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신의 일식』

[책으로 책너머를 읽다] M. 부버. 손성현 역. 복있는 사람, 2025

by 푸른킴
"변하는 세계에서 한 걸음 비켜서는 철학”


얼마 전 뜻밖의 폭설로 길이 뒤얽힌 일이 있었다. 눈이 오면 세계는 급변하고, 인간은 그 앞에서 우왕좌왕한다. 그러나 눈길의 혼란보다 더 심각한 것은 인간의 세계다. 진리는 어그러지고, 정의와 공의는 왜곡되며, 그 틈에 회의감이 밀려든다. 신(神)이 보증해야 할 질서가 침묵 속에 방치되는 듯한 현실 앞에서 사람들은 깊은 탄식을 피하지 못한다. 그 탄식은 오랫동안 ‘신’을 이해하려는 언어로 말해져 왔고, 급기야 19세기 이후 “신은 없다”라는 부정과 “숨어 있다. 보이지 않는다”라는 부재로 갈라져 흐르며 지금도 물길을 달리한다.


1951년, 인간 중심의 사상이 큰 물결로 출렁이던 때 마르틴 부버는 예루살렘을 떠나 미국의 여러 대학에서 강연했다. 이후 그 원고를 엮어『신의 일식: 종교와 철학 사이의 관계에 대한 연구』(Gottesfinsternis)(1953)를 내놓았다. 이 책에서 먼저 눈에 띈 것은 표지였다. 샤갈의 <창조>(1960)가 회색빛 음영으로 실려 있고, 책의 아래쪽 노란 바탕 위에는 사선으로 세계를 겨누는 한 사람의 눈이 그려져 있다. 원작의 푸른 기조에 견주면 이 표지는 ‘탈색’에 가깝다. 나는 이 탈색이 부버가 붙든 시대 감각—빛이 가려진 세계의 색—을 독자의 피부에 먼저 닿게 하는 장치라고 읽는다.


원제 Gottesfinsternis는 ‘일식(日蝕)’으로 옮겨졌지만, 번역자의 해설(222~238쪽)과 어휘의 결을 따라가면 오히려 ‘뚫기 어려운 어둠’(Dunkelheit)에 가깝다. 부버에게 일식은 신의 부재가 아니다. 신이 ‘그것’으로 대상화되어 갇힌 결과다. 곧 ‘신의 가리움’에 가깝다. 이 점에서 이 책의 질문은 하나로 모인다. 신이 없어서 어두운가, 신을 향한 길이 막혀서 어두운가.


이 물음은 책의 첫머리부터 뚜렷하다. 부버는 ‘하나님은 가설이다’라는 말과 ‘초월을 인간 언어에 담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끌어와, 1930~50년대의 신 존재 의심과 신 부재 논증을 정면으로 겨냥한다. 결론은 분명하다. 신의 일식은 부재가 아니라 가리움이며, 그 가리움의 벽은 인간이 쌓는다. 재료는 셋이다. 신을 설명 가능한 대상으로 만들려는 지성의 습관, 신을 심리 구조로 환원해 내면에 가두려는 사상, 불확실성을 견디지 못해 자기 확신으로 관계를 차단하는 태도다. 이 셋이 겹치는 자리에서 신은 ‘관계적으로’ 일식 된다.


책의 구성도 이 변증을 따라 선명하다. 중심축은 현대 사상과의 논증이며, 융 비판이 그 한가운데 있다. 부버가 겨누는 지점은 분명하다. 신을 ‘내면의 기호’로 환원하는 순간 신의 초월성과 타자성—곧 “나를 부르는 너”—이 약화하고, 인간은 응답의 존재에서 자기 해석의 존재로 축소된다는 것이다. 부록 「융의 반론에 대한 응답」은 그 표적을 더 또렷하게 드러낸다. 또한 「신을 향한 사랑과 신에 대한 관념」은 논증을 관계의 자리로 되돌려 세우고, 마지막 글 「신 그리고 인간의 정신」은 신을 설명의 대상이 아니라 ‘만남’의 사건으로 돌려놓는다.


요컨대 부버는 “신은 죽었다”와 “신은 인간의 내면”이라는 관념이 신을 ‘너’가 아니라 ‘그것’으로 환원한다고 비판한다. 인간은 알 수 없음 앞에서 자기 확신으로 초월을 차단하고, 그 결과 신의 일식은 부재가 아니라 인간 사유가 만들어낸 ‘가리움’이 된다. 그는 철학을 폐기하지 않되, 철학이 ‘너’를 잃고 확신만 증식할 때 지성이 벽이 될 수 있음을 경고하며, 그 벽을 거두는 길로 ‘비켜섬’을 제시한다.


비켜섬은 실천 윤리다. 관계의 통로를 막는 벽—설명, 환원, 자기 확신—을 잠시 옆으로 밀어내는 결단이다. 부버가 마지막에 남긴 “내일이라도 그 사이에 끼어든 것이 물러설 수 있다”(210쪽)라는 말은, 인간이 세운 벽이 절대적일 수 없음을 가리킨다. 그 물러섬이 가능하다면, 인간을 가리던 어둠은 옅어지고, 보이지 않는 듯하던 신은 다시 ‘너’의 이름으로 다가온다.


한편 부버의 주장은 다양한 사유 속에서 더 또렷해진다. ‘가리움’은 레벤슨의 ‘혼돈 잔존의 창조’와 맞물리고, ‘비켜섬’은 헤셀의 안식 윤리로, ‘나-너’는 룻기의 환대 윤리로 확장된다. 창조질서 안에 남은 무질서는 부버의 언어로 ‘관계의 어그러짐’, 곧 나와 너의 통로를 가로막는 끼어듦이다. 안식은 멈춤이 아니라, 인간이 점유한 시간과 확신을 잠시 비켜 두고 어둠 속에서도 길을 열어 샬롬을 길어 올리는 시공간이 된다. 룻기의 ‘노크리(이방인)’는 가장 쉽게 ‘그것’으로 환원되지만, 헤세드—배제 없는 환대—는 그를 ‘너’로 다시 세운다. 그 순간 ‘비켜섬’은 개인의 수양을 넘어, 배제의 구조에 맞서는 관계의 윤리로 구체화된다. 비켜섬이 사적 덕목에 머물 위험이 남아 있더라도, 사회적 실천으로 번역될 여지는 여기서 분명해진다. 그러므로 이 책은 이해 불가한 현실을 해석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해석을 ‘비켜섬’이라는 실천으로 이끄는 실천철학서라 할 수 있다. 다만 융의 반론이 충분히 펼쳐지지 않아 부버의 논증이 다소 단선적으로 읽힐 수는 있다. 이 대목은 번역자의 해설을 함께 참고하면 보완된다.


정리하면, 일식 해소법으로서 ‘비켜섬’은 21세기의 실천 윤리로 더욱 절실하다. 가리움은 관계를 단절한다. 일식이 신의 부재나 자기 은닉이 아니라 인간이 초래한 사건이라면, 결자해지도 인간에게서 시작되어야 한다. 신로(神路)를 조금 비켜주자. 탈색된 세계에서 ‘그것’을 ‘너’로 다시 불러주자. 그 순간 관계는 복원되고, 어둠은 옅어지며, 인간이 만든 두꺼운 가리움에 균열이 난다. 이 겨울, 부버의 책은 그 온화한 변화를 조용히, 그러나 멈추지 않게 삶으로 흘러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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