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켈리 라티모어(Kelly Latimore)의 〈Tent City Nativity〉(2022)에 대한 이해ㅡ
대림절에도 여전한 불편한 현실
세계 여러 곳에 난민촌이 있다 한다. 그중 두 해 전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를 다녀온 지인의 이야기와 최근 캄보디아 태국 국경지대에서 일어나 현재도 진행 중인 분쟁을 현장에서 직접 경험하는 분의 소식에 마음이 착잡하다. 내 몸으로 그 현장에 가보지 못하고, 그저 평안하기를 구하는 마음이 가볍진 않다. 여전히 세계는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분쟁은 뒤에서 조작하는 자가 책임을 지거나 피해를 입는 것이 아니라 삶의 최전선에 머무는 이들이 감내해야만 하는 인간에 의한 인간의 형벌이다. 세계 어디에도 그 분쟁에 스스로 책임지는 이가 없다는 것을 돌이켜보면, 어쩌면, 이 일 뒤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신, 어떤 악의 근원이 도사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 악의 기원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세계에서 내가 따라가야 할 ‘시선의 자세’를 물으려 한다. 해마다 대림절에 반복되는 ‘멀리서 안타까워하는 동정심’이 아니라 ‘내 발아래로 끌어내리는 시선’을 구체적으로 배워 행동하고 싶다. 나는 이 ‘대시절’에 일어나야 할 나의 행동을 좀 더 실천미학으로 재정의하고 싶다.
텐트촌에서 탄생한 그리스도: 〈Tent City Nativity〉를 위한 기도문-장소–손–빛
마침, 팔레스타인을 다녀온 지인이 어느 날, 자신의 SNS에 사진 한 장을 공유했다. 나중에 그것이 성화 아이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여 그 그림들이 공유된 홈페이지에 접속해 보았는데 거기에는 성탄절을 소재로 한 여러 그림이 공개되어 있었다. 그 그림 중 하나가 오늘 내가 읽으려는 “Tent City Nativity”이다. 즉 ‘텐트촌에서 태어난 예수’(2022)이다. 이 작품은 기독교 성화 아이콘 작가인 캘리 라티모어(Kelly Latimore, 1986~)가 검은 예수상을 그려낸 것이다. 그의 작품은 유화의 기풍을 따르면서도, 선을 따라 인물이나 정물을 그린 뒤에 색을 채워 넣은 것으로 보인다. 다루는 소재는 사회, 정치, 이념을 적극 반영한 것들이다. 신학적 요소가 반영되어 있기도 하다.
〈Tent City Nativity〉(2022)
출처:https://kellylatimoreicons.com/products/tent-city-nativity?variant=45055478005959
그런데 이번에 다시 보게 된 그의 작품에는 한 편의 시가 나란히 소개되어 있다. 본래 ‘기도문(prayer)’이라고 소개되어 있으니 아마도 작품에 어울린 기도를 담은 것인 듯하다. 작가는 캐머론 벨름(Cameron Bellm)이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그녀는 주로 영성을 고양하는 시인이다.
이 시의 전문은 아래와 같다.
“Jesus was born in a makeshift shelter, too—
예수가 태어났습니다, 얼기설기 짠 듯한 피난처에서도-
A place not really meant for human dwelling—
사람이 살 수 없을 것 같은 그곳에서
And yet it was there that he met us, in the lowliest refuge.
하지만, 그는 그곳에서 우리를 만나 주었습니다. 그 가장 낮은 은신처에서 말입니다.
Two thousand years later, it’s good to remember
이천 년이 지났습니다. 기억해 두어야 합니다.
That Christ is still being born, here and now,
그리스도는 아직도 지금-여기에서 태어나는 중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Most especially in places we’d rather not go,
심지어 우리가 가려고 하지 않는 그 특별한 장소에서 말입니다.
Places from which we’d rather look away.
심지어 우리가 거들떠보지도 않는 곳에서 말입니다.
God of illumination and incarnation,
빛나는 형체이면서 성육신한 하나님!
Open not only our eyes, but our hearts,
우리의 눈을 열어주시고 뿐만 아니라 마음마저도.
That we may open, too, our hands
또한, 우리의 손도 열리기를 바랍니다.
And make generous offerings of love,
그리하여 진정한 사랑의 제물을
As your holy light reflects from nylon tent flaps,
당신의 거룩한 빛이 나일론 텐트의 끝자락에 비추는 것처럼
Your holy song rises from a crackling campfire,
당신의 거룩한 노래가 타닥타닥 타오르는 캠프의 불꽃에서 솟아나도록 말입니다.
Lit against the cold, against the night.
차가운 것들, 그어둠에 저항하며 불타오르도록 말입니다.
Amen.”아멘 (개인번역)
(출처 https://kellylatimoreicons.com/products/tent-city-nativity)
이 기도 시에서 나는 세 가지를 주목했다. 첫째, 예수가 태어난 장소이다. 둘째, 그 장소에서 열어야 하는 손이 있다. 셋째, 빛은 어둠에 저항한다는 것이다. 이로써 아이콘과 기도문은 모두 성탄절이 차가운 것들, 어둠에 저항하는 절기라는 것을 다른 방식으로 말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이 세 가지(장소·손·빛)는, 우리가 성탄절에 당연해야 할 시선을 어떻게 바꿔왔는지 문학으로 폭로한다. 나는 이 기도문에서, 특히 성탄절이 어둠을 몰아내, 전멸시키는 절기가 아니라, 우리 삶이 어둠에 끝없이 저항해야 하는 것임을 일깨운다고 생각했다.
성탄의 ‘따뜻한 모조품’과 재배열
세계의 모든 성탄 축제는 대개 따뜻함을 기반으로 한 모조품으로 대체되는 중이다. 높은 곳에서 반짝이는 별, 숱한 모형과 이미지로 구현된 촛불, 해마다 사람마다 다른 음색으로 각색한 캐럴, 고급화된 말구유, 사라지는 카드를 대신한 SNS 등이 대표적이다. 그뿐만 아니다. 우리는 매년 같은 장면을 꺼내어 같은 감정에 불을 붙인다. 그런데 그 불꽃이 크고 강해질수록, 어떤 것들은 그 불빛 아래서 더 어두워지고 마침내 보이지 않게 된다. 이미지와 말, 그리고 표현하는 방식이 익숙해졌기 때문에 새로운 이야기는 찾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성탄절은 새로운 이야기를 만드는 절기가 아니다. 있었던 사실, 일어났던 사건, 유지되고 보존되었던 이야기를 오늘 다시 재배열하는 예식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처음 것을 제대로 끄집어내어 다시 우리 삶에 파종하는 것만이 이 절기를 대하는 우리의 방식이라는 말이다. 성탄절이 돌아올수록 우리와 멀어지는 것은 결국 우리의 익숙함 때문일지도 모른다. 오늘날 나의 성탄절은 절반의 의미만 겨우 유지한다는 것을 〈Tent City Nativity〉가 말해준다. 그런 점에서 이 그림과 기도문은 성탄절의 나머지 반의 의미를 풍경을 통해 다시 일깨워준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성탄의 재배열은 사건을 새로 꾸미는 일이 아니라, 시선의 방향을 다시 정렬하는 일이다
위(도시)와 아래(텐트)의 구도, 시선의 하강
이 그림은 화면을 철조망 수평선으로 이등분한다. 사진 위쪽의 반은 도시의 풍경이다. 검고 푸른빛, 사이사이에 거대한 트리가 세 개 자리한다. 밤하늘에는 큰 별이 반짝인다.
반면 그림 아래쪽은 형형색색 텐트가 둘러서 있다. 그 가운데 텐트에 부부가 아이를 안고 있다. 아이는 잘 보이지 않는다. 아버지의 시선만이 아이가 지금-여기 있음을 말해준다. 둘러앉은 사람들 가운데 모닥불이 있고, 그 주변은 마치 태양의 빛처럼 붉고 노란 아우라가 원형으로 파동을 일으키며 물결처럼 밖으로 밀려 나간다. 원(圓)형태는 불을 둘러싼 공동체로 이어진다. 사람들이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아 있다. 개별 인물의 표정은 드러나지 않지만, 그들의 형태로 추론하면 싱글벙글일 것이다. 원은 배제가 아니라 공유의 경계다. 원의 아래 한 자리는 비어 있는 듯 보인다. 어쩌면 그 빈자리로 나를 부르는 것 같다. 색은 화려하고, 밝지만, 어떤 물리적 환경도 편하지는 않을 것이다. 결국, 그림 아래쪽이나 위쪽은 모두 모순의 사건이 채우고 있다. 나는 이 둘 중 어느 모순이 더 신의 역설에 가까운지를 되묻는다.
돌이켜보면, 우리의 성탄은 겉으로는 사진 아래 텐트촌의 정서이지만, 내면에는 습관화된 습성을 따라 도시의 밤을 기대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면, 성탄의 여느 호텔 같은 교회 로비에 만들어지는 ‘낭만적 구유’가 우리의 상상 속에 있다. 캘리는 이를 도시 변방의 텐트로 옮겨버렸다. 사람이 살라고 만들어지지 않은 곳, 그런데 사람이 살아내는 곳. 나일론 천막의 얇은 떨림이 곧 벽이 되는 곳으로 말이다. 그곳에도 멀리 성탄의 별이 반짝인다. 하지만, 그 별은 너무 멀리 있다. 오히려 땅에 피워둔 모닥불이 별처럼 타오른다. 캘리는 별을 위로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아래로 내려다보라고 말하는 듯하다. 별이 아니라 모닥불이 성탄의 방향을 가리킨다. 도시의 성탄에는 사람이 보이지 않지만, 텐트의 성탄에는 사람들이 둘러앉아 있다. 아니 몸이 분주하다. 한 아기의 탄생에 마음을 쪼개 자신의 것을 다 나누려는 태도 같다.
하여 이 작품은 나에게 성탄이 삶의 장식이 아니라 우리를 관통하는 사건 그 자체라는 것을 일깨운다. 기도문과 그림을 거듭 살펴볼수록, 오늘 나의 성탄이 잃어버린 것이 명확해진다. ‘잃어버렸다는 것’은 본래 있었던 것이 사라졌다는 의미다. 그러니 이 사진이 하나의 길을 제시한다면 내가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이 작품에서 찾을 수 있어야 한다. 시선이 멈추는 지점은 느낌이 아니라 손끝이다. 도시의 빛 아래가 아니라, 텐트의 밤 한가운데 그 손끝이 머문다.
성탄절의 시선: 개체를 향한 생명의 줄
이번 대림절에 이 그림을 보며 다시 확신했다. 내가 잃어버린 것이 바로 ‘성탄절의 시선’이라는 것을. 성탄절에 나는 어디를 보고 있으며, 무엇을 보고 있으며, 어떻게 보고 있는지 말이다. 별, 하늘, 밤이 가리키는 곳이 ‘위’라는 것만 생각했다. 그 별, 그 하늘, 그 밤이 어느새 땅에 내려와 ‘이 별’, ‘이 하늘’, ‘이 밤’이 되어 지금-여기 내 발아래 내려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성탄절은 아래로의 절기이다. 도시와 텐트의 구별이 아니다. 그 아래에는 고립과 종속과 폭력이 도사리고 있다.
홀로 있는 삶, 함께 있으나 동떨어진 삶, 부유한 중에 홀로 가난한 삶, 생기 넘치나 스스로 무기력해지는 삶, 폭력 속에서 무력이 없어 무력해지는 삶이다. 그러니 대림절은 도시의 땅 아래 텐트보다 못한 터전이라도 겨우 유지해야 하는 삶에 눈길을 주는 계절이다. 이유도 모른 채 전쟁을 피해 피난길에 올라야 하는 이들의 소식에 눈을 기울이는 경청의 계절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해 아래 세계’로 결코 내려가지 않는 자들과 거리를 두고 그들 틈에서 땅의 사람들에게로 시선을 돌리는 절기이다. 각자 자기 생존의 자리를 찾아야 하는 이들과 같은 방향을 보는 의식이다.
그리하여 철조망 경계 뒤로 가득 찬 도시의 빌딩이라는 여유로운 마을이 아닌 생존의 마지막 보루로서 텐트를 짊어져야 하는 길바닥의 나그네 같은 삶을 함께 수용하는 ‘자기 헌신’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늘의 시선은 만민에게 평등하다는 사실이다. 개체 하나하나를 따로 다독인다. 그러니 도시나 난민촌 누구에게나 생명의 줄이다.
세계 누구도 홀로 끝내 도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시선을 따라가는 이와 외면하는 자만 갈릴뿐이다.
그의 시선이 최종 머무는 곳:그의 손 뻗음
이제 이 그림을 따라 나는 대림절에 그의 시선이 최종으로 머무는 곳을 찾아가 보려 한다. 그것은 그의 손이다. 대림절은 신이 인간을 향해 다독이는 절기다. 인간이 신을 추앙하는 의미는 신의 의지가 아닐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대림절의 시선은 신의 손이 내려앉은 인간의 등위다. 렘브란트의 저 유명한 신의 손은 물론이고, 이삭을 제단에 바치려는 찰나를 붙잡은 신의 손이 있다. 헨리 나우웬에 따르면, 닫히는 손을 넘어 열리는 손, 기도의 손도 있다. 무엇이든 대림절에 그의 시선은 그의 손끝이 닿는 지점에 있다. 그러니 나의 시선도 그 손끝을 따라가야 한다. 대림절은 기다림의 계절을 넘어 ‘낯섦’의 절기이고, ‘준비함’의 의식이고, 또한 ‘손 뻗음’의 사건이다.
<Tent City Nativity〉의 손 뻗음의 흔적들:“내가 아니다, 네가 잘했다.”
켈리의 그림과 벨름의 시에서 손 뻗음의 흔적은 곳곳에 재배열되어 있다. 그림만 보자면, 첫 번째 손 뻗음은 아버지가 아이에게로 내어주는 손이다.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고, 어떤 것도 충분하지 않은 텐트다. 여기서 아이의 탄생은 가까이는 행복이지만, 멀리 보면 비참함이다. 텐트를 벗어날 수 없다면 그 비참함은 죽음을 담보한 비극이다. 하지만, 남편은 아내의 품에 안긴-보이지 않는- 그 아이를 향해 손을 내민다. 어루만져 보려는 마음이 묻어난다. 희망이나 비극보다 ‘사랑함’이 우선이다. 미래는 인간의 것이 아니다. 그것이 비극일지 희극일지는 신의 영역이다. 따라서 아버지의 이 손은 신에게 자유를 허락한다는 인간의 자기 비움이다. 대림절은 신의 비움만 앞서 가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인간의 비움도 뒤따르는 동행의 절기다.
두 번째 손 뻗음은 사진 왼쪽 아래 검은 사람의 손에서 보인다. 그가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얼핏 보면, 그는 무엇인가 먹을거리를 챙기거나 불을 지필 재료를 준비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의 손 뻗음은 결핍한 상태에서 무엇인가를 채우는 행동같다. 텐트촌에 무엇이 풍족할까? 사실, 가볍게 캠핑만 해도 부족한 것 투성이다. 가까운 곳에서 살 수 있다 해도 단순간에 해결될 수 없다. 모든 것이 결핍된 곳이 텐트 생활이다. 그러나 텐트의 묘미는 없는 중에도 나눌 수 있는 것들이 있다는 점이다. 무엇이든 만들어 나눌 수 있다. 없으면 없는 대로다. 그러나 있다면 더욱 풍성하게 나눌 수 있다.
한편, 이 그림에서 몇몇 사람들도 그들의 손을 가두지 않는다. 마치 옛날 코헬렛이라는 지혜자가 말했던 것이 떠오른다.
“어리석은 사람은 팔짱을 끼고 자기 몸을 갉아먹고요. 그러나 두 손 가득 채우고 수고하면서 바람을 붙잡으려는 것보다는, 한 손만 가득 채우고 편히 사는 것이 낫지요.”(<코헬렛>, 4:5-6, 새한글성경)
팔을 안으로 가둬버린 사람, 자기 두 손에 무엇인가를 꽉 채운 사람, 그들은 손을 펼칠 여유가 없다. 하지만, 겨우 한 손에 무엇인가를 가득 채운 사람은 다른 한 손을 내뻗을 수 있다. 이것은 코헬렛의 상상이 아니라 실제 경험이었을 것이다. 켈리의 그림은 바로 그 점을 대림절, 성탄절에 투영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셋째 이 그림에서 손 뻗음은 신의 모습이 아니라 인간의 모습으로 적극 나타난다. 당연히 신의 손이 인간에게 닿았다. 그 닿음으로 자기도 어둠에 갇힌 삶이지만, 다른 이를 위해 힘껏 손을 뻗을 수 있다. 이 틈에 신이 말한다. 이 세계에서 ‘내가 멋지게 한 일’보다 ‘네가 잘 해낸 일이 많다.’ ‘네가 잘했다.’ 신의 다독임이 이 그림 속 어둠을 가득 채운다. 빛 사이로 스며든 파랗고, 붉고, 노란 색조는 신의 손 뻗음이 가져온 다독임의 흔적이다. 대림절은 ‘신이 하셨다’라는 인간의 추앙어가 신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오히려 신이 인간에게 ‘네가 잘했고, 더 잘하기 위해 내가 내려간다. 신이 자신의 손을 뻗어 인간을 위로하는 절기다.
시선의 변화와 손 뻗음의 연동
대림절은 대시절로 유지된다. ‘바라봄’의 절기라는 말이다. 대시절의 핵심은 단순한 관찰이 아니다. 외면의 습관을 해체하는 시선이다. 그 시선이어야 손을 내뻗을 수 있다. 우리는 텐트촌소식을 모르지 않는다. 배척하지도 않는다. 알고 있다. 하지만, 익숙하게 외면한다. 외면은 시선의 회피이다. 어둠 속에 빛이 공존한다는 것을 ‘무시’하는 시선이다. 어둠을 벗어나 빛만을 챙기겠다는 무의미의 시선이다.
그래서 켈리의 작품은 대시절의 가치를 다시 일깨운다. 어둠 속에 공존하는 빛으로 말해준다. 그 빛은 “훈훈하거나 화려한 조명”이 아니다. 그저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빛이다. 모닥불의 타닥타닥은 생명이 태어나는 순간의 환호성이다. 그것은 삶이 비극으로 간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꺼이 운명을 받아들이는 자기 사명의 팡파르다. 나일론 천막에 반사되는 빛은 그저 트리를 위한 장식이 아니다. 탄생의 증언이다. 이런 점에서 이 그림에 담긴 조명은 생존 미학이면서 동시에 삶의 방식이며, 윤리다. 빛이 닿는 곳은 손끝이 머문다. 그 손끝에서 자기 삶에 대한 책임이 시작된다. 우리는 보고도 보지 않을 수 있다. 보지 않고서 볼 수는 없다. 보지 않으려고 몸을 돌이켜 돌아설 수는 있다. 그러나 몸을 돌이켜 기꺼이 보고 말아야겠다고 다짐하는 순간, 모든 것은 보인다. 그런데 이 보는 행위는 눈이 아니라 결단과 손끝의 의지가 결정한다. 대시절은 손끝이 뻗어 나가는 곳에 나의 시선이 있다는 것을 형상화한다.
기도문의 문장은 결정적이다. “우리의 눈을 열어주시고 뿐만 아니라 마음마저도. 나아가 우리의 손도 열리게”해 달라는 말은 ‘시선’을 거두지 않겠다는 의지다. 눈이 마음으로 내려가고, 마음이 손으로 내려간 것이다. 대시절은 이 손이 내려가 뻗어가는 시선이다. 봄으로써 세계는 공존한다. 보이는 것 너머 보이지 않는 것을 관조함으로써 세계는 조화롭다. 그 시선이 손을 끌어낼 때 비로소 시선이 멈춘다. 손이 나오지 않는 바라봄은 그저 소비다.
보는 눈이 손 뻗음의 의식이 되기까지—대시절의 구도
따라서 대시절은 이렇게 정리된다. 즉, 대림절에 본다는 것은, 현실을 ‘예쁜 의미’로 덮지 않는 것이다. 나아가 성탄을 본다는 것은, 가난을 미담으로 바꾸지 않는 것이다. 성탄을 본다는 것은, 빛을 낭만으로 쓰지 않는 것이다. 대림과 성탄의 시선은 나의 밖으로 내뻗는 나의 손에 맞닿아있다.
이 그림과 기도문은 내가 무심코 그려내는 ‘낭만적 구유’를 걷어내고, 외면해 온 장소를 ‘성육신의 자리’로 재지정해 준다. 그리하여 나의 대림절 신앙을 감상에서 윤리로—장식에서 연대로—되돌려 세운다. 또한, 이 그림과 기도문, 그리고 나의 관찰은 ‘손 뻗음’으로 연동한다. 마음은 누구나 말할 수 있고, 감동은 누구나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손은 비용을 치른다. 시간, 돈, 관계, 불편함, 귀찮음, 심지어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손이 열린다는 말은 결국 ‘내 것’의 일부가 실제로 사라지는 일이다.
그러므로 손 뻗음은 신앙의 척도처럼 보인다. 대림절과 성탄은 마음에서 빛나고 손에서 완성된다. 성탄은 기념일이 아니다. 성탄은 발생이다. 성탄은 신의 축제가 아니다. 텐트촌의 사람들을 위한 축일이다. 성탄은 과거가 돌아오는 것이 아니다. 성탄은 다시 태어나 재배열되는 것이다. 그 다시 태어남은, 우리 경계 밖, 어느 텐트촌 같은 인간이 외면된, 자신이 배제된 자리에서 가장 선명하게 일어나는 사건이다. 이 작품은 성탄을 탄생 축제 이야기라는 것에 시선을 두지 않는다. 성탄을 현실의 가장 차가운 자리로 데려가, 우리를 향해 손을 내뻗는다.
“이제는 가라. 그리고 손을 열어 뻗어라.”
이처럼 대림절은 대시절의 의미에 근거할 때, 거룩의 좌표를 옮긴다. 도시의 화려함에서 텐트 자락에 빛이 반사되는 순간으로 말이다. ‘거룩은 깨끗한 공간’이 아니라 ‘삶의 현실 그 자체’에서 발현한다. 시선을 바꾼다. 손을 뻗게 한다. 손이 열려 닿은 곳에서 삶은 열린다. 그러므로 텐트촌 성탄은 내게 이렇게 남는다. 성탄은 “빛이 있는 곳”이 아니라 “빛이 필요한 곳”에서 태어난다. 성탄은 “가고 싶은 곳”이 아니라 “가고 싶지 않은 곳”에서 발생한다. 성탄은 “느끼는 절기”가 아니라 “내어주는 절기”로 완성된다.
하여, 나는 이 대림절을 다시 부른다. 기다림의 계절이 아니라, 외면을 멈추는 계절이다. 그 외면을 해체한 시선만이, 결국 손을 열어 내뻗음을 재구축할 수 있다.
다시 대시절이다. 이 대시절은 그 멈춤이 손으로 내려가, 누군가의 밤을 덜 춥게 만드는 절기이다. 이때 비로소, 텐트 자락에 반사된 빛은 상징이 아니라 사건이 된다. 성탄은 새로운 의미를 말하지 않는다. 과거의 의미가 현재를 손끝으로 찌르는 것으로 충분하다. 바로, 지금 여기 나의 손끝으로. 나의 연민을 말로 끝내지 않도록, 내가 지켜낼 수 있는 한 사람에게 시선을 보내 그의 밤이 안전하게 지나가도록 나의 손을 뻗어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