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남은 질문

내러티매진 Narratimagine-사도들의 길, 우리의 걸음

by 푸른킴

'예수가 받은 세례가 성령 세례였지.’


바로 그 대목을 찾았습니다. 한두 번 했을 뿐인데, 이젠 제법 익숙해졌습니다. 데오빌로는 요즘 문학과 회화의 서술 기법을 공부하는 중입니다. 그중 에크프라시스(ekphrasis)라는 새로운 기법을 얼마 전에 배웠습니다. 그때 예수의 물세례 장면을 읽었는데, 얼핏 보기에도 이 기법이 사용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논증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직 판단하기는 이르지만, 어느 정도 관계될 것이라는 여린 확신이 피어나고 있습니다. ‘어떤 사물 또는 사건을 그림처럼 세밀하게 그려 그림만으로도 이야기를 떠올리게 하는 묘사.’


물론 현장에서 직접 본 사람들에게는 필요 없지만, 데오빌로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에게는 이런 묘사가 ‘실재’의 미메시스 같아서 아주 만족스럽습니다. 실재는 지나가는 것이니 아무리 기억력이 좋아도 결국 기호로만 남습니다. 데오빌로는 선생 L, 아니 이 이야기를 글로 남겼을 어떤 사람들이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저 오래된 과거가 지금 자신을 이끌어가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것도 현장에 있는 듯 생생한 묘사로 말입니다. 어쨌든 뭔가 좋은 일이 생길 조짐이 보였습니다. 이제 앞서 찾아온 의미보다 더 큰 뜻이 다가올 것 같아 흥분됐습니다.


잠시 간이침대에 몸을 좀 뉘었습니다. 힘겨운 과제를 하나 해결했을 때 나오는 회복 버릇입니다. 데오빌로는 일도 열심히 하지만, 회복도 중요하다는 신념이 있습니다. ‘잘 쉬어야 새로운 일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누워서도 생각이 떠나지 않습니다. 이제 남은 과제는 ‘성령 세례’를 구체적으로 파악하는 것. 물에서 받는 세례는 익히 알고 있고, 볼 기회도 많았기에 큰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성령 세례는 아주 낯설었습니다.

그런 생각은 생각대로 이어가며 평소대로 팔베개하고 천장을 보는 것이 재밌습니다. 기하학무늬를 배열해 두어서 볼 때마다 다른 조합이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늘 같은 모양이지만, 꽃잎과 꽃줄기를 찾아본다든지, 일곱 촛대에 이름을 붙여보는 것도 좋아합니다. 데오빌로는 이렇게 분석하고 종합하는 것을 취미처럼 즐길 때가 많았습니다.


관계, 나-너-우리-그 안에서

L은 기대감으로 몸이 가벼워졌습니다. 분명 데오빌로가 자신이 보낸 두 번째 편지를 잘 시작할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처음 다섯 구절에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의 핵심어를 최대한 담았기 때문입니다. 어쩌다 보니 퍼즐을 맞춰야 하는 구도가 되어버렸지만, 데오빌로가 잘 찾을 것이라는 생각은 여전했습니다.


“데오빌로님, 혹시나 해서 덧붙여둡니다. 사실 제가 이 편지의 서두 한 다섯 절에 앞으로 펼칠 이야기의 핵심어를 모두 담아두었습니다. 처음 접하는 표현과 단어에 당황하시겠지만, 저는 알고 있습니다. 잘 이해해 주실 것임을.”


“역시 친절한 분이시네.”


허공에 대고 말했지만, 마치 선생 L이 바로 옆에서 자기를 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몸을 일으켜 간단히 얼굴과 손을 씻었습니다. 자리로 돌아와 두루마리를 천천히 살폈습니다. 특별한 것이 보이진 않았습니다. 평범한 문장들 사이에 단어의 쓰임이 조금 낯선 것은 분명하지만,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유독 ‘성령 세례’라는 말의 의미가 흐릿한 안개 속 같았습니다. 데오빌로는 이럴수록 뭔가 있을 것 같다는 묘한 촉이 있습니다. 평범한 것을 오래 보면, 특별한 어떤 것이 드러난다는 공부의 비법입니다.


사실, 데오빌로는 히브리인들과 더불어 살면서 한 가지 특별한 공부법을 배웠습니다. 그들은 경전의 한 부분을 쉽게 지나치지 않고 오래 바라봅니다. 개인적으로 데오빌로는 이 방법이 아주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래서 ‘떠오르기’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경전 읽을 때 자세로는 아주 적절했고 좋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생각보다 경전이 날마다 새롭게 말하는 것을 듣도록 도와주기 때문입니다. 그저 바라보고 있다가 좀 더 궁금해지면 소리 내어 읽습니다. 그 어느 순간 경전이 말을 걸고, 의미가 떠오르고, 그것이 떠오르면 붙잡는다는 점이 매력적입니다. 그걸 생각하니 약간 기대감이 차올랐습니다. 데오빌로는 자기 의문이 가장 해결되지 않은 다섯 번째 구절이 이 구문을 찾았습니다.


엔 프뉴마티 바프티스테세스테 하기오(1:5후) 거룩한 세례를 받고 영 안에서/거룩한 세례를 받고 영으로


아무래도 문장이 이상합니다. 좀 더 들여다보고, 소리 내어 반복해서 읽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처음부터 몇 번 반복해 읽다가 데오빌로는 두 번째 문장에도 비슷한 표현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관찰의 힘입니다. 두 구절을 나란히 붙였습니다. 사실 둘째 구절이 일상적인 표현이라는 것쯤은 데오빌로도 알고 있습니다.


디아 프뉴마토스 하기우 (1:2중) 거룩의 영을 통하여, 거룩의 영으로


이것이 정상적인 문법입니다. 그때 데오빌로는 감을 잡았습니다. 낯설게 쓰기였습니다. 이 기법은 글 쓰는 이들이 꼭 말해주고 싶은 것, 강조하고 싶은 것을 부각할 때 자주 사용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읽는 사람이 건성으로 지나가지 않도록 하려는 긴급 조치입니다. 물론 읽는 사람이 그걸 판단해야 가능하지만, 어쨌든 작가는 그렇게 자기 의도를 반영할 때가 있습니다. 데오빌로는 자신이 ‘바프티스테세스테’(세례를 받으리라!)라는 말에 이미 주목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재밌게도 ‘거룩’이라는 말과 ‘영’에 둘러싸인 모습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때 시종 디스마스가 들어왔습니다. 이리 와서 이 두 구절을 한번 보라고 청했습니다. 디스마스는 별 취미가 없다는 듯 그게 뭐가 문제냐는 표정을 남기고 나갔습니다. 뭐라 말했지만, 데오빌로는 아랑곳하지 않고 한참 동안 눈을 떼지 않았습니다.


“유레카!” “알았다!”


데오빌로는 이 세 단어를 나란히 맞춰봤습니다.

프뉴마티 바프티스테세스테 하기오(1:5후)

디아 프뉴마토스 하기우 (1:2중)


그러면서 자신에게 설명하듯이, 천천히 독백했습니다.


“자자, 보세요. 5절의 이 세 단어는 문법이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바로 글쓴이의 의도가 들어있는 겁니다. 가장 확실해 보이는 것은 두 번째 단어, ‘바프티스테세스테’라는 동사가 ‘영’(프뉴마티)과 ‘거룩하다’(하기오)에 있다는 겁니다. 이건 제 얕은 견해지만, 이런 배열은 동사를 앞뒤로 괄호처럼 감싸는 모습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이해가 되시나요? 아니, 다시 한번 말해볼까요? 아, 괜찮다고요? 좋습니다. 그럼 좀 더 가보겠습니다. 궁금하면 언제든 천천히 다시 물어도 좋고, 아예 자기 힘으로 해결해 보셔도 좋습니다. 충분히 가능합니다.


네, 감싸는 것. 그것이 제가 발견한 겁니다. 지금 ‘세례를 받는다는 미래형’이 거룩한 영 안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 안에’ 있는 겁니다. 이제 해석이 관건인데요. 해석의 초점은 개념을 찾는 것입니다. ‘감싸고 있다. 그 안에 둘러싸여 있다’는 긴 말을 적절한 관점으로 묶으면, 아마도 ‘관계’라는 말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대충 정리가 됩니다. 성령과 세례는 어떤 방법의 문제라기보다는 ‘존재의 방식’ 즉 존재 근거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해가 되시나요? 존재 근거란 말이 좀 어렵지만 잠깐만 심호흡을 하고 들어보세요. ‘그것이 그것 되게 하는 바로 그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면 그것이 안 되는 그것’입니다.


정리하면, 성령과 세례는 뗄 수 없는 상호 존재근거가 된 것입니다. 누구에게요? 바로 예수 없이 예수를 뒤따르려는 자들에게 그렇다는 겁니다. 성령이 예수처럼 제자들을 이끄는데, 그것은 바람 같아서 사람들은 잘 실감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성령의 옷을 입고, 성령을 느끼는 절차가 필요합니다. 보이지도 않고, 느껴지지도 않는다면 결국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동의가 되나요? 저는 저에게 지금 설득됐습니다.”

그랬습니다. 데오빌로는 비로소 ‘성령 세례’가 ‘관계’의 불가역적 방식이라는 것을 스스로 알았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라는 말도 바로 이해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의 사람이 성령을 뒤따라 자신과 타인, 그리고 이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이뤄가는 하나님의 통치였습니다. 그것을 가장 먼저 실현한 이가 바로 예수였던 것입니다.’ 언젠가 학교에서 지나가듯 들었던 ‘하나님 나라의 신학’은 바로 예수에게서 구현된 하나님의 통치를 탐구하는 실천적 학문이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지금은 예수가 아니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의 몫이라는 것도. 그들이 걸어갈 때마다 역동할 하나님의 통치, 그것이 바로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라’라는 말의 의미였습니다.


선생 L의 글은 데오빌로의 상상을 자극하고, 마치 그림처럼 생생하게 느껴져 모든 사건이 실제로 일어나는 듯했습니다. 오늘도 그 그림 속을 만족스럽게 여행했습니다. 생각보다 뿌듯했습니다. 정답인지 아닌지는 아직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그것을 자기 힘으로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만으로 자신을 스스로 칭찬할 만했습니다. 몸이 피곤했습니다.


문득, 아까 디스마스가 자기 서재에 들어왔던 이유가 궁금했습니다. 서재를 나가면서 그를 부르려다 그를 직접 찾아가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안 그래도 일이 많은 데 오라 가라 하는 자신이 좀 멋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문밖으로 나서니 자기 서재보다 이 열린 공간이 정말 ‘안식’의 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습한 기온이 몸으로 확 밀고 들어와 잠깐 숨이 막혔지만, 상관없었습니다.


공기는 아침보다 탁해졌지만, 새롭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먼지가 많은 속에서 온종일 일하는 저 ‘노동자’의 삶이 자신과 무관하다는 것이 평생 당연한 처신이었습니다. 하지만 문득 어리석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 바람이 이 말을 계속 실어왔습니다. 밖으로 나갈수록 더 텁텁한 무엇이 몸속으로 스며드는 것 같았습니다. 몸이 조금 더워졌습니다. 무엇인가 몸에 닿으니 열기가 오르는 것 같습니다. 붉은색 연기 같기도 하고 안개 같은 것이 아트리움 저 구석 잡풀 사이에서 스멀스멀 오르고 있습니다.

“어, 저 저게 뭐지?”


그사이 L은 데오빌로에게 막 전령을 보냈습니다. 그가 떠나는 모습을 보고 난 뒤 갓 떠온 약수로 막 끓인 차를 마시며 가벼운 상상에 행복해졌습니다. 덧붙인 메모를 받고 난 뒤 데오빌로가 마치 바로 옆에서 두 번째 편지를 읽고, 쉼 없이 질문하는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뜨거운 탓인지 차는 한 방울씩 떨어지듯 몸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사이 혼잣말이 향기처럼 몸 안에 번집니다.


‘데오빌로가 공동체성을 알아챘을 거야. 멀리서도 ‘그 안에 있다’라는 연대감 말이야.’


천천히 식는 차에서 노란 연기가 모락모락 좁은 다락방을 채우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비로소 선명한 시작이겠군.’


손을 뻗어 노래를 열었습니다. “갈릴리 사람 예수”♬


“그의 말속에서는 땀 냄새가 났어요 우리에게 흐르는 그 땀 말이죠

...

하늘은 곁이었고 땅은 하늘이었죠 우리 발을 씻기려 무릎을 굽히실 때

함께 울고 웃었던 그 푸른 기억들은 아직 눈앞에 생생합니다” (한웅재, 3집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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