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호 데크
天地, 검고 노란
스미는 빛
혼돈과 공허
터
엉
균열―
여전히
너의 세계
배경
지방 출장이 잦아 좋아하는 캠핑이 늘 언감생심인 친척이 있다. 그분이 지난가을에 겨울용 텐트를 하나 샀는데, 그동안 마땅한 여유가 없어 아쉬웠다 한다. 그래서 말인데, 혹시 캠핑할 예정이면, 같이 써보면 좋겠다는 마음을 전해왔다. 나는 그렇겠다고 했다. 가져온 텐트는 보기보다 우람했다. 난로 하나를 가운데 두니 온기가 가득했다. 텐트 설치한 날, 새벽부터 비가 내렸다. 겨울비다. 술비라고도 하는 비가 보슬보슬 내렸다. 나는 이슬비라고 생각했다. 그날따라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 홀로 덩그러니 내리는 비를 따라 고요한 안식을 누렸다. 텐트 안에 백열등 닮은 감성등을 켜두었다. 잠시 밖에 나와보니 칠흑같이 어두운 사위에 텐트 기둥과 모서리를 따라 어딘가로 빛이 스며드는 것 같았다.
사진
빛이 희미해서 사진 찍기는 그리 좋지 않았다. 그래도 텐트를 중심으로 새어 나오는 불빛을 담아보려 했다. 사진 한가운데 텐트가 있고, 그 주위로 칠흑 같은 밤, 그 어둠(배경), 그리고 텐트 안에서 새어 나오는 따뜻한 오렌지빛(피사체)이 적절하게 대비되어 좋았다. 텐트는 바람으로 세우는 것이었는데, 실내에 있으면 마치 둥근 나무 기둥이 떠받치는 작은 한옥 같다. 그런데 텐트 밖으로 나오니 그 작은 집이 마치 암흑 같은 우주(宇宙)의 둥둥 떠 있는 어떤 물체 같기도 했다. 어둠 속에 홀로 세워진 텐트가 마치 광활한 우주 한복판에 떠 있는 행성 같다는 상상이 일었다. 의도적이진 않았지만, 주변 나무와 숲은 모두 검음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남은 것은 텐트의 윤곽과 번지는 빛 덩어리 정도였다. ‘캠핑장’이라는 현실이 관념 속 ‘우주’로 전환되었다.
찍은 사진을 몇 번 들여다보니 사진의 핵심은 어둠이 아니라 오히려 검은 세계에서도 오롯한 빛이었다. 프레임 대부분을 채우는 어둠은 오히려 비워진 공간처럼 보였다. 한가운데 빛은 화려하지 않은 채 텐트의 틈을 빠져나와 어둠 속으로 스미고 있다. 텐트는 언제나 임시로 세워진 것이다. 밤은 늘 거기에 있는 것이기에 이 임시 거주지는 나그네처럼 머무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 사진에서는 어둠보다 빛을 머금은 텐트가 더 주도하는 느낌이 잘 배어있다. 빛은 환하지 않다. 번쩍이지 않고, 막 퍼지지도 않는다. 그저 스며든다. 이 사진은 밝은 세계를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어둠이 여전히 지배하는 상태에서, 빛이 버티는 장면을 붙박이처럼 고정한다. 우주(cosmos)는 완성된 질서가 아니다. 거대한 어둠, 미미한 빛은 불균형인 채로 서로의 어깨를 기대며 유영한다.
시어
나는, 디카시는 제목이 언제나 최후의 정점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처음부터 정해진 채로 쓰이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따라서 제목에는 전개되는 시어들이 모두 빨려 들어가는 언어의 블랙홀 기능이 담겨야 한다. 내가 ‘작은 우주’라고 정한 것에서 핵심은 ‘작다’라는 형용사다. 시어들은 사진과 상호 긴밀해야 하지만, 결국 시어는 그 자체로 하나의 시여야 한다. 역으로 말하면, 시어를 보면 사진이 그려질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를 고대 사람들은 에크프라시스(ekphrasis)라고 설명했다. 나의 시어들도 늘 그렇게 되길 기대한다. 하지만 여전히 뭔가 아쉽긴 하다.
42호 데크/天地, 검고 노란/스미는 빛: 1연은 세 가지 정보를 담았다. 하나는 캠핑장 데크 번호다. 나는 주로 42번 데크를 이용한다. 여기서 42번을 42호로 쓴 것은 이것이 마치 우주를 떠도는 어떤 항체 같다고 생각해서다. 소행성 42호처럼 데크도 우주의 어느 행성 닮았다. ‘天地’는 하늘과 땅이면서 우주를 포괄한다. 중국 소학생 교본인 ‘천자문’의 첫 네 글자 중 앞 두 글자다. 동시에 고대 히브리인들의 책, <브레쉬트>의 첫 구절의 핵심이기도 하다. <핫샤마임 바 하아레츠=그 하늘 그리고 그 땅>은 거대한 우주를 문학 속으로 끌어들인 기술적 표현이다. 콤마와 함께 이어지는 ‘검고 노란’은 캠핑장 42번 데크를 둘러싼 색을 이미지화한 것이다. 텐트 주변의 검은색, 텐트와 그 안의 빛은 노란색에 가깝다. 이 구절을 한자어로 바꾸면, ‘현황(玄黃)’이다. 여기서 검다는 ‘현’은 단순한 검음이 아니다. 짙은 노랑, 거의 붉은색에 가까운 색의 혼합이며, 그것마저도 어스름하게 번지는 색조를 반영한다. 마치 동녘 빛과 같고, 새벽 어름, 일몰 후 수평선 뒤로 번져 햇빛과 밤이 만나서 만드는 잔영과 닮은 색이다. 텐트에서 번지는 빛은 직사광선이 아니라 번지고 스미는 세계, 우주의 색이다. 하여 나는 그것을 ‘스미는 빛’이라고 적었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사진 속 텐트는 우주의 색을 자기 밖으로 흘려보내고 있다는 것이다.
혼돈과 공허/터/엉: 2연은 빛이 스며 나와 검음 속에 떨어져 빠져드는 것을 청각적으로 그렸다. 혼돈과 공허는 ‘천지현황(天地玄黃)’을 모양으로 묘사한 것이다. 뒤섞여있고, 빈 듯한 공간이다. 우주의 최초가 그랬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 표현은 물리적으로 세계의 첫 모습을 그려낸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주의 종말을 끌어다 미리 보여주려는 문학적 장치였을 것이다. 왜 종말의 장치인가? 우리는 존재했던 과거로 돌아가 그것을 목격할 수는 없지만, 다가올 세계를 그려볼 수는 있기 때문이다. 그 어둠이라는 존재를 미리 알아보는 것은 ‘소리’로 가능하다. 그리하여 공간이 얼마나 깊은지, 그 어둠이 얼마나 짙었는지를 묘사하기 위해 나는 ‘텅’이라는 소리를 일부러 늘려 행갈이를 했다. ‘터 엉―’ 그것은 공간을 측정하는 가장 원시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울림과 진동, 그 율려(律呂)로 우주라는 공간은 문학과 철학, 미학으로 측정될 수 있다. 결국, 어둠 속 텐트에서 흐르는 빛이 떨어진 검음은 깊고 넓은 세계다.
균열―/여전히//너의 세계: 그런데 그 떨어지는 소리는 결국 검은 세계에 틈을 만들었다. 스미는 것이 결국 갈라짐을 만들고, 그 틈으로 빛은 더 강하게 밀려들어 간다. 어둠은 스스로 깨지지 않는다. 아무리 크고 깊은 어둠이라도, 혼돈과 공허라도, 천지 현황이라도 빛이 끝내 만들어낸 틈은 어둠에 균열을 일으킨다. 그리하여 어둠마저도 빛을 머금고, 그 머금은 빛으로 어둠은 자신도 모르게 절망 안에 희망을 품게 된다. 희망은 절망의 반대가 아니라, 절망이 절망이지 않다는 반(反) 절망이다. 그 균열은 반복되고, 그것이 너의 지금-여기의 세계이다. 작은 텐트 안, 깊고 붉은 밤 안이다.
의도
이 디카시의 의도는 우선 제목에 담겨 있다. ‘작은 우주’라는 제목에 사진과 모든 시어가 빨려 들어가는 것이 나의 의도였다. 이 우주는 텐트 하나 차지하는 세계다. 거대한 질서가 아니다. 창조의 완결은 더더욱 아니다. 그저 한 사람의 밤, 한 장소의 숨, 하나의 임시 거처다. 비가 내려 불편한 세계다. 그러나 나는 저 광활한 우주가 그저 규모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밀도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어둠과 빛의 관계 말이다. 42호 데크는 이 관계를 유지하는 우주 항성에 대한 명명이다. 익명성이다. 그러나 동시에 상징적 장소가 아니라, 실재하는 좌표다. ‘검고 노란’은 대비가 아니라 공존이다. 빛은 어둠을 밀어내지 않고, 어둠 속에 남아 있다.
이처럼 천지(天地)는 한 단어다. 분리된 질서가 아니라 혼합된 상태로 유지되는 세계 너머 세계다. 거기는 혼돈과 공허가 주도한다. 누구도 어둠과 빛이 뒤섞인 크기와 혼합의 정도를 알 수 없다. 하나의 방법은 소리를 만들어 듣는 것이다. ‘터 엉’ 소리 내어 읽어보면,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있다. 나는 의미를 설명하지 않고 발음으로 세계를 재현하고 싶었다. 특히 ‘토후 바보후(히브리어 tohu wabohu)’라는 유명한 개념을 나의 시안에서 새롭게 자리매김해 주고 싶었다. 혼돈 역시 개념이 아니라 몸의 울림으로 전달하고 싶었다는 말이다. ‘균열’ 끝에 이어 붙인 대시(—)는 이 스며들어 떨어지는 소리가 만들어낸 결과가 계속된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장치다. 이어지는 ‘여전히’는 그런 나의 의도를 반영한다. 이 균열은 한 번의 사건이 아니다. 이미 지나간 과거도, 곧 해결될 미래도 아니다. 지속 상태 그대로다.
그렇다면, 너의 세계는 어둠과 빛의 공존일 뿐, 다른 어떤 것도 아니다. 어둠이 더 지배하는 빛의 세계다. 세계 모든 ‘타자’는 어둠이 지배하는 빛의 세계에서 끝없이 일어나는 균열을 뒤따르면 빛의 길로 걷고 있다. 이것이 내가 제목에 담은 ‘작은 우주’의 의미다. 작다는 곧 한 사람의 길을 의미한다.
나의 의도는 빛을 어둠보다 높이 두겠다는 것이 아니다. 질서를 혼돈보다 앞세우려는 것이 아니다. 그저 혼돈이 유지되는 자리에서, 최소한으로도 남아 있는 그 빛을 말하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디카시는 희망의 시가 아니라, 삶을 비쳐내는 빛의 기록이다. ‘검은 안식’이다. 이미와 아직 사이를 순환하는 삶의 길을 묘사한다. 대림절의 의미와도 일맥상통한다.
또한, 동양의 ‘천지현황(天地玄黃)’과 서양의 과학적 우주관 사이에 고대 히브리인들의 세계 이해가 경계처럼 세워져 있다는 것도 말하고 싶었다. 텐트 밖의 검은 밤과 안쪽의 노란 불빛은 마치 ‘하늘과 땅’의 조화처럼, 검음과 노랑, 붉음의 색들의 어울림으로 만들어낸 율려, 리듬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결국, 우주는 거창한 어딘가가 아니다. 작은 사람, 미물, 그저 한 개인의 내면으로부터 그의 몸이 움직이는 삶의 공간 전부를 아우른다.
총평
다행히 이 디카시에서 시어와 사진, 특히 제목이 잘 어우러진 것 같다. 무엇보다 ‘세상은 여전히 어둡다’라는 진술을 지나치게 무겁게 표현하지 않았다는 것이 좋다. 세계는 어둠이 지배한다. 그러나 나는 이 디카시에서 일부러 ‘그런데도’라는 말을 절제했다. 오히려 균열을 여전히 인정하고자 했다. 어둠이 절대적이고 빛은 소량이지만, 균열은 일어난다는 것을 시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그 틈은 처음부터 비어 있지 않기에 빛은 끊임없이 어둠을 두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 디카시에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삶의 윤리도 이것이다. 빛을 과시하지 않고, 고통을 미화하지 않으며, 미완의 세계를 존중하며 오늘 여기에서 주어진 ‘죽음의 계곡’ 같은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것이다. 이 점이 이 시에 어느 정도 반영된 듯해서 만족한다.
누구나 한 번쯤 생각했을 텐데, 캠핑장의 밤, 비 내리는 고즈넉한 분위기에 세워진 텐트는 늘 아름답다. 하지만, 그런 감상이 곧바로 삶에 균열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캠핑은 현대인에게 익숙하면서도 의미 있는 여가, 하나의 삶의 놀이로 정착했다. 고대 누군가는 매일매일 임시 거주지 같은 곳에서 자기 삶을 살아야 했을 텐데 그것 역시 당대를 지나가는 삶의 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신학은 이런 땅들의 이야기에서 모두 발원했다. 그런데 누군가는 그 일상을 가볍게 흘려보내지 않고, 자기 사유에 담아 마침내 신화적 층위로 격상시킨 것이다. 그것이 천자문이고, 양자역학이다. 이들은 모두 그 위대한 세계 질서 원리를 찾아가는 길을 땅의 현상으로부터 관찰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틈에 고대 히브리인들의 신학적 문학이 자리한다.
나는 이번 디카시에서 이런 사유의 결정체를 상상하며 그려내려 했고, 어느 정도 도달했다. 고대 철학은 땅을 넘어 하늘의 이데아를 찾아 나섰지만, 결국, 모든 철학은 땅의 질서를 더욱 미분하여 관찰하는 것에 수렴해 간다. 내가 조금씩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데아에서 멀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제 나의 철학은 자기 날개를 달고, 발아래 한 줌 흙을 디딘 채 거대한 우주의 질서를 사유하는 길로 들어선다. 모든 것을 눈으로 보아야만 수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보지 않고서도 실재를 구현하는 일이야말로 내가 구현하려는 검은 안식의 철학이다.
정리하면, 이 디카시에서 나는 희망을 말하지 않는 방식으로 희망을 남기는 절제로 잘 유지하려는 의도를 어느 정도 성취했다. 또한, 거대 우주의 창조주를 믿는 신앙의 우월감을 떠받치는 힘은 하찮아 보이는 작은 삶, 그 ‘마이크로 코스모스(미소우주)’에 대한 몸 기울임이라는 것도 나름, 제대로 설정했다. 크고 높은 것, 그러나 작고 낮은 것을 아우르는 창조주의 마음에 부합하려는 나의 기대도 생각보다 잘 반영된 것 같다.
이번 디카시도 역시 미물 같은 작품이다. 짧은 시행과 여백의 활용, 시어가 전부다. 그 와중에 특히 이번에는 사진 속 어둠과 공명하며, 나 스스로 자신의 내면세계를 들여다보게 만드는 힘을 일깨우는 데 어느 정도 성공했다는 점에서 자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