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절은 그를 기억하며, 뒤따라 함께 걸어갈 준비를 하는 절기다.”
1.
귀천하신 장인은 살가운 분이셨다. 겨울이 되면 내 옷차림 하나하나에 꽤 신경을 써주셨다.
“날이 정말 추운가 보네?”
어느 대림절 즈음, 평소와 달리 두터운 조끼를 받쳐 입은 나를 보고 차에 오르며 한마디 건네셨다. 기온이 아무리 곤두박질해도 늘 얇게 입고 다녔으니 내 방한 복장이 어색하고 의아하셨던 모양이다.
추위에 예민하신 장인은 겨울을 유난히 힘겨워하셨다. 오랫동안 항암치료를 받으신 탓에 병이 병을 낳는 일이 이어지고 있어서 더욱 그랬던 것 같다. 당신 몸은 몇 해 동안 여러 번 다른 치료를 겪으신 뒤에도 끝내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시고 하늘로 돌아가셨다.
그날도 치과 진료를 위해 병원을 옮겨 다녀야 했다. 급 추워진 날씨에 마땅한 손이 없어 내가 시간을 내어 차를 움직이기로 했다. 자주 찾아뵙지 못해 죄송한 마음이 있던 차에, 오히려 잘 되었다 싶었다. 다행히 예상보다 빨리 치과 병원에 도착했다. 치료는 시간이 좀 걸린다고 했다. 그래도 큰 어려움 없이 진료를 마치고 병원을 나섰다. 돌아오는 길에 점심은 보쌈을 같이 먹는 게 어떠냐고, 차에 오르기 전 이미 말씀하셨다. 병원에서 이미 밥값을 챙겨 나오셨다고 미리 귀띔해 주셨다. 은근히 기다리시던 식사였다는 말은, 식사 후 돌아오는 차 안에서 다시 꺼내셨다. 겨울, 사위와 함께 하는 식사를 기다리셨다는 말씀이다.
생각해 보니 장인어른은 어느 순간부터 혼잣말처럼 “이제 또 언제 해보겠나?”를 읊조리셨다. 나는 그 말을 돌아오는 다음 성탄절을 기다릴 수 없다는 뜻으로 들었다. 그 마음이 습관처럼 흘러나오는 줄, 나도 모르는 바 아니었다. “괜한 말씀 마시라”는 나의 말도 그저 가볍게 웃고 흘려보내셨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몇 번이나 나에게 고맙다고 하셨다. 대단할 것도 없는, 누구든 당연히 할 수 있는 것들이 당신에게 큰 힘이 되었다며 마음을 다해 사례해 주셨다. 차에서 내려 휠체어로 병실까지 올라가는 일도 이제 자연스러워져 버렸다. 나는 그것이 슬펐다. 아버지의 소천 때도 그랬지만, 이제 남아 있는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감지해 버리는 그 기분을 나는 전혀 알지 못하기에 더욱 그랬다.
2.
그날의 기억은 이 절기가 되면 늘 어제처럼 새롭다. 아니, 기억의 시간이 어긋난다 해도 상관없다. 그 기억이 나의 지금을 찌르는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병실에 돌아와 다시 짐을 풀고 좀 쉬어야겠다는 말씀에 그러시라 하고 밖으로 나왔다. 근처 카페에 잠시 들러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앞에 두고 멍한 시간을 보냈다. 창밖에 부는 바람 끝에 ‘초겨울 맑은 대설’이라는 잔상이 따라붙는다. 눈으로 느끼는 겨울바람은 오히려 따뜻했다. 저 찬바람의 진입을 가로막아주는 유리창 때문이었다. 얇은 토스트와 온화한 커피를 앞에 두고 창가에 오래 앉아 있었다.
우연히 길 건너편 신문가판대가 눈에 띄었다. 혹시 몰라 잠시 나가 신문을 샀다. 천 원이다. 오랜만이다. 금요일마다 책 소개 별지가 따라붙는 신문이었다. 오늘도 수많은 책이 쏟아지고 사라진다. 화려한 장정의 책들이 쏟아지고 팔려도 세계의 삶은 그대로인 것을 끝내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3-1.
사실 장인어른의 외부 진료가 있는 날이면, 근처 재활 병원에 계신 장모님을 뵈러 가는 날이기도 했다. 치료라는 어둠의 틈에서, 두 분이 함께 점심 소풍을 즐기는 날이었다. 가끔 이런 날은, 모처럼 다른 식구들도 함께 바깥 식사를 즐겼다. 그럴 때마다 두 분 표정이 창안에서 내다본 맑은 겨울 같았다. ‘이 식사’가 행복하다는 걸 뒤섞이는 웃음소리로 말해 주는 것 같았다. 저 유리창 같은 화사한 웃음 너머, 몰아치는 운명의 겨울바람을 온몸으로 맞닥뜨리는 두 분을 나는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었을까. 그날 이후 거짓말처럼 두 분이 함께 식사하는 일은, 대림절이 다시 오기 전에 끝나버렸다.
그해 겨울, 장인어른은 특유의 온화한 어투로 누워 있던 병실 침대에서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며 한마디 말씀을 남기셨다.
“이제 또 언제 보겠나?”
창밖에 바람이 불었지만, 두터운 창이 막아주는 병실은 오히려 그 바람 덕분에 더 따뜻해진 듯했다. 그분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으며 한숨을 들이마셨다. 당신의 평생을 그 어린 아기를 따라 조용히 걸어온 사람만이 낼 수 있는 숨이었다. 아버님과 함께한 세월은 길지 않았다. 그러나 감사가 말투가 되고, 신앙이 습관이 되는 사람의 결은 몇 번만 마주해도 남는다.
3-2.
몇 년 뒤, 장모님도 아버님을 뒤따라 하늘로 돌아가셨다. 결국 다음 성탄절부터는 함께 식사할 수 없었다. 해마다 돌아오는 이 계절, 그분들의 빈자리가 눈덩이처럼 커져 간다. 그런데도 이 기억은 추억으로 물러나지 않는다. 대림절이 오면 다시 현재가 되어 내 삶을 찌르고, 나를 움직인다. 나는 그 찌름을 선물이라 부를 수밖에 없다.
두 병원을 함께 돌아 나오는 그날, ‘여기와 저기, 또 다른 어떤 곳에’ 아침부터 놓여 있던 커피가 아직도 따뜻한 채로 거기 있는 것만 같다. 아픔, 눈물마저 삼켜두어야 할 슬픔도 줄어들지 않았다. 그런데 두 분의 짙은 신앙이 이 위기의 계절에 순간 헤롯궁으로 혼미하게 이끌리는 나를 가만히 붙잡아 주신다. 나그네 의식으로 살아가려는 내가 저 호사스럽게 위장된 마구간으로 달려가기 전에 문턱을 만들어 둔다. 그리고 허름하나 단아한 병실 같은 마구간에 아기가 누워 있고, 그가 뿜어내는 따뜻한 하늘의 향기가 스며 있다고 일러 주신다.
4.
해마다 대림절은 돌아온다. 이 계절, 아픈 이도 많고 속상한 이들도 적지 않다. 아직도 언 땅에 온몸을 밀어대었다 떼어내야 하는 고통에 자신을 던지는 이도 있고, 이 계절에 삶의 터전에서 밀려난 이들도 많다. 그들의 탄식이 그치지 않는다. 탄원이 깊어질수록 동경도 깊어진다.
삶이란 그런 것인지 모른다. 저항과 변혁의 깃발 아래서도 누군가는 금빛 헤롯궁에 비스듬히 누워, 어둑한 마구간 어린 아기에게 축하 화환을 보낼 날을 꿈꾼다. 땅의 슬픔에 보채는 소리를 그럴듯한 대위법에 실어 향음 하는 저 헤롯의 후예로 호적을 올리고 싶은 마음은 사라지지 않는다. 커피가 식어가는 동안 창 이쪽에서 바람 부는 저쪽을 바라보는 나도, 그런 애절한 희망을 감출 수 없는 유한한 존재다. 어떤 희망이란 아직 ‘오지 않은 절망’ 일지도 모른다. 하늘의 선물이 땅이 원하는 그것일까, 궁금해지기도 한다.
그런데도 해마다 자조 섞인 말로 “대림절이 밋밋하다. 바쁘지 않다. 뭘 준비하는지 모르겠다.”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허나 묵묵히 이날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이 말들은 오히려 자극이다. 이 말을 곱씹으며 대림절의 한가운데로 서서히 진입하기 때문이다.
5.
올해도 나는 나에게 다시 묻는다. 대림절, 이 기다림의 절기에 ‘선물로서 구원’ 같은 것은 크게 마음을 두지 않는다. 솔직히 ‘그깟 구원?’이라고 말하는 시대다. 누구보다 교회가 원인 제공자라는 것을 부인할 수도 없다. 하지만 이제 나는 그가 무엇을 해주기를 기다리기보다, 그 어린 예수 자체를 뒤따를 ‘준비’를 하는 것으로 태도를 바꿨다. 어린 ‘예수’라는 존재가 무엇을 하든 어떻게 살아가든, 그 존재 자체를 이 세계에서 따라가는 순례자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내 앞에 먼저 걸어가는 겨울 아이는 바벨 같은 ‘헤롯궁’이 균열할 만한 날카로운 겨울바람이 어디서 불어오는지 알고 있었으리라. 아이는 저 굴곡의 시대를 건너갈 희망의 바람이 실려 오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었을 것이다.
사실 대림절에 기다리는 것은 천지를 개벽시킬 ‘메시아의 기적’만은 아니다. 야훼는 신을 떠나 버리려는 인간이 가는 곳곳을 여전히 뒤따르고 있다. 자기 품의 경계를 보이지 않게 넓혀 준다. 가인의 후예들을 품에 안으려 한다. 은총이다.
그렇다고 그저 기다리는 게 아니다.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공존하기 위해 기꺼이 스스로 진입하는 신의 아들이 머물러 있는 자리를 찾아내어 알현하는 것이다. 나는 인간 예수, 그 자신을 기다린다. 그 인간 예수를 맞이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를 맞이할 자격 같은 건 필요하지 않다.
알겠지만, 그는 마구간에 있다. 그 사실만 잊지 않으면 된다. 중요한 것은 ‘마구간’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는 거기에 있다. ‘마구간 같은 삶’이 아니라, 그냥 마구간이다. 그러니 그를 기다리지만 말라. 기다리기만 한다면 그를 못 만날 수도 있겠다. 그가 있는 마구간을 찾아 나서야 한다.
대림절은 그를 기다리는 절기만은 아니다. 그를 ‘찾아 나서는 절기’이고, ‘뒤따르는 계절’이다. 세계는 별빛이 희미해지고 있다. 어둠 속에서 몸에 기억된 그 좌표를 따라 걸어가자.
어린 예수가 있는 마구간 좌표를 제대로 찾으려고 분투하듯, 순례해 보자.
헤롯궁을 동경하는 너,
에클레시아!
그 겨울바람을 가로막는 창을
과감히 열어젖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