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자기 몸으로 그려보는 나라

by 푸른킴

‘걷는 자의 위대함, 그것도 한 걸음씩, 걷는 과정에서 역동하는 하나님의 나라’ 이런 말들이 꽤 호기심을 자극했습니다. 사실 데오빌로 역시 ‘길’에 대한 여러 생각을 은근히 좋아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젊었을 때 애송했던 시가 불현듯 떠오릅니다. 아마도 끝 단락인 것 같습니다.


길이 밖으로가 아니라 안으로 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만 길은 고분고분해서

꽃으로 제 몸을 수놓아 향기를 더하기도 하고

그늘을 드리워 사람들이 땀을 식히게도 한다.

그것을 알고 나서야 사람들은 비로소

자기들이 길을 만들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래된 이 시는 시인의 시집, 『쓰러진 자의 꿈』의 서시처럼 맨 앞에 실려 있었습니다. 데오빌로는 철없던 시절이 어제처럼 떠올랐습니다. 어린 그 시절의 애송시였던 이 시가 지금은 선생 L의 말을 메아리처럼 들려주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지, 길은 안으로 나야 제대로지. 사람은 누구라도 자신이 길을 만들었다고 말하지 않아야지. 길 꽃으로 제 몸을 수놓고 향기를 더하는 그 과정이 길을 걷는 아름다움이지.’ 그렇게 보면, L의 말씀이 좀 이해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도 내면부터, 낮은 자세로, 그리고 길 걷는 과정의 아름다움으로 전개된다는 것 말입니다.


“데오빌로님, 제 표현이 이해되시나요? 하나님 나라의 일은 외부로 폭발하기 전에 먼저 사람의 내면을 격동하는 사건입니다. 또한, 요즘 잘 닦인 도로처럼 누가 먼저 길을 만들어놓고 가는 것이 아니라, 걷는 이들이 이어질 때 비로소 길이 생깁니다. 길을 만든 이가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공동의 수고이며, 분투로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길은 걷는 그 자체로 아름답습니다. 제가 들려드릴 이야기에는 수많은 도반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그 길에서 자기 생이 아름답게 빛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이라는 것이 바로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전히 하나님의 통치 아래서 길을 걷는 사람들에 의해 ‘주의 말씀이 흥왕하여 세력을 얻었다’(행 19:20)라는 말을 믿고 있습니다.”


‘믿는다.’


데오빌로는 혼잣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머리도 좀 식힐 겸 문을 열고 아트리움으로 나갔습니다. 자신이 아주 좋아하는 정원입니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꽃과 꽃 사이에 작은 길이 앙증맞게 이어져 있습니다. 이 집을 지을 때, 자신도 조금 거들어서 만들었던 오솔길입니다. 하지만 그리 자주 내려가진 않습니다. 우연히 정원 저 끝에 잡풀이 우거진 것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거슬렸지만, 굳이 내려가 볼 마음은 없었습니다. ‘집안사람들이 잘 가꾸겠지.’ 잠시 멍하니 그 정원을 보다가 아예 테라스로 나갔습니다.


사방이 트인 이 공중 마당 같은 공간은 답답할 때마다 가슴을 탁 트이게 하는 힐링 장소입니다. 무엇보다 여기에 서면 도심이 멀리까지 눈에 들어옵니다. 그 열린 시야가 늘 좋습니다. 도심에는 이스라엘에서 로마로 이어지는 도로가 심장을 가로지르듯 잘 닦여 있습니다. 저 길로 들어서면 상상만 하던 이국땅으로 바로 내달릴 수 있습니다. 누가 저 길을 만들었는지 모릅니다. 도시 당국에서 돈을 들여 공공작업으로 했을 테니 굳이 나의 관심사는 아닙니다. 그런데 문득, 저 도로가 만들어지기 전에도 저기에 길이 있었다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그 길은 돌 포장이 안 된 그저 흙길이었다고 했는데, 언제부터 저 길이 있었을지 궁금했습니다. 그 무명의 도보 순례자들. 그들이 저 길을 간 목적은 다르겠지만, 누가 한 걸음 먼저 나간 길을 함께 뒤따라 걸어주었다는 것은 분명했습니다.


L의 말이 그런 뜻인 것 같았습니다. 데오빌로는 생각했습니다. ‘내 생각이 맞는다면, 하나님 나라에서 길은 그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은 아니었어. 만들어진 길을 걸어가기만 하는 것과는 달랐지. 누가 그 길을 만들었는지 몰라도 돼. 그저 맨 첫 사람이 걸었던 길을 뒤따라 걸을 용기만 있으면 되는 거야. 그 걸음의 축적,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길에서 중요해.’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길은 걷는다고 끝나는 것이 아닌 듯했습니다. 특히 예수와 그 제자들이 걷는 동안 그들을 괴롭힌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는 것을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L의 첫 편지 말고도 여러 소문에 따르면, 예수와 그 무리는 많은 고생을 했던 것 같았습니다. 그러니 그가 십자가라는 최고의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 순간 데오빌로 안에 또 다른 데오빌로가 말을 걸어옵니다.


‘그런데 생각해봐. 지금 그들이 여기 예루살렘, 이 두려움의 땅 한복판에서 길을 걸을 준비를 한다고? 설상가상으로 앞서갈 스승 예수도 없는데? 누가 앞장을 선다는 건가? 베드로? 어림없는 일이지. 배신의 아이콘으로 이미 소문이 다 났잖아? 내가 아는 제자들도 별로 없지만, 짐작건대 누구도 그들의 스승처럼 ‘앞서갈 인물’은 못 돼. 붙잡아가려고 길마다 지키고 있을 텐데, 어림없지. 이 엄중한 시국에 누가 나설 수 있단 말이야? 난 안 된다고 봐. 그리고 또 어느 길을 만든단 말이야, 이 도심에는 이제 새로 길을 낼 만한 곳도 없는데. 내면으로 난 길? 좋아, 자기를 과시하지 않고, 걷는 과정만으로 충분하다고? 듣기엔 좋은 말이긴 하지만, 불가능해. 길을 만들만 한 곳이 더는 없단 말이지. 이상적이고 실현 불가능한, 그들 특유의 소문 플레이 같은 것에 현혹되지 마. 너답지 않게 왜 그래….’


야누스는 모든 인간의 친구입니다. 데오빌로는 그것을 인정합니다. 선과 악은 한 단어이고, 한 인간에 공존하는 것입니다. 분리되는 것이 아닙니다. 순간의 정도 차이일 뿐. 지금 데오빌로가 그렇습니다. 데오빌로와 그의 데오빌로가 갑자기 논쟁을 벌인 것입니다. 다시 서재로 돌아오는 길. 막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어디 다녀오시나요? 계신 것 같기는 했는데, 아침 내내 안 보이셔서 궁금했습니다.”


디스마스였습니다.


“그래? 서재에 좀 있었지. 요즘 건강은 좀 어떤가?”


말이 많은 친구는 아닙니다. 하지만 한번 대화가 열리면 자근자근 재밌게 말하곤 했습니다. 데오빌로는 그를 시종으로 사들일 때 몇 가지를 물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의 답에 따르면, 사실 그는 극악한 도적이었습니다. 데오빌로도 그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꽤 오랫동안 감옥 생활을 했고, 십자가 처형이라는 최후의 순간까지 갔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구명되었고 그 후 자기 삶을 완전히 바꿨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의아해서 늘 그 이유를 물었다고 했습니다. 그때마다 그는 ‘예수’ 때문이라고 짧게 답했습니다. ‘어떤, 무엇이?’ 그는 예수의 말투였다고 말했습니다. ‘친절한’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도 예수는 자기보다 더 험악한 자신을 ‘지금, 이 순간 있는 그대로’의 모습부터 챙겼다고 합니다. ‘나도 힘들지만, 너도 힘들겠구나.’ 그리고 자신 같은 사람도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라고 했다는 겁니다. 물론 누구나 인사치레로라도 할 수 있는 말일 겁니다. 하지만 그는 말을 겉으로만 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을 인간 자체로 대접하는 마음이 저 진흙탕 샤론에 아름답게 피는 장미 같았습니다. 그 후 자신은 기적처럼 살았지만, 그는 결국 죽었다며 울컥했습니다. 미안함과 어떤 존경심이 뒤섞인 묘한 감정이 이 오래된 시종에게서 어린아이처럼 흐르고 있다는 것에 데오빌로는 감동했습니다.


시종의 마지막 말은 더 인상적이었습니다. 아주 조심스럽게 그러나 단호하게, ‘지금 자기도 그가 걸어간 길을 잘 걸어가겠다고 늘 돌아본다.’라고 했습니다. 할 수 있는 한, 더 낮은 태도, 상대방을 먼저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그 사람들을 섬기는 삶을 살겠다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그랬던 겁니다. 그가 마침내 우리 시종으로 온 이유도 그것이었습니다. 데오빌로는 그를 돈 주고 샀기에 마땅히 자기 소유겠지만, 사실 겉만 부유하지 이 사회에서 이방인인 자신을 누가 이렇게 성실하게 도울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시종의 일을 시늉만 해도 안전하게 지낼 수 있는데 말입니다. 하지만 그는 모든 성심을 다해 자신을 돕고 있습니다. 자신을 돕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스스로 자신에게 하는 듯, 데오빌로를 위해 일하고 있는 겁니다. 누구도 그의 과거를 듣기 전에는 그의 지난날을 짐작조차 할 수 없을 겁니다. 오직 순수하고 선합니다.


짧게 나눈 대화였지만, 그는 예수의 목적은 ‘인간의 회심인가?’라는 오랜 고민을 다시 떠올렸습니다. 태어나 자신을 기꺼이 변화시키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싶어 쓸데없는 생각이라 치부했던 이 질문이 다시 고개를 들었습니다. 지금 내 앞에 그 증거가 있기에, 그 묵혀두었던 질문이 되살아난 것입니다. 분명 디스마스는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습니다. 대화와 자기 생각을 오가는 동안, 데오빌로는 그와 자기 사이에 견고한 연대감이 스며드는 것을 느꼈습니다. 신분도 잠시 잊었습니다. 그 둘 사이에는 그저 서로에게 몸을 기울여 배려하는 ‘말’만 살아 오갔습니다. 데오빌로는 몇 마디 이야기를 더 나누다 헤어져 서재로 돌아왔습니다.


‘혹시 그 이야기인가?’ 걸음을 재촉해 서재로 들어왔습니다. ‘어느 부분일까?’ 첫 편지를 뒤적였습니다. 서재 한구석에 뒤섞여 팽개쳤던 두루마리를 뒤졌습니다. 바로 그 대목을 찾기는 어려웠지만 땀을 뻘뻘 흘리면서 애를 썼습니다. ‘아 여기 있군.’ ‘그래, 그랬군. 놀라운 일이야. 그가 한 말이 여기 있네. 주인공을 만나다니. 예수가 그의 스승이었네. 불가사의한 능력이야. 저 디스마스가 회개하고 뒤따라 걸을 정도라니.’


그런데 이 말 틈에 데오빌로는 새롭진 않지만 늘 괴롭히는 질문의 늪에 다시 빠졌습니다. ‘이상하단 말이야. 왜 그는, 그런 힘이 있는데도 이 도시를, 아니 이 나라를 자기 손으로 탈취하지 않았을까? 하나님 나라가 아무리 형체가 아니라 해도, 그 통치를 실현하려면 뭔가 틀은 있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또 지금 사람들은 그가 없는데도 그가 걸어간 길을 걷겠다고 그가 부탁한 대로 또 뭔가를 기다린다니….’ 참,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두루마리를 다시 둘둘 말아 책상 한쪽으로 옮겼습니다. 바닥이 미끄러워 넘어질 뻔했습니다. 대리석이라 물이 흐르면 바로 닦아야 하는데 아까 그냥 놔둔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다행히 두루마리만 놓쳤을 뿐, 몸은 다치지 않았습니다. 몸을 숙여 두루마리를 집어 들다 말고 데오빌로는 정작 궁금했던 질문을 아직 해결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스쳤습니다. ‘그건 그렇고, 도대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뭐라 말했을까?’ 갖다 두려던 두루마리를 다시 책상에 내려놓은 뒤, 그는 아예 처음부터 빠르게 읽어보려고 했습니다. 분명 읽었을 겁니다. 예수가 말했다면, 선생 L이 기록하지 않을 리 없었습니다. 조금 해이해진 부분은 손으로 눌러 곱게 펴가며 글에서 눈을 떼지 않았습니다. 한참 읽다 보니,


헤 바실레이아 투 테우 엔토스 휘본 에스틴


번역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첫 번째 편지, 17:21후)


데오빌로는 깜짝 놀라 천천히 들여다보았습니다. 분명 ‘하나님 나라’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다행이었습니다. 글이 여기에 있어서.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다음 구문도 마저 읽었습니다. 그런데 의아했습니다. 그다음 말이 ‘너희들 속에’였기 때문입니다. ‘나의 안’, ‘너의 속’이라 해도 이해가 안 될 텐데, 아예 ‘너희, 제자들 안에 있다’라는 것입니다.


‘아, 분명 하나님의 나라인데, 국가가 아니었군. 그 사람들 속에 있다는 것이네.’


“와, 놀라운데? 사람들이 국가라니. 아니, 사람들 사이, 그래, 관계가 국가라니 말이야.”


소리가 밖으로 튀어나와버렸습니다. 이 구절을 찾았다는 쾌감보다 더 역설적으로 그 사이에서 치고 나오는 의아함이 데오빌로를 짜릿하게 했습니다. 곧바로 두 번째 편지를 다시 읽었습니다. ‘관계’라는 자기의 이해가 꼭 맞기를 바라면서 말입니다.


"사도들이 한곳에 모여 있을 때, 예수님은 하나의 약속과 함께 부탁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가 아버지께 들은 약속을 기다려라.' 그리고 또 한 가지를 덧붙이셨습니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너희는 며칠 안에 성령으로 세례를 받게 될 것이다.'“


분명 아침에는 이해 불가였습니다. 단어야 알지만, 뜻은 모르는 문해력 장벽에 좌절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처음부터 알았다는 듯, 의미가 눈과 뇌에 동시에 포착되었습니다. 데오빌로는 식어버린 찻잔에 손을 내밀었습니다. 생각이 사방으로 펼쳐지다가 하나로 잘 모이는 그런 기분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식은 차는 맛이 없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식어도 자신이 그것을 마시는 순간, 그 차는 차가운 대로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매력이 있습니다. 따뜻하면 또 따뜻한 대로. 이것은 자신만이 아는 신비로운 의식 같습니다. 뭔가 경이로운 일을 경험할 때 나오는 경탄의 습관입니다. 들뜬 자신을 오히려 차분하게 해주는 그런 효과도 있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구름이 해를 덮어 어둑해진 정오의 창가로 나갔습니다. 모든 것이 다시 보입니다. 물끄러미 바라보았습니다. 너무 강력한 깨달음 앞에서는 무념의 상태가 자연스럽기 때문입니다. 잠시 마음을 다잡습니다. 회색 구름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에 가볍게 흔들리는 나뭇잎을 보며 생각의 타래를 천천히 하나씩, 하나씩 꺼냈습니다. 집요한 자기 수고로 답을 찾아가는 여정은 자주 확신이라는 선물을 줍니다. 질문과 답을 이어주는 자신이 대견했습니다.


우선, ‘왜 예수는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리라고 하셨을까?’ 이제 답할 수 있습니다. ‘여기가 출발지점이기 때문이다. 절망과 두려움의 자리. 그들은 분명 신의 의지에 실망했을 거야. 효율적인 회복이야말로 실망한 그 자리가 가장 적절하지.’


그렇다면, ‘왜 성령 세례인가?’ 이것은 사실 잘 감이 오지 않지만, 잘 모른다는 것을 생각해서 대략 답해본다면, ‘아마도 성령이 그들의 앞에 설 것이기 때문이다. 밤낮으로 그들보다 한 걸음 앞서갈 것이니, 뒤따라가려면 성령을 잘 감지해야겠지? 그래야 이제는 안 보이는 예수를 볼 것이고, 보이면 예수에게 결속되어 그의 뒤를 잘 따라가겠지? 결속이라는 단어를 생각해 낸 것에 괜히 스스로 만족했다. 예수가 성령 이야기를 심심치 않게 했다는 것을 떠올려보면 쉽게 이해되지. 무엇보다 성령은 바람 같다고 했잖아. 데오빌로는 이제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메모했습니다. ‘예수가 승천한 후 제자들은 그들이 절망한 곳, 예루살렘에서 다시 길을 걸어야 했다. 예수는 이제 없었지만, 성령이 그들의 앞에 갈 것이다. 문제는 바람 같은 성령의 뒤를 따라 걸으려면 바람의 길을 감지해야 한다. 그 바람의 길을 따라 예루살렘을 걷는 것, 그것이 하나님 나랏일의 시작이다. 시작….’


그런데 순간, ‘시작?’이라는 말이 낯설었습니다. 예수 살아있을 때부터 아니 저 옛날부터 그런 운동이 있었다고 하지 않았나? 솔직히 ‘시작’이라는 순간을 알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하나님 나라의 일은 과거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텐데…. 문득 그는 시작이 어떤 ‘연결’을 의미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결속’이라는 단어에서 유추하긴 했지만, 그것과는 사뭇 다른 의미였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성령 세례는 연결입니다. ‘예수와 그 이전 하나님 나랏일과 이제 앞으로 펼쳐질 하나님 나라의 일, 과거와 미래가 분리되지 않고 균등하게 이어지는 어느 순간의 시점입니다. 눈에 보이진 않지만, ‘발생한 그 사건’을 시작이라고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느 정도 정리가 끝났습니다. 기분 좋게 약한 비가 살짝 흩뿌리고 지나갔습니다. 바람이 불어서인지 물방울 몇 개가 데오빌로가 서 있는 창 바로 앞에 부딪히고 바로 흩어졌습니다. 어떤 힘이 작동했나? 상관없습니다. 이제 물방울이 모여 있든 흩어지든 데오빌로는 큰 산을 하나 스스로 넘은 것 같았습니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말입니다. 이제 한 가지 질문만 잘 해결되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사이 비둘기 한 마리가 창틀에 걸쳐진 나뭇가지에 날아왔고 데오빌로는 생각을 마저 정리하려고 책상으로 되돌아왔습니다. 첫 편지에서 한 대목이 아까부터 기억을 톡톡 두드렸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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