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서(越書),
나의 서평 쓰기(실제 4-4)

by 푸른킴

*이 글은 나의 서평 쓰기 과정을 풀어서 적어둔 것입니다. 글은 최종본이 아닙니다. 의견을 참고하여 계속 수정될 수 있습니다. <다음 글은 마지막으로 실제 서평입니다.>


3. 담론의 확장과 책 너머의 시선

이 책에서 다루는 신의 가리움이라는 담론은 유대인 학자인 레벤슨(Jon D. Levenson)의 ‘혼돈 잔존의 창조’와 연계될 수 있다. 레벤슨은 창조가 혼돈을 완전히 소거한 사건이 아니라, 잔존된 상태라고 해석한다. 질서 안에 남아 있는 비질서, 창조 이후에도 남아 있는 균열의 가능성을 인정한 것이다. 이 점은 부버의 ‘신의 일식’가 호응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신과 인간 사이의 온전한 관계를 방해하는 요소가 창조된 질서 안에서 계속 작동한다는 점에서, 레벤슨의 혼돈 잔존과 부버의 ‘관계적 차단’은 유기적으로 호응한다.


또한 아브라함 J, 헤셀의 안식론에 근거한 이른바 ‘검은 안식’의 철학이라는 주제와도 긴밀해진다. 세계의 안식은 그저 평안한 상태가 아니라, 어둠과 불안함, 갈등과 부조리 속에서 획득하는 평화다. 부버의 신의 일식과 검은 안식이라는 개념은 바로 이 점에서 연동한다.


나아가 부버가 신의 일식을 ‘나-너’의 관계로 치환할 때, 이 주제는 새로운 현실로 전향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히브리 성서 룻기에 한 개념인 ‘노크리(נָכְרִי, 이방인/외국인)’와 동학의 대동세계다. 노크리는 이방인 외국인을 의미한다. 이들이 개인인지 공동체인지는 논쟁이 있지만, 분명한 것은 공동체 내부에서 가장 쉽게 배제될 수 있는 존재라는 점이다. 룻기에서는 룻이라는 모압 여인이 자신을 규정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노크리는 히브리 사회에서 헤세드의 대상이다. 헤세드는 친절한, 배제 없는 환대이다. 만약 이들에게 이런 환대가 없다면 그는 곧 ‘그것’이 된다. 그러나 룻기에서 벌어지는 헤세드(언약적 사랑, 환대)는 노크리를 “대상”이 아니라 “너”로 다시 세운다. 부버의 언어로 말하자면, 궁극적 ‘너’가 가려진 시대에 인간은 지상의 ‘너’를 통해 관계 윤리의 성실성을 증명해야 한다. 노크리를 환대하는 행위는 내가 익숙한 관계의 테두리에서 한 걸음 비켜서서, 낯선 존재를 관계 안으로 들여오는 실천이다. 이것이 ‘비켜섬’의 가장 구체적인 윤리다. 그리고 그 윤리가 개인의 미담으로만 남지 않을 때, 정치신학으로 확장된다.


또한, 동학의 ‘대동세계(大同世界)’ 역시 신의 일식이 확장될 수 있는 지평을 제공한다. 특히 인내천(人乃天), 모든 인간의 내면이 하늘이다라는 말은 하늘이 인간 안에 갇힌다는 의미로 제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모든 인간이 하늘로 인격적 ‘관계’ 아래 놓인다는 것을 함의한다. 다시 말해 인간이 하늘을 지배하려는 태도에서 ‘비켜섬’으로 하늘과 인간 사이에 놓인 일식의 원인을 제거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중요한 점은, 동학이 부버의 사유를 “확장”한다는 사실이다. 부버가 ‘나-너’의 순간을 강조한다면, 대동세계는 그 순간들이 사회 구조로 정착하도록 요구한다. 신과 인간 사이를 가리는 모든 체제와 세계관을 물러나게 함으로써 인간성의 회복뿐만 아니라 사회적 변혁까지 일깨우기 때문이다.


4. 서평 쓰기의 결론

나는 이번 『신의 일식』 서평에서 훑어 읽기로 시작했다. 표지와 목차와 머리말을 훑고, 바다와 섬과 등대의 잔상을 붙잡아 책의 정동과 문제설정의 윤곽을 먼저 감지했다. 그 과정에서 내가 잠정적으로 세운 논지는 “은닉이 아니라 가리움”이었다.


그러나 훑어 읽기는 잔상을 남길뿐, 잔상은 쉽게 흩어진다. 그래서 나는 잔상을 붙잡기 위해, 다시 문장 속으로 내려가야 했다. 정동에서 논지로, 논지에서 논거로—책이 실제로 무엇을 말하는지, 무엇을 말하지 않는지, 그리고 무엇을 말할 수 없도록 만들어 버렸는지를 한 문장씩 더듬어 확인해야 했다.


이 전환이 서평의 두 번째 걸음이다. 훑어 읽기가 “보이는 것”을 붙잡는 일이라면, 세밀하게 읽기는 “사이에 낀 것”을 가려내는 일이다. 신이 숨은 것이 아니라, 신을 가리는 무엇이 생겨났다는 판단은 여기서 단정이 아니라 검증이 된다.


그리고 결국, 서평의 끝에서 남는 것은 요약이 아니라 태도다. 책이 말한 세계를 그대로 들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그 세계가 내게 열어준 한 줄의 길을 따라 내가 어디까지 걸어갈지 스스로 책임지는 것. 서평은 책을 닫는 행위가 아니라, 책이 열어 둔 문을 지나가는 행위다.


그래서 나는 읽기 4에서 곧바로 세밀하게 읽기로 전환했다. 내가 세운 논지가 내 감상으로 끝나지 않도록, 책이 실제로 싸우는 문장들을 불러와 맞대었다. ‘가리움’의 발생 구조, 내면 환원과 차단의 위험, ‘나-그것’과 ‘나-너’의 전환, 비켜섬과 경청이 단지 종교적 권면이 아니라 관계 윤리의 요청으로 서 있는 지점을 문장 단위로 대조해 확인했다. 나는 ‘느낌의 요약’이 아니라 ‘문장의 대조’를 택했고, 추론을 논거로 옮기고 논거를 다시 내 문체로 재작성하는 방식으로 서평의 형식을 확정했다. 이 방식이, 내가 오래 붙들어 온 글쓰기론과 일치한다.


내가 쓰려는 서평은 ‘기억의 윤리와 글쓰기’라는 주제를 포괄한다. 서평 쓰기는 잊힘이 너무 빨라진 시대에 대한 일종의 작은 저항이다. 서평 쓰기는 한 권의 책을 기억의 윤리로 저장하는 절차다. 이것은 책 읽기의 결과를 쉬운 망각에서 오랜 저항으로 이행하려는 나의 영성 훈련이다. 이는 구호가 아니라 형식이고, 형식은 시간이며, 시간은 몸에 각인되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기억을 말할 때, ‘견딤’을 생각한다. 타인의 고통을 언어로 함부로 결론 내리지 않고, 단정하지 않고, 대신 나의 증언으로 견뎌보는 일이다. 여기서 문학은 장식이 아니다. 이른바 기억의 존재론이 된다. 내가 쓴 여러 서평에서 클레어 키건의 사소함은 윤리의 크기를 바꾸고, 위화의 금지된 기억은 침묵의 제도를 찢어 낸다. 여기서 서평 쓰기는 나의 일방적 판단과 사유를 단절하는 신학으로 이행한다. 사실, 절망을 통과한 언어는 밝기만 한 문장이 아니다. 툭툭 끊어지는 문장이다. 역설적으로 그 끊김 속에서 오히려 희망의 문법이 살아남는다. 내가 박노해의 서평을 쓸 때, 엘리엇과 이사야의 언어를 묵상할 때, 내게 남은 것은, 삶의 해답이 아니었다.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리듬이었다. 나는 그 리듬을 아예 “단절가”라고 불렀다. 사유를 단절시키며 말해야 함과 말할 수 없음 사이에서 문장을 멈추게 하는 기술이 침묵과 여백의 윤리를 일깨운다. 이 윤리가 나의 서평 쓰기의 핵심 형식이다.


여기서 내가 “형식”이라고 부르는 것은 글의 장르가 아니다. 오히려 형식은 시간이 언어 안에 남긴 내 사유의 자국이다. 기억은 언제나 현재형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좋은 글은 과거를 박제하지 않고 미래를 거쳐 현재의 책임으로 나를 소환한다. 그래서 나는 느린 서사와 불가능한 날짜, 원환처럼 돌아오는 기억의 구조를 유지하려 힘쓴다. 그 구조는 결국 한 문장 한 문장으로 수렴한다. 나의 문장은 숱한 비문을 비껴가지 못한다. 기계는 비문을 용납하지 않는다 하지만, 신은 비문을 정문으로 읽어준다. 고치기 전이라도 수용한다. 이후 나는 그 비문을 수정할 기회를 얻는다. 나의 언어는 내가 겪어온 시간의 그릇이다. 글쓰기는 그 기억을 담은 틀이다. 그 기억의 그릇은 책상 위에서만 완성되지 않는다.


내가 쓰려는 글쓰기의 신학은 반드시 길로 내려서야 한다. 걷는 몸이 먼저 읽고, 언어가 뒤따르는 순례 같은 독서다. 기도는 그 순례의 가장 낮은 호흡이다. 서평 쓰기는 기도와 같다. 다른 이의 책을 통해 나의 글을 이어가는 읽고, 듣고, 쓰며, 걷는 기도다. 말 없는 말, 언어 이전의 언어가 문장의 바닥을 받칠 때에만, 글은 과잉에서 빠져나와 정확해진다. 나의 생의 장소는 이 모든 것을 나의 현실로 만든다. 몸이 기억하는 장소, 장소가 되살리는 시간, 그 장소성의 감각이 시간으로 되살아나는 것이다. 이처럼 글쓰기는 글의 윤리와 형식을 한꺼번에 붙들 때 제대로 재생한다.


나는 이 모든 작업을 “검은 안식”이라는 이름 아래 묶는다. 검은 안식은 빛이 사라진 자리에서 오히려 나와 타인을 품는 삶이다. 결론으로 서둘러 달려가 세계를 밝히는 대신, 어둠 곁에 함께 앉아 시간을 견디는 것. 그 멈춤 속에서 기억은 저항이 되고, 저항은 사랑으로 지속되는 분노가 되며, 그 지속이 공공언어로 번역될 때 애도는 개인의 감상에서 시민의 예언으로 이동한다. 아렌트와 카네티가 내게 남겨준 질문도 마찬가지다. 누가 기억을 지우고, 누가 기억을 말하지 못하게 하며, 누가 고통의 언어를 사유의 장식으로 바꿔버리는가. 나는 그 폭력에 맞서, 단정의 문장을 줄이고 증언의 문장을 늘리는 쪽을 선택하려 한다. 글은 세계를 구원하지 못할지 모른다. 그러나 글은 인간을 다시 세울 수 있다. 나는 그 “다시”를 믿는다.


그래서 이번 『신의 일식』 서평에서 내가 한 일—훑어 읽기의 잔상을 세밀한 읽기의 대조로 옮기고, 그 대조를 내 문체로 재작성한 일—은, 내 글쓰기론을 구체적으로 적용한 것이다. 나는 책을 읽으며 서평 쓰기로 나의 기억을 일깨운다. 그 기억이 내 것만 되지 않도록 경계하며 이 세계 속에서 이 책의 자리를 정확하게 정위 하려 한다. 그것은 곧 나의 위상을 확인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런 위치 조정을 통해—비켜서서 듣는 방식으로—나의 문장을 내 삶에 돋을새김 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 『신의 일식』 서평을, 한 권의 책을 정리하는 작업으로 끝내고 싶지 않다. 오히려 이 서평은 “신을 가리움”이라는 주제로 나의 세계를 조망하는 도구로 활용하고 싶다.


신의 가리움은 신의 무무소부부재(無無所不不在)를 뜻하지 않는다. 이 책이 집요하게 겨누는 것은 가리움은 인간에게는 모순의 위험이다. 인간이 신을 성찰하기 위해 세운 철학과 사상이 어느 순간 신을 대신해 버린 모순이다. 그 결과, 신의 현존이 현실에서 희미해졌다. 그러나 부버의 주장을 비평적으로 읽다 보면, 그가 결국 희망을 말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렇다면 결국, 문제는 더 많은 설명이 아니라, 더 정확한 자리 이동과 몸의 기울임이다. 즉, 비켜섬과 경청이다. 관계의 회복이다. 신을 대상화하는 ‘나-그것’의 습관에서 한 걸음 물러나, ‘나-너’의 관계 안에서만 만날 수 있는 그분의 현존을 다시 감각하는 일이다.


여기서 서평 쓰기의 의의가 분명해진다. 서평은 독서의 결과물이 아니라 책 읽기의 실천 윤리다. 훑어 읽기가 남겨 준 잔상이 내 감상으로 끝나지 않도록, 책의 흐름을 구체적으로 뒤따라간다. 이 과정은 단지 비평 기술을 적용하는 것이 아니다. 읽은 것을 쓰는 순간, 그것은 그저 ‘설명’이 아니다.


부버의 이 책은 너무 빨리 결론으로 달려가지 않는 것이 좋다. 잔상을 붙잡으면 좋겠다. 또한, 표지의 색, 목차의 배열, 머리말의 숨결, 어떤 문장이 내 안에 남기는 어둠의 윤곽을 가만히 살펴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


거기서 멈추지 말고 잔상을 문장으로 만들어보자. 책의 저자가 실제로 분투하는 대목을 찾아, 그 문장들과 나의 문장을 맞대어 적어보자. 나의 경우, ‘신의 은닉’을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기 전에, ‘은닉’이라는 말의 의미를 더 비판적으로 분석해 보았다. ‘신의 은닉’이 “신은 내면이다”라고 쉽게 결론 내리는 철학의 사유, ‘신은 없다’라고 반박하는 부버의 견해를 잘 따라가려 했다. 그리하여 그 말이 ‘부재’가 아니라 ‘차단’이라는 것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부버가 제안하는 대로 나의 사유가 세워 둔 신과 나 사이에 장벽, 곧 나 자신을 한 걸음 비켜 세워보았다. 이 비켜섬이야말로 오늘 나의 윤리이고, 오늘 나의 영성이며, 오늘 나의 글쓰기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책의 읽는 순서도 이렇게 제안할 수 있다. 우선 서문과 융에 대한 반박문을 읽는다. 이어서 목차와 머리말을 읽는다. 다음으로 종교와 현실-철학-과 신에 대한 사랑의 관점을 읽는다. 내가 보기에 이 사랑의 관점이 이 글의 전환점이라 할 수 있다. 이어서 종교와 현대사상을 천천히 읽는다. 부버가 융에 대해 무엇을 비판하는지 잘 살펴야 한다. 끝으로 종교와 윤리, 윤리적인 것의 일시중지를 읽는다. 이것을 읽고 난 뒤, 결론적으로 신과 인간의 정신을 세심하게 읽는다.


이런 읽기 순서의 가장 큰 장점은 부버의 사유를 순차적으로 따라가는 데 유익하다는 점이다. 이렇게 한다면, 부버가 철학 속에서 신의 사랑이라는 정념으로 독자를 이끌려한다는 것을 좀 더 잘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이라는 관념은 신의 현존이 희미해지는 시대일수록, 우리에게 더욱 필요하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주관적 정념은 요란한 주장이 아니라 인간 내면에서 조용하게 흘러나오는 본성적 사유다. 이 정서가 큰 목소리보다 더 깊은 경청을 이끈다.


나는 서평을 쓸 때 나의 사유를 적극 반영하려 한다. 저자의 사유를 철저히 뒤따라가되 그것을 요약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나의 사유를 저자의 주장에 실어 확장하려 한다. 이 책 ‘신의 은닉’도 마찬가지다. 나는 서평에서 책을 요약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으려 한다. 나아가 서평의 결론으로 나의 사유가 얼마나 변환되었는지를 확인한다. 예를 들어 신의 일식에서는 나의 사유가 신을 가리는 자리는 어디인지 발견하려 한다. 나의 언어가 타자를 대상화하는 습관을 멈추지 못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무엇보다, ‘나-너’의 관계 안에서만 열리는 그 현존의 문 앞에서, 내가 스스로 비켜서려 한다. 나의 글은 세계를 구원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 책 ‘신의 은닉’을 통해 나는 현대 신학과 철학, 사상의 다양성을 온전히 이해하는 데 하나의 경첩 기능과 전환축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부버의 견해를 따라 나의 자리에서 조금 비켜서는 한 문장을 쓰려한다. 이 문장이 나를 다시 세우고, 나와 너, 즉 나와 신, 나와 세계의 관계를 다시 열어 줄 것이라 기대한다. 그 결과, 희미해진 신의 현존의 색조를 아주 조금은 짙게 유채색으로 되돌려 놓을 수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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