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스토킹의 상징이었던 그녀의 몇 마디가 마음에 남았을까.
집착을 사랑의 한 방식이라고 이해하며 넘어가기는 어렵다. 집착은 오히려 폭력이 더 가까울 때가 많다.
부모-자식이든, 연인이든, 부부이든, 직장 동료이든, 팬과 셀럽이든…
그 관계에 상관없이 집착은 관계를 망가뜨릴 수 있다.
아무리 상대방에 대한 애정에서 기반한 행동이라고 생각/주장할지라도,
거절/항의/차단 등 상대방이 의사표현을 할 수 있는 환경이나 가능성이 있더라도,
타인의 행동과 삶을 자신에 바램에 맞게 조정하려는 시도를 정당화하기는 어렵다.
'미투' 운동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집단주의와 잘못된 위계문화의 관성에서 벗어나 개인의 다양성과 권리를 존중하려는 시도가 점차 많아지고 있다. 하지만 아직 갈 길은 멀기에,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가운데 근본적인 원인에 대한 이해와 변화의 시도가 함께하지 않는다면, 특정개인 비난에 집중되어 잘못된 피해자도 생기는 등 시행착오는 더욱 커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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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일까, 장르소설의 대가 스티븐킹의 소설과 캐시 베이츠 주연의 영화로 널리 알려졌고 현재 두산아트센터에서 공연 중인 연극 <미저리> 는, 집착에 위험성 그리고 과도한 집착 등 잘못된 행동의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작품이다.
공연은 <미저리>의 작가 톰의 넘버원 팬이라는 애니가 눈길에서 큰 교통사고가 난 톰을 자기의 집에서 치료하고 있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20년간 로맨스 소설인 미저리 시리즈를 집필하며 대중적 인기를 얻은 톰. 하지만 보다 현대적이고 숭고한 작품을 쓰고 싶다는 생각에, 아직 출간되지 않은 작품에 미저리의 죽음을 담으며 시리즈를 마무리하려 한다.
그 전까지 톰을 극진히 대접하는 듯 했던 애니. 하지만 톰이 그의 집에 머문지 며칠 후 출판된 미저리의 마지막 작품을 확인하고 광분한다. 그녀는 외부와의 접촉을 완전히 차단하고, 그를 찾으런 온 지역 보안관도 감쪽같이 속이며, 톰을 협박하여 그녀의 뮤즈와도 같은 미저리가 다시 살아나는 작품을 쓰도록 강요/협박한다.
때로는 작가를 열렬히 지지하고 응원하는 것 같지만, 광기를 가지고 미저리라는 작품세계 전체 그리고 톰이라는 사람 그 자체마저 자신의 뜻대로 조정하려 드는 애니.
극이 진행되다 보면 소설 속 미저리의 죽음을 알기 전부터, 애니가 톰을 그의 방식으로 소유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자신을 넘버원 팬이라고 하지만, 연락 가능한 상황에서도 거짓말로 그의 존재를 외부에 완벽히 숨긴다. 또한 작품의 완성이 가까워지고 톰이 건강을 점차 회복해가자 자신을 떠나는 것이 두려워서 함께 죽음을 선택하기도 하고, 그가 나가려는 시도를 했던 걸 알아챈 후에는 망치로 그의 발을 짓이기까지 한다.
결국 톰은 기지를 발휘해 탈출에 성공하지만, 마지막까지 그녀는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한다. 자신은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극 초반, 애니는 톰에게 진통제를 주며 너무 많이 약을 주고 있지 않나 걱정이 된다고 하며, '과하면 죽어요'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 순간부터 마지막까지,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톰을 향한 자신의 행동이 약을 많이 주는 것보다 훨씬 과하다는 것는 깨닫지 못한다.
극 중간 스스로도 생각이 안정적이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순간적인 행동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녀를 그냥 광기에 빠진 사람으로만 보면 마음이 편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냥 나와 다른 세계의 존재로 받아들인다면, 작품에서 경험하고 느낄 수 있는 부분은 굉장히 좁혀진다. 그래서 그녀는 왜 그런 삶을 살게 되었는지 물어본다면, 중간중간 애니의 입을 통해(소설에서는 아마 더 풍성하고 다양하게 표현되지 않았을까) 몇몇 힌트들이 주어진다.
어릴 때 욕을 포함한 잘못된 말만 하면 입을 비누로 빡빡 문질렀다는 어머니. 어머니(와 미저리)만이 유일하게 자신을 실망시키지 않았다는 존재라고 할 만큼 특정인에 대한 과도한 집착, 그리고 세상을 선하고 아름답게 하기 위해 하나님이 자신을 보내셨다는 신에 대한 잘못된(‘과도한’가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이건 마치 IS를 이슬람 광신도라고 하는 것과 동일하기에) 믿음.
물론 동일한 과정을 걸쳤다고 모두가 애니와 같은 선택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다른 환경과 관계를 경험했다면, 조금 다른 삶을 살아갈 수도 있지 않았나 동시에 생각해 보게 된다.
한국을 대표하는 연극배우들이 연기하여 더 잘 표현되기도 하였겠으나,
공연 중 천진난만하고 귀여운, 매우 여리거나 순수하게 느껴지는 애니의 모습이 자주 보인다.
그러다가 한 순간에 타인을 자기 멋대로 판단하는 ‘집착의 화신’으로 돌변하기도 한다.
애니에게 이러한 양 지점이 함께 있는 것이 모순일까. 그냥 일반 사람들하고는 완전히 다른 이중인격, 다중자아를 가진 존재라고 쉽게 이야기하면 될까. 위에서도 쓴 것처럼, 그렇게만 바라보고 싶지는 않다.
대부분의 사람이 완벽히 착하거나 나쁜 마음만 지니고 살아가지 않는 것처럼, 분명히 애니 안에도 순수하고 다른 사람을 위했던 마음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 속에 많은 상처를 치유하지 못했기에, 그의 소망과 바램을 건강하게 표현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기에, 결국 왜곡된 자아가 위험하고 잘못된 방법으로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나타나지 않았을까.
사람은 환경(유전을 포함한)과 자신의 선택(의지를 포함한)을 통해서 만들어진다. 그래서 그 범위의 차이는 있더라도, 개인과 사회가 함께 담당해야 할 부분이 있다.
물론 애니의 행동을 무조건 이해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개인이 담당해야 하는 부분이 있고, 특별히 법적으로 문제가 되는 지점은 당연히 행동에 책임을 지고 처벌을 받아야 한다. 애니뿐 아니라, 우리 사회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적용되는 원칙이다.
하지만 생각해 본다. 애니가 어릴 때 잘못된 가르침과 억압 가운데 살지 않았더라면, 그가 외롭고 지칠 때 위로하고 함께해줄 사람이 있었더라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할 수 없음을 알았다면. 그리고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조금 더 건강하게 표현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면. 그녀는 조금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함께 사회를 살아가는 그에게 조금 더 관심을 줄 수 없었을까.
제목에 쓴 것처럼, 공연 가운데 애니가 무섭게 느껴지지만은 않았다. 그녀의 집착이 심해지는 것과 함께 더욱 분명히 보여지는 나약한 모습과 상처의 흔적에 오히려 가슴이 답답해지는 순간들이 있었다.
왜 그녀는 그런 선택을 하였을지 생각하다 보면, 그녀가 경험하고 키워왔을 아픔이 느껴졌기에 말이다.
물론 중대한 잘못을 했지만, 상처받은 사람들이 그런 행동을 하기 전 품고 치유해 줄 수 있는 사회이기를 바란다. 심판자가 되어서 비난하기보다, 서로가 가진 약점들을 이해하고 함께 보완해 줄 수 있는 세상이었으면 좋겠다.
잘못된 집착은 분명 폭력이지만, 그런 집착이 현실이 되기 전 막을 수 있는 기회들이 분명 많을 것이다.
그래서 선의의 피해자 없이, 개개인이 어떤 상황이든 모두 존중받는 세상에서 살수 있기를 바란다.