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정하라!
동중정(動中靜)의 세계에서

by 푸른킴

고요함

오랜만에 피정이다, ‘고요함으로 피하다,’ 나에게 이 고요함은 곧 말 없음이다, 들리는 말도, 내뱉는 말도 사 라진다, 말 없는 세계로 내 몸을 밀어 넣는다, 나의 어둠 순응이다, 쏟아지는 비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을 땐, 그 ‘비’들을 벗 삼아 책 숲을 산책하고 싶다, 가벼운 복장, 폭넓은 우산 하나 챙긴다, 폭우와 함께 걷는다,

산길 옆 계곡에 오랜만에 빗물이 넘친다, 흙과 길과 뒤섞인 비가 생기 넘치게 계곡 바위로 떨어진다, 길은 사라졌다, 비만 남았다, 빗길이 되었다, 멀리 오르지 못한다, 길에 사람이 없다, 몰랐다, 발아래만 보며 숨죽이며 걷는다, 언어는 침잠하고 피정은 깊어진다, 억수같이 쏟아지던 비는 스스로, 저녁이 되기 전에 침묵처럼 멈춰버렸다, 돌아왔다, 창밖을 본다, 남은 먹구름마저 비바람에 씻겨가길 기대한다, 숨어 있는 푸른빛, 광계가 열리길 기다린다, 구름은 고요하게 흐른다, 구름 덕분인지 세계는 어둑해도 조금 더 고요하다,


건너편 성당 꼭대기

피정하라 동중정의 세계로.jpg

비둘기 위태롭다,


움직임

구름 너머 세계는 아직 밤이다. 노점 채소과일 트럭 다시 움직인다. 김태생의 『뼛조각』(파주:보고사, 2022)을 읽는다. 글 속에 ‘말 없음’의 세계로 떠밀린 사람이 있다. 영구미환(永久未還)의 밤길로 내몰린 사람이 있다. 정치적, 재난적 사회적 강제 피정이다. 숨죽이며 죽음 계곡 같은 밤길을 한 걸음씩 버텨내야 한다. 밤이 아니면 삶을 보존할 수 없는 갇힌 자. 새벽은 없을지 모른다. 책을 덮는다. 밤은 여전하다. 나의 밤도 사라지지 않았다. 매일 햇살에 잠시 가려졌을 뿐. 삶은 누구나 정중동(靜中動)이다. 그것이 평안이다. 밤길처럼 조심스럽게 내디뎌야 한다. 휘몰아치듯 역동하는 타인의 삶과 경계를 맞대며 사이좋게 걸어야 한다. 길은 어디나 희미하다. 알 수 없는 돌부리는 돌만큼 많다. 경계는 흐물 하다. 그 길에서 나는 불안한지도 모른 채 비틀거린다. 나의 삶은 고요하게 밤의 계곡을 미동해야 한다. 서두르지 않아야 한다. 나는 안다. 사라지지 않는 나의 밤길엔 한걸음 아래를 비춰준 한결같은 빛이 있다는 진리를. 빗속에서도 감춰지지 않는 달빛과 별빛, 그 영원의 진리의 빛이 있다는 것을. 돌아보면 나는 늘 정중동 하려 했고 그 빛은 여전히 동중정이다. 나는 미약하게 서둘렀으나 그는 역동하며 여유로웠다. 피정은 동중정이다. 말 ‘없음의 있음’의 세계다. 이 길을 휘돌며 햇빗살처럼 쏟아지는 전능자의 말속을 느긋하게 유영한다. 먹구름은 역동하며 빠르게 밀려간다 흰구름이 고요하게 천천히 밀려온다.


피정 그 고요한 빛은 치열한 나의 현실 안에 그대로 변방의 사람들 집 안에 영원히

있었다,

있으리라,

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하늘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