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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S Feb 16. 2022

명확히 알 수 없었기에, 더욱 공감할 수 있었던 이야기

연극 가족이란 이름의 부족을 관람하고

앞열 사이드 좌석에서 공연을 관람했다. 그러기에 몇몇 장면에서는 돌아선 배우들의 표정 그리고 벽에 표시되는 문장들을 제대로 읽을 수 없었다. 평상시라면 불편하다고 느낄 관람환경 이었겠지만, <가족이 이름의 부족> 에서는 약간 다른 감정이 들었다. 빌리는 이보다 훨씬 심하게, 그리고 자주, 명확하지 않고 파편화된 정보만을 가지고 대화의 맥락을 추측하고 다른 사람들의 상황들을 해석하며 살아왔겠구나, 그렇게 부족하게나마 빌리에 감정이입하며 공연을 관람할 수 있었다.

가족과의 관계, 그리고 언어의 의미, <가족이라는 이름의 부족>은 개인적으로도 큰 관심을 지진 두 주제가 이어하기에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온 작품이다. 가족이라는 집단이 암묵적으로 혹은 명시적으로 맺어온 규악들을 통해 어떻게 구성원들의 삶에 영향을 주는지, 그리고 언어가 표현할 수 있는 한계로 인해 더욱 다양한 방법을 통해 노력해야 할 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커다란 식탁을 중심으로 둘러앉은 가족들. 연결된 일을 하는, 꽤 높은 교육/지적 수준을 가진 사람들이고, 고급스러운 단어들이 펼쳐진다. 하지만 그들이 내놓는 언어는 서로를 배려하는 대화라기보다는, 논쟁을 가장한 비아냥과 비웃음, 때로는 폭력과 강압에 가깝다. 부모자식 관계에서는 (최소한 한국에서는) 쉽게 듣기 어려운 거친 언어들도 나오는데, 친밀함의 표현이라기보다는 아슬아슬하다는 느낌이 든다. 그 안에서도 선천적 청각장애를 가진 막내 빌리는 계속 ‘무슨 얘기 하는 거야’ 라고 묻고, 다른 가족들은 ‘너는 굳이 다 들을 필요가 없어’ 라는 자세로 대응한다. 가족들은 물론 빌리를 애정하고, 빌리는 그런 상황에 적응해 가고 있다. 하나 그것이 빌리를 진정 존중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들의 규칙이 빌리의 충만한 삶보다 더 중요한 것인지는 의문이다.

빌리의 신체적 특징 때문에 그 불협화음이 더욱 두드러 보이지만, 다른 구성원들도 비슷한 모순과 정체성의 불안을 느낀다. 결말이 없는 추리소설을 쓰는 베스도, 논문은 좋지만 현실에서는 쓸모 없는 취급을 받는 다니엘, 자신의 재능으로 오페라로 성공할 수 있는지 자신이 없는 베스. 이 불안함의 악순환의 주원인은 무엇일까. 자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못하고 자신의 신념대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아버지 크리스토퍼 때문인지, 아니면 자녀들의 자신감 부족 혹은 비교의식에서 생긴 열등감과 회피 때문인지. 어떤 이유에서든 그 파괴적 관계는 서로를 조금씩 조금씩 갉아먹고 있는지 모른다.

불안하게나마 유지되어 가던 그 가정은, 빌리가 실비아를 사귀면서 균열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후천적으로 청력을 상실한 빌리는 실비아와 달리 타인의 입술을 읽기 어렵고 수화를 배워간다.

그리고 실비아를 통해 또 수화 커뮤니티에 참여하면서, 빌리는 추측하지 않고도 대화를 놓치지 않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내가 일도 할 수 있다고, 빌리는 자신의 가능성이 발견되는 듯 하여 흥분된다.

이처럼 자신들과 빌리가 맺어온 관계와 규칙과 어긋나게 행동하는 듯한 실비아에 가족들은 당황한다. ‘청력을 잃어가기보다는, 가족들을 닮아간다’는 실비아의 말에 한 방 맞은 듯 하지만, 수화와 비교하여 자신들이 사용하는 언어의 우월성, 빌리에게 그들이 했던 일의 정당성을 강조하고 싶어하며 삐딱하게 반응한다. 그래, 그렇게 이기고 싶어한다.


1막에서는 서로의 날카로움을 잔잔하게 감춰두려 했다면, 2막에서는 갈등과 감정이 폭발한다. 더 이상 가족들이 수화를 배우기 전까지는 대화를 하지 않겠다며 극단적인 방식으로 빌리가 폭발할 때, 그리고 입으로 나오는 언어와 다른 속내가 - 자기변명이 - 벽면을 채울 때, 빌리가 보청기를 빼고 상상하기만 했던 빌리와 실비아의 대화 속으로 들어갈 때(그 대화가 의심과 질투의 맥락에서 일어나기에 더욱 현실적이다) 받게 되는 인상은 강렬하다.


이처럼 작품은 가족의 모순과 위선을 이야기하는 듯 하지만, 그렇다고 가족이 아닌 다른 공동체가 완벽한 것은 아니다. 빌리와 달리 실비아는 청각 장애인 커뮤니티 안에서도 느껴지는 층위에, 그리고 긍정적인 언어만 해야 할 듯한 분위기에 짜증을 느낀다. 이렇듯 가족 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모두에게 언제나 완벽한 관계는 없음을 안다면, 그 타이밍에 맞게 서로의 다양성을 인정해 줘야 할 필요를 느낄 수 있을지 모르겠다.

마지막에 빌리는 가족으로 돌아온다. 사회적 규범은 충분히 인지하지 못하였기에 기존의 습관을 올바르지 못한 방법으로 사용해서 어려움을 겪고 돌아온 빌리. 제이크의 환청은 심해지고 있고, 가족간 관계에서 일어난 균열과 서로에 대한 상처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그리고 빌리와 제이크는, 누군가를 통하지 않고 처음으로 수화를 통해 대화한다. 수화로 배운 첫 번째 단어는, 바로 사랑이다.

이 대화와 가족들의 반응(제이크에게 친구라고 부르는 아버지 크리스토퍼, 실비아에게 애정을 느끼는 듯한 루쓰 등)은, 누군가에게 변화로 나가는 첫걸음일수도 있고 일시적 미봉책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물론 여전히 갈등과 모순은 계속되겠고 온전히 이해가 가능하기는 어려울 듯 하다.그래도 논쟁하기보다는 사랑하려고 할 때, 나의 기준으로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지 않으려고 노력할 때, 우리의 세계는 확장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몇몇 번역체의 표현들이나 호칭들이 어색하게 들리는 부분들도 있다. 하지만, 배우들의 호연과 인상깊은 연출들(빌리가 보청기를 뺄 때는 나 역시 다른 세계에 들어선 듯 하다) 이 공연에 더욱 몰입할 수 있게 해 준다.


실제로 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평상시에는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대부분 가족들이 나름의 문제를 경험하는 듯 한데 (명절 때 이런 사연들이 많이 나온다.) 정도는 다르더라도 작품을 통해 우리 가정과 나의 마음을 돌아볼 수 - 숨겨왔던 치부가 드러난 듯 하여 부끄러움이 느껴질지도 - 있고, 그리고 언어의 불완전함을 경험하며, 정확한 표현과 논리성 보다도 더 중요한 무언가가 있음을 깨달을 수 있지 않을까.


개인적으로는 다니엘의 캐릭터에 많이 감정이입이 되어서 좀 더 아프게 바라본 부분이 있었다. 괜찮은 교육을 받았지만, 주변의 기대수준은 높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그만한 성과를 이루지 못해서, 그리고 충족하지 못한 기대수준과 주변의 반응에 무언가에 집착하게 되는 모습이. 그러기에 더욱 다니엘은 빌리에게 (일정 정도 삐뚤어진) 애정을 느낀 듯 한데, 쉽지는 않겠지만 다니엘이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건강한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다면 좋겠다.


가족에서부터 먼저 이루어지면 좋겠지만, 가족이 아닌 관계와 커뮤니티에서도 비슷한 마음을 살았으면 좋겠다. 각자의 목소리, 각자의 감각, 각자의 언어를 좀 더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면, 고유성은 가지되 연결될 수 있는 부족으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제가 좋아하는 주제와 공감하는 캐릭터가 나오는 작품이라, 5점 만점에 4.7점 줍니다.


[이 글은 초대권을 제공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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