님이라는 가설이 없어도 된다”라고 말할 때, 부버는 그 ‘불필요함’ 자체가 오히려 신의 존재감을 불러낸다고 답한다. 가설은 신을 설명 가능한 것으로 낮추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신을 실재로 끌어들이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도 정직한 과제인지를 드러내는 장치다. 다만 여기서 동시에 드러나는 경고가 있다. 신을 성찰하려는 인간의 철학과 사상이 신을 더 가까이 데려오기보다, 어떤 순간에는 도리어 가려버릴 수 있다는 사실이다. 부버는 철학을 폐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철학이 자기 운동을 멈추고 ‘너’를 향한 창을 닫은 채 ‘나’의 내부에서만 자기 확신을 증식할 때—그 환원이 종교적 현실에서 신을 ‘너’가 아니라 ‘그것’으로 바꾸어 버릴 때—지성은 신을 밝히는 등불이 아니라 신을 가리는 벽이 될 수 있음을, 그는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경고한다.
한편 부버는 이 주제와 관련한 다른 문제에 직면한다. 바로 ‘하나님’이라는 용어의 문제다. 어느 노학자의 질문은 이 ‘용어’가 가장 초월적인 존재를 의미하는 데도 불구하고 인간이 쓰는 순간 남용과 오용된다는 반박이었다. 부버는 노학자의 말을 길게 인용한다. 즉, “그 말과 결부된 온갖 치욕스러운 불의가 그 말의 본래적 특징을 싹 지워 버렸습니다. 그래서 저는 최고의 존재를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소리를 들으면, 그거야말로 신성모독이라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18쪽) 이 인용문에 대한 부버의 반론은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이 단어를 포기할 수 없다”(19쪽)이다. 부버는 ‘하나님’이 고상하고 도도한 하늘의 존재가 아니라 인간에 의해 온갖 처절한 형태로 대우받는 고통의 신이라고 답변한다. 결국, 신을 말한다는 것은 곧바로 신을 이 땅에 끌어내려 소유하는 일이 아니라 신도 인간과 함께 현실과 불안 위에서 흔들린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따라서 이 머리말에 담긴 두 대화를 종합하면, 신의 가리움은 ‘신이 숨었는가’가 아니다. 왜 인간과 함께 하려는 ‘신이 가려졌는가’이다. 부버는 그 가리움이 인간 현실(그리고 현실과 분리된 종교적 태도)에서 발생한다는 점을 일관되게 주장한다.
이 서평 논지에서 밝혔듯이, 신의 일식은 신의 피동적 은닉, 인간에 의한 가리움이라는 것은 이 책의 머리말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부버가 이후 이 책을 구성하는 강연과 글을 통해 반복적으로 논증하려는 것 역시 이 머리말의 대화에 이어져 있다. 그는 신의 현존이 희미해진 것이 신이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어떤 사유가 신과의 사이를 막아 세웠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부버의 핵심 문제는 시종일관 “일식”이 아니라 “가리움”이다. 신은 스스로 자신을 은닉하지 않는다. 요컨대, 신의 일식은 신의 부재가 아니라 통로의 차단이며, 책임은 인간에게로 되돌아온다.
논거 2-2. ‘나-그것’의 대상화와 ‘신의 가리움’의 관계
부버의 주장에서 나의 서평 논지의 두 번째 근거는 바로 가리움의 원인으로서 제시된 인간의 자기 철학을 부버가 구체적으로 제시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부버가 이 『신의 일식』에서 줄곧 인용하는 『나와 너』와 긴밀하게 연결된다. 다시 말해, 부버는 인간이 스스로 신을 가리는 것은 인간과 신의 관계를 ‘나와 그것’으로 대상화했기 때문이다. 이 대상화는 ‘신의 내면화’이다(53쪽). 관계라는 점에서 종교는 신을 이론적 논리로 붙잡아두는 기술이 아니다. 오히려 나와 너의 관계에서 그의 얼굴을 마주하는 삶의 태도에 가깝다. 그리하여 자기 자신에 가둔 신을 자기 밖으로 되돌려 주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철학은 그 삶을 “관념”의 방향으로 조직하려는 힘을 가진다는 점에서 나와 너를 자칫 ‘나와 그것’의 문제로 환원시킬 수 있는 위험성이 상존한다. 부버는 이를 통해 사유의 힘이 인간 내면으로 굳어지는 잘못된 방향으로 굳어질 수 있음을 경고한다. 이 점이 신을 가리는 더 구체적인 원인이다. 인간과 신이 ‘나와 너’가 아니라 ‘나와 그것’의 관계로 퇴행하는 것이다.
이 책 제2장 <종교와 철학>에 따르면, 종교와 철학은 전혀 다른 길을 걷는다. 물론 부버가 기본적으로 철학과 종교를 단순히 대립시키지 않지만, 결정적으로 그 둘의 차이는 신을 인식하는 방식에서 드러난다. 이 차이는 지성의 유무가 아니다. 관계를 이해하는 양식이 대조에서 발생한다. 그런데도 부버는 로젠츠바이크를 인용하며, 철학과 종교의 협력을 놓지 않는다. 아마도 ‘철학자들의 하나님’과 ‘신앙의 하나님’이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듯하다. 그러나 철학자들의 하나님은 그저 설명의 대상이 되기 쉽고, 그 순간 하나님은 ‘너’가 아니라 ‘그것’으로 미끄러질 위험이 있다. 반면에 종교적 하나님은 ‘나-너’의 관계가 실재로 일어나는 것이다. 결국, 부버의 견해에서 ‘나-그것’의 대상화는 신을 가리우는 결정적인 원인으로 작동한다.
나는 여기서 부버의 견해를 토대로, 새로운 도식을 구축했다. 바로 ‘신(해)–나와 그것(달)–나와 너(지구)’라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비유가 아니다. 실제로 부버는 이 구도를 자기 책의 논리로 밀어붙인다. 신이 가리어졌다면 그것은 인간과 신이 나와 그것으로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부버의 관점을 더 분명히 알 수 있다. 즉, 신은 ‘객관적 측면’—즉 관찰 가능한 대상—으로 붙잡히지 않는다는 점이다. 지극히 주관적인 감성의 대상이다(참조 “신을 향한 사랑”). 그러므로 신을 객관화하려는 철학적 시도는 신의 존재를 더 분명히 인식하는 것이 아니다. 역설적으로 신을 더 가리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이때 인간의 철학은 이 예측 못한 결론을 스스로 ‘해명’ 하기 위해 새로운 이론들을 연이어 구축한다. 요컨대 이것이 아이러니하게 신과 인간 앞을 가로막는 ‘달’을 세우는 일이 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모순의 위험”이 분명히 드러난다. 인간이 신을 성찰하기 위해 내세운 철학과 사상이, 결과적으로 신을 가리는 장치가 되는 역설이다. 하지만, 부버는 이 역설이 철학의 무용론이나 전면 폐기와 동의어가 아니라는 점을 거듭 밝힌다. 그가 비판하는 것은 “철학함”의 방향이 인간 안으로만 환원되는지 여부다. 부버가 ‘나와 너’의 관계가 ‘나와 그것’, 인간 안으로만 내면화되는 것을 특히 비판한 이유도 바로 이 점이다. 그가 융을 집중 비판하는 이유가 그것을 입증한다. 그는 융이 신을 “심리적인 내용”으로 고착해 버리고, 신을 ‘자율적 내용’으로 이해하는 것을 경계한다(137–144쪽).
융에 대한 부버의 강한 비판은 인간이 초월적 신을 부정하진 않지만, 그저 “차단”할 뿐이라는 말(147쪽)에서 절정을 이룬다. “알 수 없는 신을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는 말도 부버의 불편한 심기를 그대로 드러낸다. 바로 이 신을 ‘안긴의 자율이라는 내용’으로 환원하는 것과 더 알려고 하지 않은 채 차단하는 일은 일식의 달의 기능과 유사하다. 그 달의 자리에 사상화된 인간, 신을 내면화한 인간이 자리한다는 뜻이다. 신을 알려고 하지 않으며, 자신을 믿는 믿음으로 신의 활동과 존재 의의를 밀쳐내는 방식을 비판한 것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나-너’가 아닌 ‘나-그것’으로 심화되어 고착된 형태다(151~152쪽).
부버의 비판을 정리해 보면, 신을 자신의 내면에 자율화의 내용(inhalt)으로 고착시킨 철학과 사상은 결과적으로 인간과 신의 세계를 ‘관계’가 아니라 ‘대상화’로 굳어진다. 신은 ‘너’가 아니라 단지 ‘그것’이 된다. 그리고 이 “그것”의 세계에서 인간은 신을 잃지 않았지만, 신의 빛을 스스로 가리게 되었다. 이 부분이 이 서평의 서두에서 내가 관찰한 표지의 ‘탈색’과 잇댈 수 있는 부분이다. 우리가 알 듯이, 철학은 신의 부재를 논하는 사유가 아니다. 설령 한다고 해도 신은 부재하지 않다. 철학은 인간의 관점에서 신의 현존은 현실에서 옅어지고 묽어지고 희미해진다는 것은 주목한다. 그런데 이런 철학적 관점은 이미 예로부터 신학에서도 나타났다. 고대 히브리인들의 시편 88편은 그 중요한 예다. 나는 이 책이 보여주는 ‘탈색’은 우연이 아니다. 오히려 세계 일반의 은유를 넘어 오직 ‘신의 일식”—신의 현존이 가려진 상태—에만 적용되는 특수한 표지로 기능한다.
결국, 이 책에서 신의 일식의 구체적인 원인은 관계의 왜곡이다. 부버의 관점에서 철학과 현대 사상은 나와 너의 관계를 ’나와 그것‘으로 퇴행시켰다. 부버의 관점에서 종교의 핵심은 관계이며, ’신과 마주하는 삶‘이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신은 객관화될 수 없고, 신과의 만남은 ‘나-너’ 관계에서만 가능하다. 다분히 인간 감정에 기반한 주관적 관계를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철학이 초월을 닫고 내면 환원으로 굳어질 때, 신은 ‘너’가 아니라 ‘그것’이 되어 가려진다. 이것이 이 서평에서 천착하는 “철학이 초래한 모순의 위험”과 긴밀해진다. 즉 신을 성찰하려는 사유가 결과적으로 신을 가리는 중간 벽이 된다는 것이다.
논거 2-3. ‘가리움’ 해법은 ‘비켜섬’이다. 그것은 후퇴가 아니라 철학이 추구할 윤리다
부버의 견해에 대한 나의 서평의 논지는 부버가 제시한 ‘가리움’의 해법에서도 지지받는다. 그것은 바로 ‘비켜섬’이다. 부버에 의하면 가리움의 구조가 인간의 철학, 신의 내면화에서 발생한다면, 가리움을 걷어내는 길도 인간에게서 시작된다. 이 점에서 그의 해법은 놀랄 만큼 소박하다. ‘비켜섬’은 그저 한걸음 옆으로 물러나면 되는 것이다. 그것은 패배의 후퇴가 아니다. 신과 인간 사이를 막아버린 중간 벽을 인간의 스스로 옆으로 치우면 되는 일이다. 이런 행동이 부버가 주목하는 윤리이다. 부버는 책의 끝에서 이 윤리를 극대화하여 이렇게 말한다. “내일이라도 그 사이에 끼어든 것이 옆으로 물러설 수 있다.”(210쪽) 이 마지막 문장은 이 책을 읽는 이들에게 확신을 심어준다. 이 문장은 막연한 기대이거나 그저 의미 없이 읊조리는 낙관적 태도가 아니다. 신을 사유하는 철학하는 인간에게 당연히 요구되는 실천 윤리이다. 특히 마지막 단어 “물러설 수 있다.”라는 말은 가능성을 함의하면서도 할 수 있는 일을 하라는 책임을 촉구하는 예언자의 문구처럼 들린다.
비켜섬을 하나의 윤리로 제안하는 부버의 말에서 종교와 윤리의 관계가 더 명확해진다. 그는 도덕 교과서처럼 ‘선’을 종교의 목적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선’은 언제나 불확실성 속에서 흔들릴 수 있다고 인정한다. 그가 ‘윤리적인 것의 일시적인 중지 상태’라는 단락에서 다루는 문제의 틀은 바로 이것을 입증한다. 그에 의하면, 윤리의 문제 앞에서 인간에게는 분해만 가능하고, 그 결합은 신과의 ‘관계’ 속에서 가능하다. 다시 말해, 종교와 관련된 윤리는 인간이 혼자 구성할 수 있는 완결된 체계가 아니다. 인간만으로는 불완전하여 신과의 관계 속에서 재구축되는 삶의 형식이다. 여기서 데리다의 해체(차연)의 개념이 연상할 수 있다. 데리다에 의하면 해체는 분해와 재구축이다. 이 둘이 한 인간의 삶에서 가능해진다.
하지만 부버는 이 둘이 인간에서 분리되었다고 이해한다. 즉 분해는 인간에게 주어진 권리지만, 재구축은 종교적 영역에서 인간과 신의 ‘관계’에서만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버는 “하나님은 철저하게 윤리적인 것 이상을 요구하지 않으신다.”(192쪽)라는 말은 단순히 도덕의 최소주의가 아니다. ‘이것만은 지켜라’가 아니라 하나님(신)과의 관계에서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라는 선언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의 윤리를 잠시 중지하고 하나님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에 의한 인간의 윤리는 하나님과 ‘관계에서 더욱 견고하게 실현된다. 결국, 부버의 관점에서 종교와 윤리는 ‘관계’의 자리로 되돌아가야 한다. 윤리는 인간이 스스로 행할 수 있는 더 많은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요구(참조. 미가서 6:8)에 더 정확하게 응답하는 행동이다.
이처럼 부버에 따르면, 응답의 실천 윤리가 가능해지는 조건은 경청이다. 이 경청은 단순히 듣는다는 기능이 아니다. 왜냐하면, 신의 소리는 거의 침묵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신의 호소는 굉음이 아니라 자주 침묵에 가까운 최소 음량으로 들려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는 소음의 시대다. 하지만, 부버는 ‘침묵과 굉음을 현대 사회에서는 구분하기 어렵다’(193쪽)고 진단한다. 그런데 이 대목은, 단순한 시대 진단의 탄식이 아니다. 인간이 신의 음성을 듣기 위한 시대적 상황이 아예 파손되었다는 경고다. 오늘도 말은 끝없이 늘어나고 있고, 소리는 넘친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 ‘나-그것’을 위해서만 작동한다는 것이 부버의 한탄이다. 정작 ‘너’를 향한 감각은 희미해졌다는 아쉬움이다. 따라서 이 상황에서 복원될 윤리는 새로운 규정이 아니라, 그저 ‘듣는 마음’의 회복이다.
따라서 부버의 비켜섬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 나타남, 절대자의 나타남을 간파해 낼 수 있는 시력을 다시 일깨우는 길’이라고 해석한다(195쪽). 내가 읽기에 여기서 시력은 오히려 청력이다. 본다는 것은 곧 ‘듣는다’이다. 관찰의 능력은 관계의 능력이다. 다시 말해 나-너의 관계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나와 너의 관계에서 가능한 윤리는 인간이 스스로 철학을 놓아버림으로써 통해 신으로부터 오는 빛의 길을 열어주는 것이다. 이 비켜섬은 소극적 후퇴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 편에서는 적극적 윤리다. 신을 가리는 태도와 자리에서 물러남으로써, 신의 미세한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자리를 확보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존엄을 신 앞에서 스스로 내려놓는 ‘역설적 성육신(成肉神)’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의 길을 열어주고 인간이 신의 앞에서 비커설 때, ‘나-그것’의 대상화는 풀리고, ‘나-너’의 관계가 다시 가능해진다. 그래서 비켜섬은 신 앞에 서려는(coram Deo) 신-인간의 윤리이며, 이 윤리는 곧 신을 자유하게 하는, 신을 해방하는 실천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부버의 시대에 신의 현존은 철학과 사상으로 탈색되었지만, 그 복원은 사유의 증폭이 아니라 ‘나와 너,’ 인간과 신의 관계 회복으로 가능해진다. 요컨대 비켜섬은 후퇴가 아니라 경청을 가능하게 하는 적극적 윤리라는 말이다.
논거 2-4. 당대 담론 융과의 대결 구도—‘내면 환원’의 차단 논쟁
부버는 ‘비켜섬’을 종교에 기반한 책임 윤리로 설명했다. 이 점은 내가 그의 책을 서평 하는 주요 논지가 적합하다는 것을 입증한다. 부버에게 이 윤리는 경건한 태도가 아니다. ‘나-그것’의 틀에서 머물려는 인간의 본성을 반성하여 ‘나-너’의 관계로 이행하는 성찰이다. 부버는 자기주장을 강화하기 위해 몇몇의 철학자와 사상가를 직접 거론하며 대화한다. 따라서 이 책의 전환점을 <종교와 현대사상>으로 보는 것은 적절하다.
특히 당대 담론과의 대결에서 부버는 융과의 논쟁에 적극적이다. 이 책에서 부록까지 곁들인 것도 이를 방증한다. 이 책에서 부버는 ‘신의 일식’의 주원인이 무엇인가?를 물으면서 그 하나의 답으로 융의 사상을 거론하는 듯하다.
대결의 쟁점은 명료하다. 철학과 심리학(융의 사상)의 관점에서 융은 신을 “내면으로 환원”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신을 인간의 내면에 가두는 것이다. 이제 부버는 이 환원이 어떤 방식으로 신을 차단하는지 집요하게 관찰한다.
우선 융이 제시하는 종교의 정의를 비판한다. 융은 종교를 “의식의 저편… 영혼의 어두운 배경 속에서 일어나는 정신적 과정 과의 생생한 관계”로 규정한다(137쪽). 언뜻 보면, 부버는 이것이 종교에 대한 인간의 가장 진지한 정의처럼 들린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이 정의가, 신을 ‘영혼의 과정’으로 봉합할 위험을 품는다고 경고한다. 부버가 보기에 신은 “심리적인 내용(Inhalt)”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융의 관점에서 신은 더 이상 ‘너’가 아니라 ‘내 안에서 일어나는 무엇’이 되기 때문이다(138–140쪽).
부버가 융을 극렬하게 비판한 이유도 바로 이 점이다. 융이 신과 인간을 아우르는 종교를 관계가 아니라 기능으로 축소, 왜곡 이해했기 때문이다. 융의 관점에서 신은 관계적 대상이 아니라 그저 인간 내면에서 일어나는 어떤 심적 사물이 된다. 융의 관점에서 신은 죽지 않는다. 또한, 신은 인간 바깥에서 오지 않는다. 인간이 신을 경험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 신의 존재가 내면에만 경계를 두고 잠겨 있다는 의미다.
부버는 이런 융의 입장을 단순히 무신론으로 몰아가지 않는다. 오히려 더 정확한 표현을 꺼낸다. “인간이 초월적인 신을 부정하지 않고 그냥 차단할 뿐이다”(147쪽)라고 비판한다. 내가 주목하는 부버의 관점은 바로 이 말과 관련된다. 이 말속에서 ‘신의 일식’에 대한 핵심 원인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신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신의 길을 ‘차단’하는 것이다. 즉 신을 인간에게서 쫓아내는 것이 아니라, 신이 들어올 수 있는 문을 조용히 닫아버리는 것이다. 따라서 융의 주장인 내면화는 신의 부재, 신의 자기 은닉이 아니라 신을 인간 내면에 가두고 그가 말할 수 없게 만드는 행위에 초점을 둔다. 즉 인간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보거나 듣지 않도록 만들면 된다.
그렇다면, 융의 관점에서 차단은 어떤 형태로 작동하는가. 부버는 이것을 ‘현대인의 의식’이라는 개념 아래서 융이 인간의 ‘믿음’을 비판한다고 말한다(147쪽). 구체적으로 보자면, 이 믿음은 ‘자기-믿음’이라는 방식이다(147쪽). 인간이 자신을 믿는 믿음—자기 확신, 자기 해석, 자기 구원의 설계—이 신의 의의, 존재 이유를 밀쳐낸다. 신을 향한 문이 닫히는 것은 타자의 공격 때문이 아니라, 내가 내 안에서 신을 내면의 질서로 굳혀 버렸기 때문이다. 그 완성은 일견 평온하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관계의 죽음을 시사한다. 신이 ‘너’로서 나에게 다가올 여지를 막아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너에게 이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정리하면, 부버가 말하는 ‘신의 일식’의 원인은 더 분명해진다. 그것은 ‘가리움’이다. 더 구체적으로는 ‘내면화’다. 내면화는 신과 인간 사이에 끼어든 철학이며 사상이다. 그것으로 종교를 덮어버리는 인간의 자기 믿음이다. 그저 철학하는 인간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 철학을 신을 덮는 어둠으로 활용하는 인간이다. 융의 경우, 그 철학이나 사상을 인간의 내면으로 환원해서 신을 가리는 도구로 단단하게 사용한다. 신은 ‘나’의 체계에 갇혀 ‘그것’이 된다. 따라서 부버의 주장은 인간이 신을 내면화하는 것이 곧 신의 일식을 초래하며 ‘가리움’을 일으키는 구체적 원인으로 수렴한다. 인간의 ‘차단’으로 신은 이제 인간의 내면에 갇혔다.
한편, 이 책의 부록에 근거하면 부버가 융의 반박을 재반박하는 주장은 신을 ‘절대적인 인격’이라는 구체성’으로 재정의한다. 이 정의는 이 책이 스스로 설정한 신에 대한 최후 방어선이다. 신은 ‘내면의 기능’이 아니라 ‘너로 다가오는 인격적 실재’다. 신을 심리의 내용으로 환원하는 순간, 신은 더는 ‘너’로 다가올 수 없다. 그러므로 부버가 융을 비판하는 것은 신과 인간을 관계로 이해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융이 ‘무의식’에 근거하여 신을 인간의 관점에서 이해했다는 말을 신이 인간에게 오지 못하게 한다는 뉘앙스로 비판한다. 따라서 부버가 융을 비판하는 이런 맥락은 이 서평의 논지에 결정적이다. 그것은 곧, 책 전체의 핵심 문제설정인 ‘신의 일식’이 ‘신의 가리움’이라는 사실을 효과적으로 입증하기 때문이다.
정리하면, 종교와 윤리라는 관점에서 부버의 입장은 분명하다. 즉, 그가 말하는 ‘경청=비켜남’은 차단을 풀어내는 실제 관계적 실천윤리이다.
논거 2-5. 1930~1950 유럽 경험과 1950년대 미국 강연이라는 ‘장소성’의 논거화
—시대가 ‘가리움’을 어떻게 필연화하는가
이 서평의 논지인 ‘비켜섬’의 실천 윤리적 측면은 부버가 이 책의 기조를 이루는 강연을 1950년대 미국 대학에서 했다는 것과 더욱 긴밀해진다. 그는 ‘신의 일식’을 사유, 관념으로 설명하지 않고 실제 삶의 자리에서 말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부버는 1950년대 유럽과 미국 사회에서 일어난 다양한 철학 사조가 ‘신이 어둠에 갇혔다’라는 주제를 방증한다고 생각했음을 시사한다. 따라서 나의 서평은 이 책을 부버가 말하는 시대와 장소와 연관 지어 살피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1950년대 세계는 1, 2차 세계 전쟁의 후유증과 공산주의와 자유주의의 이념 갈등, 사회의 불안과 사상의 혼란이 걷잡을 수 없이 뒤섞였다. 이런 시대 상황은 ‘왜 신의 은닉을 말해야만 하는가. 왜 이 차단이라는 의식이 시대적으로 강력해졌는지를 설명할 수 있는 시대적 공간적 배경을 제공한다. 이런 현상은 융처럼 신은 인간의 내면으로 환원해야 한다는 주장이 불가피했다는 것을 함의한다. 물로 신이 여전히 우리 시대에 함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신의 현현하는 증거는 너무 미약했다. 인간의 불안이 해소되지 않는 이유다. 따라서 신은 더 쉽게 ‘그것’으로 바뀌어야 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신을 인간 안에 가두는 것으로 이어졌다. 세계는 시대의 사상마저도 빠르게 인간화되었다. 부버는 당대의 쉬운 결론을 거부한다. 그는 오히려 차단의 구조를 드러내고, 그 구조를 옆으로 물리라고 요청한다.
부버가 이 강의를 자기의 터전인 예루살렘을 떠나 미국에서 행했다는 것은 자신의 일상 공간을 떠나 새로운 장소로 향했다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사유의 공간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의 이동 자체가 곧 그 논지에 대한 명확한 논거라는 말이다. 대체로 글과 말의 시대와 장소는 단지 배경이 아니다. 특히 ‘숨어있음’이나 ‘숨김’보다 ‘가리움’이라는 주장에서 더욱 그렇다. 그것은 누가 어디서, 어떻게 왜 가렸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토포스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를 설명하는 형식이 되기도 한다. 결국, 부버가 말하는 ‘신의 일식’은 50년대 미국 사회에서 더욱 적실했다는 의미다. 관념의 유희가 아니라, 역사적 조건 속에서 현실화된 사건에 대한 명명이다. 미국사회는 냉전, 반공주의, 경제 성장과 함께 소비문화가 확산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특히 유대인들의 정체성 불안은 부버의 주장이 더욱 현실감 있게 다가왔다는 것이다.
이처럼 부버의 시대는 ‘신은 죽었다’라는 결론으로 쉽게 기울어졌다.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불안과는 사뭇 다른 경향이다. 이젠 시대는 부유해지고 안정되고 있었다. 하지만 인간 내면은 더욱 불안해졌다. 불안은 다양한 사유를 치료법으로 낳았고, 그 사유는 다시 불안을 먹고 자랐다. 실존의 불안은 철학과 사상을 압박했다. 어디선가 사유가 증식되었고, 무한히 다양하게 증식한 사상은 세계를 설명하는 뒤엉킨 ‘체계’를 양산했다. 이 사유의 증식은 결국 인간을 스스로 절대화하는데 이르렀다. 그때 인간이 붙든 것은 초월자 신이 아니라 현실의 신이었다. 인간의 겪는 ‘현실’이었고, ‘현실’을 주도하는 인간 자신이었다. 니체가 신의 대체물로 제시한 위버멘쉬(Übermensch)는 ‘신이 죽었다’는 사유를 토대로 창발 했다. 인간을 중심에 둔 현실 인식은 갈수록 단단해졌다. 그리하여 초월은 추상적이 되었고 결국 의미를 잃었다. 부버가 겨눈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히브리 신학에서도 1930년 말부터 발원한 폰 라트(G. von Rad)의 야훼의 구원신학도 점점 힘을 잃고 있었다. 인간이 지성으로 신의 의지를 간파하는 방법이 점점 더 힘을 얻었다. 현실(reality)이 “절대자”가 되는 순간이다. 그것은 신을 부정하지 않고도 신을 가리는 방식으로 작동했다. 신을 죽이지 않고 그저 차단하면 되었다. 이 차단이 반복되면서 시대를 주도할 때, 마침내 ‘신의 가리움’은 개인의 차원이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 역사적 상황이 되었다.
이점에서 니체 구절에 대한 부버의 반론이 바로 ‘신의 일식’이라 할 수 있다. 부버는 ‘신은 죽었다’를 하나의 철학 주장으로만 취급하지 않았다. 시대가 선택한 가장 손쉬운 결론으로 해석했다. 여기서 ‘죽었다’는 부재가 아니다. 더는 활동하지 못한다 ‘신의 무능’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권력’을 함의한다. 하지만, 부버의 입장에서 이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이 말들은 오히려 ‘신의 가리움’을 스스로 초래한 사유일 뿐이다. 그 시대, 유럽과 미국에서 니체의 문장이 널리 유통되었던 이유도 명확했다. 세계 곳곳에서 신은 더는 ‘너’로 마주해야 할 인격이 아니라, 인간 안에 가둬진 내면의 존재로 축소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신은 심리적 활동으로만 기능한다.
여기서 부버가 비판하는 핵심은 철학의 존재 의의를 폐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철학이 신을 대하듯이, 철학이 지향하는 방향을 전환했을 뿐이다. 신을 초월자로 받아들이는 사유에서 인간 내부로 굽어져 환원시킨 태도를 겨냥한 것이다. 초월된 실재가 무기력하게 ‘내 안의 의미’로만 남는 것이다. 신은 객관적 대상으로도, 관계적 너로도 남지 못한다. 신은 완전히 가려진 것이다. 이 상황에서도 부버가 말하는 ‘은닉’은 시대적 압력 속에서 ‘어둠 속에서 갇히고 가리움’을 의미한다. 나의 논지는 바로 이 시대적 배경에서 더욱 지지받는다. “신의 죽음”은 곧 신의 ‘가리움’을 극단화한 철학의 왜곡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버의 책을 읽는 방향은 이 “가리움”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에 대한 논증의 무게중심을 따라가야 한다는 것이 명확해진다. 그렇다면 장소성이 주는 결론은 선명해진다. ‘신의 가리움’은 역사적 조건 속에서 인간의 스스로 초래한 필연이다. 이제 이 논거는 자연스럽게 다음으로 이어진다. 즉 그 비켜섬의 윤리 행동이 부버의 논의에서 구체적으로 제시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논거 2-6. 다시 인격에 기반한 관계의 복구
부버는 신을 인간이 자기 내면에 “붙잡을 수 있는 대상”으로부터 분리해 낸다. 신에게는 인간의 사유로 획득할 수 있는 어떤 객관적 측면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은 관찰의 대상이 될 수 없고, 소유의 내용은 더더욱 될 수도 없다. 이런 상황에서 부버에게서 신과 마주하는 길은 하나다. 그 길은 오로지 ‘나-너’ 관계 안에서만 열린다. 이 명제는 단지 인식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신앙의 자세를 재배치하는 문장이다. 다시 말해 부버에게서 다시 ‘믿음’의 영역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신을 ‘그것’으로 다루는 순간, 신앙은 즉시 그 ‘믿음’의 방향을 잃는다. 신을 붙잡으려는 손이 신을 가리는 손이 되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부버의 주장은 오늘의 영성을 돌아보게 된다. 오늘의 기독교 영성은 자주, 모든 결론을 개인의 내부로만 수렴시키는 유혹을 품는다. 경건이 심리의 안정으로, 신앙이 자기 확신의 기술로, 신의 부르심이 ‘내가 나를 단단히 세우는 훈련’으로만 끝나버리는 순간들이 있다. 거듭 말하지만, 부버는 철학 그 자체를 폐기하지 않는다. 인간의 사유를 존중한다. 하지만 그가 겨누는 것은 더 명확하다. 철학이 지향하는 방향이 인간 안으로만 환원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인간, ‘나’를 더 정교하게 만드는 데서 멈출 때 신과 인간의 관계성은 깨진다. 신은 더는 ‘너’가 아니라 ‘내 경험을 지탱하는 장치’로 전락한다. 이로써 신앙은 관계가 아니라 내면의 구조물에 불과해진다. 내면은 깊어지지만 신의 ‘너’의 자리에서 밀려난다. 사라진다. 나도 모르게 내 안에서 ‘나-그것’이 은밀하게 승리한다. 따라서 부버의 관점에서 신은, 인간에게 말을 걸어오는 존재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부버가 “내일이라도 그 사이에 끼어든 것이 옆으로 물러설 수 있다.”라고 말하는 것은 1950년대의 실천 윤리를 가리키면서도 21세기, 2025년 12월도 포괄한다. 여기서 ‘끼어든 것’은 외부의 적이기 전에 나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시대를 불문하고 나의 방식이 신과 나를 나와 그것으로 만들 수 있다. 내가 신과 나 사이에 끼워 넣어버린 내 철학, 내 해석, 내 확신, 내 성취의 질서가 신을 가리운다.
부버의 견해가 오늘에도 유의미하게 전환한 것은 사유를 “더 많이 쌓는 것”이 아니라 그 사유를 잠시 멈추고 한쪽으로 “비켜서는 것”이다. 신을 내 쪽으로 끌어당기는 것이 아니라, 내가 신을 가린 자리에서 한 걸음 옆으로 물러서는 것이다. 그 물러섬이야말로 ‘나-너’가 다시 숨 쉬는 공간을 만든다. 신의 일식은 인간의 책임이지 신의 의도가 아니라는 것을 일깨운다. 내가 나를 중심으로 세계를 정렬하던 습관—나에게 유익한 것, 나에게 의미 있는 것, 나를 안정시키는 것—그 모든 사유의 도로에서 옆으로 비껴 날 때, 비로소 타자는 ‘그것’이 아니라 ‘너’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이처럼 신의 복귀는 나의 실천 윤리의 결실이다. 이 회복이 곧장 사회적 자리로 향한다. ‘나-너’로만 열리는 신의 현존을 믿는다면, 그 믿음은 현실의 타자에게까지 확장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대림절의 사회적 영성을 사유의 ‘확장’이라기보다, 관계의 원형으로 돌아가는 ‘복원’으로 재설정한다. ‘너’로 오시는 분을 기다린다는 말이 참이라면, 그 기다림은 필연적으로 내가 ‘너’를 대하는 방식 전체를 흔든다. 주변의 침묵, 가난한 이의 신음, 공동체의 파열이 내 영성의 바깥에 방치되는 순간, 우리는 이미 영성을 ‘나-그것’의 체계로 바꿔버린 셈이다. 그러니 부버에 따르면, 사회적 영성은 사회의 개혁이 아니라 ‘나-너’의 관계성 회복이다. 신이 오늘 길을 열어주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다시 나의 ‘검은 안식의 철학’을 소환한다. 검은 안식은 침묵을 찬양하는 미학이 아니다. 신을 내 말과 내 열심으로 소유하려는 충동에서 비켜서려는 훈련이다. 반복하는 연습이다. 신이 가둬진 세계에서는 신의 현존이 더 큰 목소리와 더 많은 설명이 필요해진다. 하지만 신의 현존은 확보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설명이 많아질수록 ‘끼어든 것’만 두꺼워진다.
그래서 검은 안식은 내 안의 소음만이 아니라, 내 사유가 만든 장벽을 스스로 의심하는 과정이다. 어둠에 들어가 신의 자리를 더듬는 것이다. 어둠 속에서는 전진하지 못한다, 멈칫하고 잠시 멈춰야 한다. 어둠이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두렵다. 서둘러 출구로 달려가지 못한다. 그 사이에 끼어든 것이 있다면 더 낭패다. 그것을 옆으로 물려 놓아야 한다. 보이지 않을 때 청각은 발단한다. 미세한 소리가 들릴 수 있다. 그 소리가 들릴 때 비로소 글을 쓴다. 글을 쓰는 그 멈춤이 윤리다.
이 흐름에서 부버가 융을 반박하며 남긴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계시된다”(214쪽)라는 의미가 두드러진다. 이것은 인간의 철학, 심리, 사상을 적극 옹호하는 문장처럼 들린다. 따라서 이 문장을 잘못 읽으면, 신을 내면에 가두는 문장이 된다. 하늘의 계시를 ‘자기 이해의 완성’으로만 쉽게 전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버의 문맥에서 이 문장은 오히려 경고다—인간은 초월적인 신을 부정하지 않고 “차단”할 뿐이라는 경고—와 결합되어 읽을 때 비로소 제 의미를 갖는다. 곧 “자기에게 계시됨”은 내가 신을 소유하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내가 신을 가릴 수도 있는 존재라는 사실이 드러난다는 뜻에 가깝다. 인간은 존엄하다. 자유롭게 선택하고 책임질 수 있다. 그러나 그 자유는 동시에 신의 빛 앞에 ‘나’를 세워버릴 자유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 문장은 인간의 내면을 스스로 성찰하라는 경고로 읽을 때, 오히려 격려가 된다. 인간의 계시는 인간에게서 비롯하지 않고 오히려 신의 은총으로 위임된 것이기 때문이다. 계시는 ‘나의 소유’가 아니다. 계시는 내 것이 아니라, 신이 나에게 허락한 신의 의지를 내 안에 새겨두는 사건이다. 결국, 책을 읽고 서평을 쓴다는 것은 그 책이 놓아준 사유의 길을 따라 책 너머로 나아가는 모험을 스스로 감당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